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차(茶) 무역이 낳은 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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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차(茶) 무역이 낳은 아편전쟁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0.2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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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중국차 유행하며 무역적자 확대…전쟁의 원인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양 사람들, 특히 영국인들이 중국의 차(茶) 맛을 알게 되었다. 대항해 시대의 개척자들이 동양과 서양의 무역로를 개설한 이후 중국의 차가 서양에 들어갔고, 상류계층 사이에 중국산 차, 중국산 비단, 중국산 도자기를 마시고 입고 쓰는 것이 유행으로 전파되었다.

영국인들은 중국 차를 사랑했다. 음차(飮茶) 습관은 영국인들의 생활을 바꾸었다. 점심이 조금 지나고 사람들은 차를 마시기 위해 휴식했다. 18세기엔 오후에 음식(주로 빵)을 먹은 후에 별도의 시간을 내 차를 마셨다.

서양인들에게 차는 좋은 점만 있고 해로운 것이 없다는 신념을 주었다. 하지만 차도 중독성이 있었다. 차에는 타닌산과 카페인, 아미노산등의 성분이 있는데, 이들 성분은 중독의 우려가 있었다. 이 중독 효과는 영국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중국산 차를 원하게 했다. 17~18세기만 해도 서양인들에게 차는 중국에서만 재배되는 줄 알고 있었다. 중국으로선 차를 팔아 은(銀)을 수입했고, 영국은 차를 사기 위해 중국과 상거래를 원했다.

 

▲ 보이차 다기 /남곡 김중경 제공

 

중국의 차 생산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에 유비가 홀어머니를 위해 차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도적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기록에는 남북조 시대에 돌궐의 상인이 중국 북쪽에 와서 차를 사갔다고 하고, 명·청기에 차는 중국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명·청기에 중국의 주요 수출품은 비단, 도자기, 차였다. 차 무역은 진상(晋商)과 휘상(徽商)에 의해 독점되었는데, 진상은 북쪽에서 캬흐타를 통해 러시아에 수출했고, 휘상은 남쪽에서 마카오를 통해 서양과 거래했다. 1704년 영국은 인도의 동인도회사 배를 광주(廣州)에 보내 340톤의 차를 사간 것이 중국산 차의 첫수입이었다.

영국인들이 차맛을 알게되면서 중국의 차 수출이 급증했다. 19세기로 넘어가면서 차는 비단과 도자기를 제치고 중국의 1위 수출품으로 부상했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로 하여금 중국 차 수입을 독점토록 했다. 1722년 동인도회사가 중국에서 수입한 금액의 56%가 차였고, 그 비중은 점점 늘어나 1730년 73%로 급팽창했고, 19세기초에는 90%를 넘어섰다. 동인도회사는 영국인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진 차 맛을 맞추기 위해 중국산 차를 대량구매했다.

영국정부도 큰 이익을 얻었다. 동인도회사에게 차 수입 독점권을 주고, 세금을 물렸는데, 그 세수가 엄청났다. 연평균 330만 파운드의 세금이 차에서 발생했다. 그 무렵 영국 총세수의 10%를 충당했다.

중국도 차 수출로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1817~1819년 사이에 광동(廣東)에서 차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약 900만 냥이었고, 1820~1824년 1,100만 냥, 1825~1829년 1,200만 냥, 1830~1833년 1,100만 냥이었다. 19세기 중엽 당시 쌀 1석의 가격 3냥과 비교하면 1,200만 냥은 400만 석에 해당하고, 100만 명을 1년 동안 먹일 양이었다고 한다.

 

▲ /위키피디아

 

한 세기 가까이 일방적인 무역거래가 진행되면서 영국과 중국 사이에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8세기 중반에 영국의 대중국 수입액과 수출액의 차이는 3~4배로 벌어졌다. 중국은 자급경제를 이루었지만, 영국은 중국에서 차와 비단과 도자기를 사가기 바빴다.

당시 국제통화는 은(銀)이었다. 영국의 은이 부족해졌다. 영국은 은을 수입해 중국에 지불했다. 1784년 동인도회사 광주 지점의 금고에 은이 부족해지면서 부도 직전에 몰렸다. 광주 주재원들은 영국령 인도 총독에게 은이 부족하니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1773년 동인도회사의 고위간부인 왓슨 대령은 벵골만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에 팔아 무역적자를 메우자는 의견을 이사회에 제출했다. 그 제안은 이사회의 지지를 받았다.

방식은 아편 특허권자가 인도에서 아편을 도매해서 동인도회사 광주지점에 환어음을 받고 팔고, 영국에서 현금으로 회수하는 것이다. 영국의 인도총독은 이를 승인했고, 동인도회사는 아편사무국을 설립해 인도의 아편생산과 수출을 독점했다. 영국의 아편 생산과 수출은 처음부터 중국과의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은 인도에서 식민통치를 강화하면서 말와, 비하르, 바리나시등 주요 아편생산지를 식민화하고, 인도 농민들에게 아편 생산을 강요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가공하고 중국에 수출했다. 동인도회사는 생산된 아편을 이동시킬 때에도 통행세를 물렸다.

 

아편은 차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소량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따라서 파급 속도도 차보다 빨랐다. 아편이 중국에 파고들면서 황실 귀족은 물론 관료, 군인과 민간인 등 다양한 계층에서 아편을 즐겼다.

중국인들 사이에 아편이 급속도로 파급되자 중국의 국제수지가 적자로 전환됐다. 청나라 조정은 1798년에 아편 밀수입과 아편 거래를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했지만, 마약에 빠진 중국인들은 차 중독에 빠진 영국인들보다 더 심하게 아편을 찾았다. 1817~1833년 사이에 동인도회사가 중국에 수출한 대금 가운데 아편 대금이 아편 이외의 상품 대금보다 3배를 넘었다. 이젠 중국에 흘러들어오던 은이 영국으로 빠져 나갔다.

영국의 지식인과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 밀무역을 통해 마약을 중국에 파는 것에 도덕적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영국정부는 1793년 매카트니, 1816년 애머스트를 사절단으로 보내 시장 개방을 요구했지만, 청 조정으로부터 창피만 당하고 돌아왔다. 중국은 영국에 광주만 무역항구로 개방하고 영국 상인은 행상으로만 거래할수 있게 제한했다.

결국은 서양의 강자 영국과 동양의 강자 중국이 한판 무역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청 조정의 입장에서 아편을 단속하지 않으면 왕조를 지탱할 수 없었고, 영국도 중국과의 대결에서 물러서면 세계 패권 장악이 힘들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서양과 동양의 두 제국은 전쟁을 치른다. 1839년과 1856년 두차례 걸쳐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벌어진 이른바 ‘아편전쟁’이다.

 

▲ 중국 윈난성의 차나무 /남곡 김중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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