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안먼사태, 군대로 민주화 요구 시민 진압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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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안먼사태, 군대로 민주화 요구 시민 진압한 사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0.06 1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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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국, 덮어둔 과거 연상시킬까 우려해 영화 '택시운전사' 상영 금지

 

중국 당국이 한국 영화 『택시운전사』를 상영금지시킨 이유로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홍콩 빈과일보가 보도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을 취재한 독일 기자와 그를 도운 택시운전사의 스토리를 다뤘다.

중국에서도 이 영화가 개봉된 후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톈안먼 사태를 연상시킨다는 중국 네티즌들의 글이 잇따라 올라오자 상황이 변했다고 한다.

톈안먼 사태는 중국 정부가 광주 민주화운동 9년후인 1989년 6월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과 시민 100만여 명을 무력으로 진압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당시 권력자인 덩샤오핑이 이를 진압한 후 경제개발을 단행했다. 톈안먼 사건 이후 중국은 인민들에게 빵은 줬지만, 자유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주지 못했다. 이 사건은 언젠가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존재로 잠복해 있는 것이다.

중국 당국은 텐안문 사건을 연상시키는 일체의 활동과 보도를 통제하고 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택시운전사의 상영 금지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중국 당국은 이달 초 중국 내에서 택시운전사의 상영을 금지시켰고, 영화 사이트에서도 관련 페이지를 삭제토록 했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에서는 관련 글이 즉시 삭제되고, 검색 사이트 바이두(百度)에서는 검색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중국 당국이 그토록 두려워 하는 텐안문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되짚어 보자.

  

▲ 2008년 텐안먼 사건 19주년을 기념하는 워싱턴의 사진전 /위키피디아

 

텐안먼 사건 진행과정

 

1989년은 뱀의 해였다. 새해가 시작하며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중국은 나날이 심각해지는 인플레이션과 사회풍조 타락, 부패의 만연화, 관리의 독직, 소득 격차 확대 등의 사회문제가 확대되고, 인민들 사이에 공산주의 신념이 날로 희박해져 갔다.

해외에서는 공산세계에 두가지 큰 변화가 일어났다. 폴란드, 헝가리,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등 발트3국등에서 자유화와 민주화 물결이 고조됐다. 소련에서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가 공산주의를 변모시키면서 민주화와 민족주의 운동이 큰 물결을 이뤘다.

 

새해가 막 지나자 반체제 물리학자인 팡리즈(方勵之)가 덩샤오핑(鄧小平)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웨이징성(魏京生)등 반체제인사들을 석방할 것을 호소했다. 웨이징성은 덩샤오핑에게 제2의 마오쩌둥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15년간 감금형을 선고받은 사람이다. 팡리즈 서한은 해외의 유명한 중국인 학자 51명과 중국 지식인 39명의 서명을 받았다. 덩샤오핑은 격노하고 이를 거절했다.

그해 2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아버지)이 베이징을 방문해 팡리즈 부부등과 만찬을 하기로 했는데, 중국 강경파들은 그를 연금해 만찬장에 참석치 못하도록 했다. 정부의 이같은 행위가 학생과 지식인들을 격노케 했다. 학생들은 기회를 노렸다.

 

4월 15일 민주화와 자유화를 지지하다가 2년전에 실각한 후야오방(胡耀邦)이 사망했다. 그의 사망이 학생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베이징의 학생들은 그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명예를 회복시키고, 나아가 언론·집회·보도의 자유를 제창할 것을 계획했다. 베이징 대학에서는 “죽어서는 안되는 사람은 죽었고, 죽어야 할 자는 아직 죽지 않았다”, “진실한 사람은 가버렸지만 위선자는 아직 살아있다”면서 후야오방을 찬양하고 보수파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포스터가 제작됐다.

중국 공산당은 후야오방의 명예회복을 거절했다.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면 그를 실각시킨 덩샤오핑등 강경파들의 잘못을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후야오방의 장례식을 계기로 수천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가 “민주 만세, 자유 만세, 부패 타도”의 슬로건을 외쳤다.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며 톈안먼 광장에서 6주동안 시위를 계속했다. 각 성의 대학생과 노동자, 지식인, 언론인, 연구원, 음악가, 배우, 일반시민, 심지어 일부 공산당원과 군인들이 성원했다. 5월 중순에 이르자 시위 인파는 100만명을 돌파했고, 23개 도시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발생했다. 100만 군중은 국내외 TV에 방영되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5월 30일 톈안먼광장에는 높이 10m 크기의 민주여신상이 미술대 학생들에 의해 세워졌는데,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모방한 것이었다.

 

대규모 시위사태를 맞아 중국공산당은 분열됐다.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는 전임자인 후야오방과 마찬가지로 학생시위에 공감하며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개혁과 현대화를 제창하며 정치자유화의 방향으로 개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는 자본주의식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실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과 리펑(李鵬) 총리등 강경파들은 2년전 학생시위를 제압하며 후야오방을 제거시킨 것처럼 이번에도 자오쯔양과 대결 태도를 취했다. 강경파들은 실권자인 덩샤오핑을 어떻게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것인지를 고민했다.

