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에세이] 문화차이와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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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 에세이] 문화차이와 리더십
  • 조병수 프리랜서
  • 승인 2017.10.0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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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법규와 관습에 정통한 가운데 배경 문화 존중하는 것

 

[조병수 프리랜서] 1980년대에는 런던 근교에만 나가도 한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외무부 자료로는 1985년 영국 체류 한국인이 교민 38명 포함하여 3천 568명이었다는데, 요즈음에는 그 숫자가 4만7천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달라진 국력과 함께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 런던지점의 현지채용직원은 영국계와 일부 말레이시아, 스페인, 인도 출신들, 그리고 서너 명의 한국계가 섞여있었다. 초급책임자로서 잔뜩 긴장한 가운데 현지업무와 문화를 배워나가는데, 지점의 근무 분위기 중 영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었다.

늘 파이프담배를 입에 물고 다니던 자금담당 딜러가 코크니(cockney)라는 런던 토박이 말로 속사포같이 쏘아대며 소란스럽게 돌아 다녀도, 모두들 의례 그러려니 하는 듯 애써 무관심한 것이었다.

그 딜러는 오전에 약간의 일일 부족자금(overnight fund)과 단기자금을 중개회사(broker)를 통해서 구해놓고는 일찌감치 점심 먹으러 나갔다가, 한잔 술에 얼큰한 모습으로, 그것이 런던 금융시장 딜러들의 관습인양 의기양양하게 들어오곤 했다.

그러면서 괜히 어슬렁거리며 직원들과 키득거리거나, 자금수요가 간혹 몇 백만 불이라도 늘어 날 때는 “자기가 아니면, 한국계 은행의 위상으로는 그 정도의 자금을 빌릴 수도 없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이런 걸 보고 있자니 열불이 나는데도, 노동자천국이라는 당시의 영국에서 목소리 큰 사람과 다퉈봐야 시끄럽기만 할 것 같아서인지, 모두들 웬만하면 웃어넘기며 그렇게 묘한 균형을 이루어 나가고 있었다.

 

그때가 ‘철의 여인(Iron Lady)’으로 불리는 마가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수상 재임시절이었다. 1년 넘게 끌어온 탄광노조 파업과 데모 장면이 연일 TV에 오르내리던 그 당시, 런던에 진출해 있던 한국계 은행들은 세계금융중심지에서 새로운 금융기법을 배우는 걸음마 단계였다.

국제금융시장에 대한 접근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한국계 진출기업들의 신용장(L/C)관련 업무와 중동지역 건설관련 대출 같은 것이 업무의 주종을 이루었다. 유가증권거래와 결제를 위한 유로클리어(Euro Clear) 가입이 뉴스가 되고, 단기예금증서(Certificate of Deposit) 같은 것을 발행해도 “신종(新種) 금융업무를 취급했다”고 본점에다 보고하던 때였다.

국제은행간 통신수단인 스위프트(SWIFT)는 물론 팩스도 없었고, 현지업무용 전산시스템 이외의 개인용 컴퓨터(PC)는 꿈도 못 꿀 시기였다. 대외 및 본점 교신은 텔렉스를 이용했는데, 숫자나 내용을 테이프에 천공(穿孔)하여 찍고, 그것을 기계에 걸어서 타전했다.

한국에서 파견된 책임자들은 그런 여건 속에서 현지문화와 관습, 금융기법을 배우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3년 단위로 뭔가 좀 알만하면 귀국하고 또 신참이 배치되곤 하니까, 현지전문가로 양성되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걸핏하면 “변호사(solicitor)니, 소송(suit)이니” 해대는 현지직원들을 감당해 내기가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형국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출근 길에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그 당시 지점이 영국 금융중심지인 시티(the City)의 영란은행 (Bank of England) 부근에 있었다. 그 골목 입구에 있는 일본계 은행 지점 앞을 지나는데, 제복을 단정히 입은 현지직원이 건물벽 아래로 보도(步道)와 맞붙은 대리석 부분을 정성껏 닦으면서 왁스로 광을 내고 있었다. 당시의 나에게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야, 똑 같은 동양인인데, 저들은 저렇게 현지직원들을 관리하고 있는데···.’

