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 후…명나라 재정위기로 수탈당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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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 후…명나라 재정위기로 수탈당한 조선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9.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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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함대 패배로 국제 은값 폭등…명 사신들, 조선서 한몫 챙기기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의 패배와 1592년 임진왜란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두 사건은 비슷한 시기에 4년이란 짧은 기간을 두고 벌어졌다. 또 두 사건은 동양과 서양에서 커다란 변혁을 몰고 왔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패배한 이후 세계 해양의 패권이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이동했다. 또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일본과 중국에서 정권 교체가 발생하고 조선에선 극심한 사회변동이 전개됐다.

하지만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별개의 요인에 의해 발생했다. 서양은 동양을 새롭게 발견하고, 동양은 서양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하던 단계였다. 국제 무대라는 개념이 막 생겨나던 시절이었다.

국제화의 초기 단계에서 벌어진 동양과 서양의 두 사건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실마리가 있다. 그 끈은 은(銀, silver)이었다. 그 스토리를 연결해보자.

 

▲ 1598년 8월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해군의 전투도 /위키피디아

 

① 최초의 은본위제도

 

한족의 국가 명(明)나라는 몽골(元)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건국했지만, 늘상 북로남왜(北虜南倭)에 시달렸다. 북쪽엔 몽골이, 동남해안엔 왜구가 골칫거리였다.

임진왜란 직전인 1550년 징기스칸의 자손임을 내세운 몽골의 알탄이 세력을 확장해 베이징을 8일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명군은 몽골의 방화와 약탈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의 침공에 명나라 군사비가 급증했다. 명나라는 초기에 토지세를 쌀 또는 보리로 받았는데, 세액의 불공평과 세리의 부정이 심해 세수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재정 적자에 시달렸다. 이에 1560~70년대에 부역과 조세, 잡세등을 일원화해 납세자의 토지소유 면적과 납세자수(丁口) 수에 따라 세액을 결정하며, 모두 은(銀)으로 납부하게 했다. 일조편법(一條鞭法)이라는 개혁세법은 명나라 경제를 세계 최초로 은본위제로 전환시켰다.

 

② 은의 블랙홀

 

몽골에 이어 왜구가 16세기 중엽에 중국 동남부 해안을 겁탈했다. 명나라가 북로남왜의 침략에 대처하면서 국방비가 급증하고 은의 흐름이 급속히 빨라졌다. 은의 부족이 심해지고 중국은 전세계 은을 빨아당겼다.

처음엔 왜구의 밀무역을 통해 일본산 은을 조달했다. 그것도 모자라 스페인이 남미 안데스 지역 포토시(Potosi) 은광 등지에서 채굴한 은이 필리핀을 경유해 유입됐다. 은은 당시 국제적으로 서양과 동양에서 공히 사용하는 기축통화였으며, 중국에선 납세 통화였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은으로 명나라는 전쟁을 치렀다. 16세기 후반 북방민족을 막기 위해 총세출의 3분의2를 국방비에 쏟아부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중국은 블랙홀 같이 세계의 은을 흡수했다. 일본 역사학자 고바타 아츠시(小葉田淳) 등의 연구에 의하면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 후반 중국에 유입된 은은 2,100~2,300톤에 이르는데, 그중 일본산 은이 1,200~1,300톤이고, 나머지는 남미산인 것으로 추산됐다.

 

③ 무적함대 패배가 초래한 명나라 재정위기

 

▲ 명나라 神宗(만력제) 초상화 /위키피디아

1588년 아르마다(Armada)라 불리던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함대에 완패했다. 이 전투는 해상왕국 스페인의 몰락을 초래했다. 세계 해양의 제해권이 영국에 빼앗기면서 스페인 상인들이 명나라로 보냈던 은의 양도 급격하게 줄었다.

중국의 재정지출이 조금도 줄지 않은 가운데 은의 공급량이 급격히 감소하자, 국제 은 가격이 폭등했다. 명나라에 재정 위기가 닥쳐왔다.

