모피 상인이 코사크족 앞세워 개척한 시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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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 상인이 코사크족 앞세워 개척한 시베리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0.2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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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르마크, 모피 구하기 위해 시비리 정벌 나서…그 후예, 캄차카, 알래스카까지

 

“빙하가 확장되는 바람에 스위스 알프스의 마을이 파괴되었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강과 운하가 얼어붙었다. 1622년에서 1658년엔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로스 해협과 골든 혼(Golden Horn)이 얼어 배가 드나들지 못했다.”

16~17세기에 유럽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지구가 주기적으로 추워지는 소빙기(little ice age)를 맞아 북반구의 문명이 추운 겨울을 맞았다. 16세기 중반에 시작된 소빙기는 그후 300년이나 지속되었다.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당시만 해도 난방시설이 마땅치 않았다. 방안에서도 두터운 옷을 껴입고 있어야 했다. 모피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인류가 발견한 방한재료 가운데 모피보다 따듯한 게 없었다. 하지만 모피는 동물의 가죽을 재료로 하므로, 생산이 제한되었고 가격도 엄청나게 비쌌다. 부유층의 사치품목이었다.

모피 제품중에 최고는 담비 털로 만든 것이다. 담비는 아시아 북쪽, 시베리아에서 서식했다.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모피가 공급되기 이전에 유럽에선 러시아가 유일한 모피 생산국이었다. 러시아인들은 담비털을 ‘황금양털’이라고 불렀다. 시베리아 담비털은 가볍고, 광택이 나고 보드랍고 아름다웠다.

 

▲ 코사크족이 시베리아에서 모피를 거래하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1533년 이반 4세가 세 살의 나이에 러시아 왕위에 올랐다. 17살이 되던 1547년 이반 4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갖고 친정에 나서면서 ‘차르’(Tsar)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그의 정치는 강렬하고 잔혹했다. 극단적인 공포정치로, 동양에서는 뇌제(雷帝, the Terrable)라고 칭했지만, 그가 러시아사에 남긴 가장 큰 족적은 광대한 시베리아를 영토화했다는 점이다.

당시 시베리아는 타타르라고 불리는 몽골과 투르크계 종족들이 징기스칸의 후예로, 칸(khan)의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카잔(Kazan) 한국, 시비르(Sibir) 한국등이 바로 그러한 나라였다.

당시 러시아엔 스트로가노프(Stroganov)라는 상인 가문이 있었다. 이 가문은 우랄산맥 동쪽에서 볼가강의 지류인 카마강, 이르티시강, 오브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지를 관할했다. 이반 4세는 이 가문에 우랄산맥 너머 광대한 지역에 모피, 제염, 광업, 어업, 농업, 임업등 산업 전반의 개발권을 주었다.

그중 가장 값나가는 것이 모피였다. 모피는 서유럽의 부르죠아지들에겐 사치품이었다. 가뜩이나 추운 겨울이 지속되면서 모피는 유럽에서 중산층에까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아니케이 표도르비치(Anikey Fyodorovich Stroganov)는 이반 4세에게 시베리아에서 모피 무역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반 4세는 쾌히 승인했다.

말이 무역이지 약탈을 허용한 것이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시베리아에 버젓하게 나라를 운영하고 있는 타타르족의 한국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계획을 세운다.

그 무렵 볼가강에서 해적질을 하던 코사크족 무리가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에르마크 티모페에비치(Yermak Timofeyevich)라고 했다. 시베리아는 삼림이 울창하고 동토가 많아서 큰 강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고 거래와 이동이 이뤄졌다. 볼가 강에서 해적 노릇을 하던 무리들이 스트로가노프 가문에 붙었다.

코사크족(Cossacks, 카자크족라도 한다)은 남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떠돌던 유목민족이다. 기원에 관해서는 역사학자들마다 다르지만, 키예프공국이 망한후 그 유민과 쿠만족, 체르케스인등 남러시아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결합하면서 형성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그리스정교를 믿고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점에서 러시아인들과 공통점을 갖지만 생활습관과 문화는 슬라브족과 완전히 이질적인 민족이다.

이반 4세는 발트3국과 우크라이나로의 진출이 저지당하자 동방 시베리아로 진출을 꾀했다. 동방의 황금은 모피였다. 그 일환으로 1552년 카잔 한국을 정벌해 영토로 만들었다. 차르는 대부호이자 상인가문인 스트로가노프가에 시베리아 영토 확보를 지시하고 그에 해당하는 이권을 줬다.

카잔 한국이 패망하고 타타르족과 코사크족이 동시에 러시아의 공격을 받아 동쪽으로 쫓겨났다. 코사크족의 한 무리가 스트로가노프에게 용병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그 무리에 속해 있던 사람이 예르마크였다. 예르마크는 코사크족의 족장(헤트만)이 되었다.

스트로가노프는 코사크 무리를 받아들이며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을 사용했다. 즉 유럽인 유목민인 코사크족을 앞세워 아시아 유목민인 타타르를 공격하게 한 것이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이들 코사크 무리는 반역 또는 죄수들 그룹이었다. 전쟁에서 죄수를 최전선에 보내기도 한다. 죄수들은 전쟁을 통해 죄를 면제받는다. 스트로가노프가와 코사크족의 무리들 사이에 일종의 묵계가 이뤄졌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예르마크에게 당신들을 거둬들일 터이니, 타타르를 정벌할 것을 요구했다.