 

▲ 런던 시티, Bank of England 뒤쪽(북서쪽 코너) 풍경 /사진=조병수

 

그러던 어느 날, 출납계(casher)에서 천 파운드 정도의 현금시재가 비는 일이 발생했다. 소매금융을 하는 지점이 아니라서 출납이래야 소액현금(petit cash)과 거래수표의 교환용 등 소규모로 운용되고 있었는데,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입출금 내역과 출납직원의 동선(動線)을 따져보았더니, 점심시간 식사교대와 현금보관상자 열쇠관리에도 허점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좀더 자세한 경위를 파악하던 중에 출납담당직원을 잠시 휴게실에서 기다리게 했더니, 느닷없이 “그만둔다”면서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다. “아직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았다”고 엉겁결에 소맷자락을 잡으려 하자, 이를 뿌리치며 휑하니 나가버렸다.

그리고는 그때 잠깐 기다리게 한 것을 “휴게실에 감금당했다”, 하던 얘기나 끝내고 가라며 잡으려 한 것을 “때렸다(hit)”면서, “소송이니 뭐니”하는 황당한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물론 더 이상의 논란은 없이 그렇게 끝이 났지만, 아무리 문화차이니 어쩌니 해도 정말 어이가 없었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어쨌던 그 덕분에 지점의 내부통제시스템을 재점검하게 되고, 근무자세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런 과정에서 그 요란스런 딜러를 포함한 일부 직원들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다녔다.

그러니 현지직원 관리문제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다.

 

그러던 차에 지점 편제와 담당업무가 바뀌는 것을 계기로, 그 딜러부터 관리해나가기 시작했다. 내 자리도 딜링룸 안으로 옮겨서 같이 딜링보드에 매달리며 혼자만의 독무대가 아님을 일깨워주고, 자금조달과 운용도 가급적 브로커회사를 통하지 않고 환거래은행들과 직접 접촉해서 중개수수료 같은 비용도 줄여나갔다.

그 딜러가 자기 마음대로 떠들며 자유롭던 시절이 그리워서인지 때때로 예전처럼 소란을 떨었지만, 더 이상의 관용은 없었다. 대책회의 끝에 고문변호사를 통해서 알아둔 ‘경고장 (warning Letter)’이라는 카드를 빼어 들었다.

그 당시 피고용자의 천국이라는 영국에서도, “업무상의 문제로 사용자가 세 번의 경고장을 주면 해고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처음으로 경고장을 그 딜러에게 내미니까, 예상한대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는지 며칠 내에 나름대로 주의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한두 달이 지나자 또다시 병이 도졌다. 급기야 술까지 마시고 들어와서 민망할 정도로 소란을 떨었다.

그래서 제2차 경고장을 준비해서, 이번에는 그 딜러의 자택으로 우송했다. 그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보냈는데, 그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바뀔 수가 있는가 할 정도였다. 백약이 무효일 것 같던 딜러의 행동이 일순간에 바뀌어서, 엄청나게 적극적이고 괜찮은 직원으로 변해버렸다.

그 사람 입장에서도 딜러로서 그 나이에 직장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걸핏하면 법(法) 운운하던 친구이니 2차 경고장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해고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을 터이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990년대 초에 그 딜러가 모범직원으로 선발되어서, “한국방문 및 본점방문”이라는 포상여행을 왔다. 정말 엄청난 변화였다.

무서워서 비행기도 못 타고, “유럽대륙에 나가면 이태리인 같이 생겼다고 놀림을 받는다”면서 영국 밖을 나가지 않는다던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고용주인 한국인을 은근히 내려다보는 것 같던 사람이 가족과 함께 한국에 와서 “좋아요(wonderful, lovely)!”를 외쳤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그 당시를 떠올리며 남모를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딜러문제를 그저 ‘문화차이로, 또는 개인의 성향으로’만 이해하고 계속 내버려두었다면 과연 이런 해피앤딩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정말 호랑이 담배 물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다국적 조직을 활성화시키는 리더십의 요체(要諦)는 우선적으로 현지법규와 관습에 정통한 가운데 원칙을 중시하고, 구성원들의 배경문화를 서로 존중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 일화이다.

그리고 그런 학습과 도전의 시간들을 토대로 오늘 날이 만들어 진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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