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뉴스=권상희 문화평론가] “그렇게 깨작거리면서 먹으면 복 나가! 자고로 밥은 복스럽게 먹어야지,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하는 법이야”
어릴 적 할머니한테 들었던 잔소리는 한때 내게 식사시간의 즐거움을 빼앗곤 했다. 반복되는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눈치 보며 밥 먹기 시전, 이런 게 눈칫밥인가 싶었다.
물론 건강을 위해 골고루 맛있게 잘 먹어야한다는 뜻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모두가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을 많이 해서도 안 되고, 소리를 내서는 더더욱 안 되며 먹는 속도도 가족들의 평균에 맞춰야 하는, 뭔가 강박적인 식사예절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천천히 음미하며 씹어 넘기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밥상에 음식 맛을 느끼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을 터.
사회생활을 하며 느낀 건 할머니의 잔소리가 진리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소식좌’의 삶이 복을 불러들이지 못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잘 먹는(식탐의 의미가 아닌) 이들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분명했다.
단, 조건이 있다. 많이 먹어도 살찌면 안 된다. 이건 꽤나 가혹한 모순이다. 아무튼 잘 안 먹는(아주 조금 먹거나) 이들은 어느 순간 밥상머리에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로 낙인찍히곤 한다. 식사자리를 통해 정을 쌓아가는 우리 식문화에 있어 왠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라고 해야 할까. 소식좌의 ‘밥맛없음’이 마치 ‘밥맛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상황이 되고 만다.
먹부림 경쟁에 지쳐 주목받는 소식좌 예능
TV나 유튜브에서 먹방이 유행 콘텐츠로 자리 잡으면서 먹부림이 가능한 연예인이나 유튜버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 잘 먹는 것이 미덕임을 넘어 돈이 되는 현상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무한대 식탐은 식욕을 자극하기도, 보는 이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대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맛있게 먹는 것을 넘어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먹나 경쟁하는 모습은 어느 순간 먹방이 기행(奇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푸드 파이터가 보여주는 자극이 꽤 긴 시간 쌓이면서 이제는 시청자들이 ‘대식좌’의 건강을 염려하고, 그들의 식사 예절을 지적하는 상황이 됐다.
얼마 전 MBC 예능프로그램인 ‘전참시’에서 이영자의 ‘면치기’가 더 이상 맛있는 먹부림이 아닌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비매너 식습관이라는 비판이 제기된 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다. 과잉 먹방에 대한 피로도 표출로 보인다.
지난달부터 방송을 시작한 소식좌 먹방 ‘밥맛없는 언니들’은 심플한 구성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웹예능이다. 바나나 한 개로 하루를 버티는 산다라박과 아이스바닐라 라떼 한잔이 아침 겸 점심식사의 전부인 박소현.
이 둘이 노사연, 히밥, 유민상, 김숙 등 먹교수(대식좌)들에게 잘 먹는 방법을 배운다. 고기 한 점 씹어 넘기는데 5분이 걸리고, 5~6 숟가락 뜨면 식사를 멈추는 박소현과 맛 표현감각 제로인 미각 파괴자 산다라박이 어이없는 웃음을 유발하는데, 이게 바로 관전 포인트다.
잘 먹는 방법을 배운다고는 하지만 결코 많이 먹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을 오감으로 느끼며 환호하는 대식좌들과 먹을 때 무표정에 가까운 박소현의 모습은 마치 비교체험 극과 극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소식좌들 역시 맛있는 음식에는 진심이다. 단지 섭취하는 양이 밥맛없는 사람들처럼 느껴질만큼 지극히 적을 뿐.
획일화된 밥상 도식에 다양성 부여하는 소식좌들
최근 사생결단하듯 먹어대는 먹부림 고수들에게 가려져 조명 받지 못했던 소식좌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웹예능 ‘밥맛없는 언니들’은 한 에피소드 당 200~300만뷰를 기록하며 인기몰이 중이다.
그동안 ‘잘 먹음= 많이 먹음= 복스러움’이라는 획일화된 밥상 도식에 외면당했던 그들이다. 하지만 그들 나름의 식사법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순간, 더 이상 ‘왜 그렇게밖에 못 먹느냐’라는 핀잔이 필요 없어진다.
방송에서 보여주듯 본인의 식사량에 따라 밥그릇의 크기(대, 중, 소)가 다른 건 너무나 당연한 건데, 각자의 방식대로(!) 잘 먹는 것이 아닌 암묵적 강요가 느껴지는 밥상은 부대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잘 안(못) 먹음’이 마치 사회생활에서 ‘잘못’인양 여겨지는 편견 또한 불필요한 것이다.
소식좌 먹방이 주목받는 건 매너가 사라진 과잉먹방 퍼포먼스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이제 과식하는 것이 자랑인양 과시되는 상황과 때론 연출되거나 의도된 먹부림 경쟁이 즐겁지 만은 않다.
세상에는 먹는 것에 목숨 거는 사람도 있지만 그다지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밥맛없는 언니들’에는 그런 대식좌와 소식좌가 함께 어울려 식사한다. 평범한 구성이지만, 맥시멈 먹방에 대한 역발상으로 존재감 키워나가는 ‘미니멀 먹방’은 특별하다.
꽤 긴 시간 시각적 과식을 허용했으니, 이제는 좀 덜어내도 되지 않을까.
저작권자 © 오피니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