 

▲ 18세기에 그려진 예르마크 초상화 /위키피디아

 

예르마크에 대한 객관적 사료는 거의 없지만, 러시아의 민담이나 민요, 민화등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후대의 사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내용들이어서 정확치는 않지만, 예르마크는 러시아를 오늘날 세계 최대영토의 국가로 만들어준 인물임은 틀림없다. 마치 청나라에 쫓긴 명나라 유신이자 해적인 정성공(鄭成功)이 대만을 정벌한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선 새 영토를 확보해준 전설적 영웅으로 대우받고 있다.

카사크족은 약탈로 생계를 이어나가던 족속이었다. 그들이 그렇게밖에 할수 없엇던 것은 물론 러시아의 슬라브족 때문이다. 러시아는 변경지역에 거주하던 코사크족을 수탈했고, 그들은 좇겨다니며 그들보다 더 약한 종족과 계급을 약탈했다. 그 당시 약탈은 힘센 자의 논리이자 권리였다.

예르마크 휘하의 코사크 기병대는 스트로가노프 가문으로부터 타타르족에 대한 약탈을 허가받았다. 게다가 화포와 식량, 화승총을 제공받았다.

1579년 예르마크의 코사크 기병대는 동진했다. 예르마크의 초기 병력은 840명이었다.

처음 마주친 타타르 부족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부굴(Vogul)과 오스티아크(Ostiak)족은 깊은 숲속에서 가족 단위로 거주했는데 코사크군의 진격이 곧바로 항복했다. 이어 대규모 부족국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시비르 한국이었다.

시비르 한국은 징기스칸의 몽골(元)제국 영토였다가 몽골의 한 갈래인 킵차크한국 소속으로 편입되었으며, 나중에 티무르 제국에 복속한 투르크족 왕국이었다. 몽골 또는 투르크족은 왕을 칸 또는 한으로 표시한다. 시비르 한국의 마지막 칸인 쿠춤(Koutzum)은 티무르의 후손이었고, 수도 이시리(Ishir)는 목책과 해자로 둘러싸요 있었다고 한다. 시베리아(Siberia)라는 이름은 시비르(Sibir) 한국에서 유래한다.

1583년 코사크 기병대는 시비르한국의 수도 이시리에서 쿠춤 칸과 맞붙었다. 쿠춤 칸의 군대는 성문을 닫아걸고 농성작전을 펼쳤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공방전이 거듭됐다. 마침내 에르마크가 후퇴작전을 펴서, 쿠춤 칸의 군대를 성 밖으로 유인해낸 후 성 안을 급습하여 수도를 장악했다. 타타르족은 총포를 잘 다룰줄 몰랐고, 코사크 부대는 러시아가 제공한 화기로 시비리 군대를 제압한 것이다.

시비리 한국의 영토는 웬만한 유럽의 한 나라에 버금가는 넓이였다. 예르마크는 그 큰 땅을 이반 4세에게 바치며, 덤으로 시비리 한국에서 빼앗은 모피들을 상납했다. 이반 4세는 크게 기뻤다. 짜르는 예르마크와 그의 부하들의 죄를 사해줌과 동시에 사슬로 된 갑옷을 하사했다고 한다.

차르의 칭친을 받은 예르마크는 용기백배, 동진을 계속했다. 패배한 쿠춤 칸은 잔여 병력을 모아 반격을 꾀했다. 1585년 8월 쿠춤 칸은 예르마크의 부대를 기습했다. 예르마크는 부상을 당해 도망치다가 이르티슈 강에 빠져 익사했다. 그때 그는 이반 4세가 하사한 사슬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강에서 헤엄쳐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전해온다.)

코사크 부대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지만, 이번엔 이반 4세가 러시아 정규군을 투입해 1598년 시비리 한국을 멸망시켰다.

 

▲ 시비르 한국 /위키피디아

 

예르마크의 시비리 한국 원정을 시작으로, 러시아는 코사크족을 앞세워 시베리아 진출을 가속화한다. 이반 4세를 이은 피오트르 대제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이 이어지는 경로가 있는지 궁금하다며 코사크족에게 탐험명령을 내렸다. 차르는 “캄차카까지 가서 아시아와 미국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라. 남북방향과 동서 방향 모두를 확인하고 본 것을 기록하라.”고 지시했다.

피오트르 대제의 명을 받은 코사크 부대는 1639년 태평양에 다다랐고, 1648년 또다른 코사크 집단이 5척의 배를 타고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예르마크가 죽은지 60년만에 러시아는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진출한 것이다. 남으로는 아무르강에서 청나라와 충돌해 국경을 정하는 조약(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었다.

당시 시베리아로 향한 사람들의 최대 관심은 모피였다. 그 곳에는 검은 담비, 족제비, 비버 등 털과 가죽이 좋은 동물이 많았다. 러시아의 교역에서 모피는 매우 중요한 상품이었다. 부산물로 금·은도 발견되었다. 시베리아에 진출한 러시아인들은 원주민들에게 우호적으로 대했다. 원주민들은 모피를 세금으로 바치는 댓가로 보호를 받았다.

1741년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합병하지만, 1867년 ㎢당 1달러씩 계산해 총 720만 달러에 미국에 매각했다. 러시아는 그 돈으로 크리미아 전쟁에 참여한다. 미국도 현재 코사크 기병대가 모피를 찾아 개척한 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 러시아령 시베리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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