이럴 때 장사치들은 재빠르게 움직인다. 이들은 나라가 부도나든 말든 자신의 이문만 챙기면 그만이다. 명나라 국고에 은이 고갈되어 갔지만, 상인들은 은을 숨겨놓고 내놓지 않았다.

명의 신종(神宗, 만력제)은 태감이라 불리웠던 세리들을 전국에 피견해 광세(礦稅), 상세(商稅)라는 명목으로 은을 마구잡이로 수탈했다. 세리들은 미세한 양의 은을 걷기 위해 민간의 가옥을 철거하고 무덤까지 파헤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중국 역사에서 이를 ‘광세지폐’(礦稅之弊)라고 한다.

 

④ 임진왜란 때 들어온 중국 상인들

 

중국에서 은값이 폭등하자 상인들은 은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갔다. 조선 땅에서 전쟁이 터졌다.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진입했다. 리스크가 높아지면 수익률도 높은 게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진리다. 돈을 벌려는 자는 전쟁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목숨 값이 곧 이윤이다. 요동의 상인들이 명나라 군대를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1차적으로 명나라 군대의 봉급을 노렸다. 봉급은 은으로 줬다. 역사학자 한병기에 따르면 명군 병사 1인당 월급이 1냥50전이었으니, 최고 10만명이 투입되었을 때 한달에 15만냥이 뿌려졌다. 이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중국군이 가는 길에 상인들이 수레를 끌고 따라가 장사를 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명군이 1598년 사천에서 임실로 이동하는데 병사들보다 먼저 상인들이 도착해 소와 돼지를 잡아 구워 놓고 병사들에게 팔았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상술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조선사람들을 상대로도 장사를 했다. 조선인들에게 푸른 물감을 들인 광목, 털모자, 털외투 같은 진기한 물건을 가져다가 팔았다. 한양에는 명나라 상인들이 거래하는 난전이라 불리는 상가가 들어섰고, 그곳에는 명나라 물건이 넘쳐나 사치풍조가 만연했다고 한다.

 

⑤ 은으로 갚는 재조지은

 

상인들이야 가격차(arbitrage)를 노리고 들어오지만, 명나라 정부는 조선에 은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망해가는 나라를 살려 주었으니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은으로 갚으라는 얘기였다.

중국에 은이 부족해지고 은 가격이 치솟는 상황에서 명의 사절단은 조선에 오면 은만 요구했다. 함경도 단천에 대규모 은광이 있지만, 개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다.

명나라 사신들의 은 징발은 선조 다음 임금인 광해군 때 절정을 이뤘다.

광해군이 등극한 해인 1609년 책봉례를 주관하기 위해 온 명 사신 유용(劉用), 이듬해 왕세차 책봉의식을 주관하기 위해 온 염등(冉登)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용은 자신의 접대를 위해 책정한 비용을 전부 은으로 환산해 받아가며 약 6만냥의 은을 챙겨갔다고 한다. 명나라 군대 4만명의 한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액수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그 다음에 온 염등도 상당한 액수를 챙겼다고 한다. 염등은 접대 차원에서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자고 해도 은을 가져오라 했고, 300냥 어치 예물을 조선왕(광해군)에 바치고 은 9천냥을 요구해 받아갔다고 한다. (한명기 저)

광해군 말년인 1621년 명나라 사신 유홍훈(劉鴻訓)과 양도인(楊道寅)이 8만냥의 은을 거두어 갔고, 후금 공격의 원병을 구하러온 양지원(梁之垣)도 수만냥을 수탈해 갔다고 한다. 유홍훈은 조선에서 수탈한 은으로 고향인 산동에 거대한 저택을 짓고 명나라에서도 부러음을 샀다고 한다.

이같은 명나라 사신의 수탈이 광해군으로 하여금 명나라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광해군은 만주에서 후금이 힘을 얻어나가는 가운데 명을 적극 지원하지 않고 후금(청)과 사이에서 중간자적 입장을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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