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는 상인이었다…무역거래로 청나라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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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는 상인이었다…무역거래로 청나라 건국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9.0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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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허가증으로 인삼, 모피, 진주 거래…이익금으로 군비 확장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국의 명(明)나라가 북로(北虜)라 불리는 몽골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만주 지방에도 서서히 변화의 물결이 다가왔다. 명나라는 만주 지역에서 요동의 심양(瀋陽) 무순(撫順) 개원(開原)을 중심으로 쐐기모양으로 지배를 하고 있었고, 그 경계 밖에는 상업에 의존하는 대규모 여진족 군벌이 지배하고 있었다. 상업은 명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이뤄졌고, 상업을 통해 번 돈으로 형성된 무장 상업집단이 준동했다. 만주의 여진족 군벌들은 상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병력을 동원했으며, 이 병력은 명나라에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명의 여진족 지배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식이었다. 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명은 여진족의 분열을 이용했다.

당시 요동지역의 명나라 군 사령관은 이성량(李成梁)이었다. 그는 조선 출신으로, 그의 맏아들 이여송(李如松)은 임진왜란 때 명군을 이끌고 조선에 출병하기도 했다. 이성량이 요동총병으로 있을 때인 1583년 만주 해서여진에 아타이(阿台)라는 족장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성량은 만주에 뚜렷한 여진족 지도자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했다. 역대 한족 왕조들은 “여진이 1만이 되면 천하를 감당할수 없다”(女眞一萬天下不堪當)라며 만주에 대세력가가 나타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전략을 취해왔다. 앞서 여진의 금(金)나라가 융성해 한족 송(宋)나라가 양쯔강 아님으로 밀려난 적이 있다.

 

이성량은 아타이 세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명에 고분고분한 세력들을 규합했다.

1583년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교창가(覺昌安), 아버지 타쿠시(塔克世)가 명의 편에 서서 아타이 토벌에 참전했다. 전투는 명나라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아타이의 성이 함락되고 아타이는 피살되었다. 이때 사단이 벌어졌다. 아타이의 부인은 교창가의 손녀였다. 누르하치에겐 사촌간이었다. 할아버지는 손녀딸을 구하기 위해 성내 깊숙하게 들어갔다. 성을 함락한 명군은 여진족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그 학살 대상에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포함됐다. 명군의 오인사격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누르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 청태조 누르하치 /위키피디아

 

이때 이성량과 누르하치의 심적 변화를 잘 살펴보자. 두 사람의 마음씨가 세상을 바꿔 놓았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이성량은 두 사람의 피살이 고의가 아니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리곤 누르하치에게 명 황제가 내린 칙서(勅書)라는 상업허가증 60통을 줬다.

당시 명나라는 칙서를 통해 여진족을 통제했다. 이 칙서는 명에 우호적인 부족에게만 배분되었고, 저항하는 부족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이 증서가 있으면 떼돈을 벌었다.

누르하치는 억울하고 분통한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나이 25세. 부족도 통제하기 어려운 나이에 명나라와 대적할수 없었다. 언젠가 복수하리라, 생각하며 그는 조부와 부친의 목숨 값으로 얻은 교역허가증으로 돈을 벌었다.

 

바야흐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였다.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며 국제교역이 커지고 있었다. 은이 국제 기축통화 역할을 했고, 명나라는 세금을 은으로 걷었다.

건주 여진의 누르하치는 60통의 칙서로 만주지역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만주의 주생산품은 인삼, 모피, 진주등이었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바로 백두산 북쪽으로, 인삼이 잘 자라는 지역이다. 백두산 관광을 해본 사람이라면 길림성의 장뇌삼 쇼핑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인삼은 조선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명나라 교역을 장악했다. 누르하치 휘하의 상인들은 만주의 특산물을 베이징으로 가져가 몇의 폭리를 취했다. 거의 전매나 다름없었다.

누르하치는 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을 고스란히 군비 확장에 썼다. 이성량이 미안한 마음에서 준 교역허가증이 누르하치라는 호랑이를 키운 셈이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족장이자, 군벌이요, 거상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상업으로 번 돈을 쌓아두지 않고, 여진족을 하나씩 하나씩 제압하는데 썼다. 1588년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대부분을 통합했다.

이성량은 여기서도 우물쭈물했다. 곧바로 누르하치를 제압하지 않고 그를 달래기 위해 건주위도독첨사(建州衛都督僉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누르하치는 이 벼슬을 내세워 주변의 여진족들에게 우위를 과시하는데 사용했다.

1989년 그는 스스로 왕을 칭하며 명을 위협했다. 하지만 명은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을 제압할 시기를 농쳤다. 곧이어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 7년전쟁이 벌어지고, 명나라는 왜와의 전쟁에 휘말려 만주를 방치했다. 즉, 만주에서 호랑이가 커 나가도록 내버려둔 것이다.

 

▲ 명말기의 만주 /KBS역사저널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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