5월 16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쵸프 총서기가 베이징을 방문했다. 중·소 정상회담에서 자오쯔양은 고르바쵸프에게 “중국 공산당의 모든 중요한 결정은 덩샤오핑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알려주면서 중국의 잘못된 것들이 덩샤오핑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넌지시 귀뜸했다. 이 소식을 들은 덩샤오핑은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며 몸시 화를 냈다고 한다.

중국 지도부의 체면을 더욱 깎아내린 것은 시위대 때문에 국빈들의 일정이 취소되거나 축소됐다는 사실이다. 환영의식을 톈안문광장에서 하지 못하고 공항에서 옮겨 거행하고, 고르바쵸프의 고궁참관 프로그램과 인민영웅기념비 헌화 계획도 취소됐다. 기자회견도 당초 예정된 인민대회당에서 하지 못하고 그의 숙소인 국빈관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이런 갑작스런 변동은 중국 정부가 정세를 통제할수 없는 무능력한 정부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일부 시위자들은 덩샤오핑의 허수아비를 불태웠다. 시위대들은 “덩샤오핑 물러나라. 리펑 물러나라, 자오쯔양 만세”라는 구호를 외쳤다.

소련 손님들이 떠나간 뒤에 덩샤오핑은 마침내 강경파들을 지지하게 됐다.

 

▲ 중국 베이징의 텐안먼(天安門) /위키피디아

 

5월 17일 중국공산당 최고위층은 작전회의를 열어 시위대를 어떻게 저지할 것이며, 자오쯔양의 거취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5월 19일 덩샤오핑은 우한으로 날아가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전국 각지에서 10개 군(軍) 30만 병력과 1개 장갑사단, 1개 공수사단, 기타 특수부대를 소집했다. 계엄령도 즉각 선포했다. 만일 베이징이 위태로우면 우한에서 중국공산당 제2사령부를 세우겠다는 각오였다. 대량의 부대를 동원한 것은 시위대에 위압감을 줌과 동시에 혹여 자오쯔양과 그의 측근들이 군부쿠데타를 일이킬 가능성을 대비키 위한 것이었다.

 

5월 19일 계엄령에서 6월 4일 진압시까지는 군대이동 및 대치 기간이었다.

2주간 톈안먼광장을 점거하고 있던 학생들은 피곤했지만, 시민들의 열성적인 지지를 얻었다. 베이징시민들은 그들에게 음식, 숙소, 생활필수품을 제공하고, 군인들이 진입해올 경우를 대비해 바리케이트를 치는 것을 도왔다.

첫 번째 부대가 도착했을 때 군인들은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고, 온화하고 선량하게 시민들을 대했으며, 시민들이 제공하는 음식물도 받았다. 시위대는 설마 군인들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6월 3일 저녁 위기가 임박했다는 불길한 징조가 뚜렷해졌다. 어느 TV아나운서는 시민들에게 톈안먼광장을 떠나라고 경고했다. 학생들은 이 경고가 허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녁 10시 리펑 총리는 주둔군에게 전속력으로 텐안먼광장으로 달려가 시위자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한후 동틀 무렵까지 광장을 깨끗하게 치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탱크와 장갑차, 기관총을 휴대한 군인들이 3개 방향으로 진격했다.

6월 4일 새벽 35대의 탱크가 텐안먼광장의 학생 숙영지를 밀고 들어갔다. 새벽 4시 광장의 불빛이 꺼졌다. 자동소총에서 발사되는 불빛과 총성이 광장을 메웠다. 수많은 학살이 행해졌다.

새벽 6시 도주할 사람은 모두 도주하고, 사망자들과 중상자들이 살인의 현장에 남았다. 그곳에서 일어난 어떤 상황도 누설이 허용되지 않았다. 학살은 7시간내에 끝났다.

이날 사상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초기에 서방측에선 3,000명이 사망하고 1만명 이상이 부상당했다는 추산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이후 사망자수를 400~800명 사이라고 정정했다. 6월 16일 중국정부 대변인은 미국 NBC방송의 톰 브로카우 앵커에게 “광장안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사상자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오쯔양은 해직되고, 6월 24일 장쩌민(江澤民)이 새로운 총서기로 임명됐다.

 

텐안먼 진압 이후 중국정부는 안팎으로 위기에 봉착했다. 전세계의 비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경제·군사·외교적 측면에서 국제적 제재를 받았다. 동지적 관계에 있는 공산권도 붕괴직전이었다. 그해 12월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은 반정부 시위대를 유혈진압하다 체포돼 처형됐다. 동독에서 민주화시위가 확산되며 이듬해 동서독은 통일됐다. 1991년 공산세력의 종주국인 소련은 해체됐다.

덩샤오핑은 이런 안팎의 난관을 이겨내기 위해 공산당 독재를 강화하면서 자본주의적 성장모델을 추수하기로 방향을 설정한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기업 사유화를 단행하고, 인민들에게 주택소유권을 주며, 주식시장을 개설한다.

텐안먼 사태이후 중국은 구소련이나 동구 공산국처럼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번영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자유의 억압이었다.

 

▲ 1989년 텐안먼 사태때 탱크로 시위대를 막는 시민의 모습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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