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들의 파산⑥…노벨상 수상자들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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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의 파산⑥…노벨상 수상자들의 좌절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9.0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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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직후에 LTCM 파산…이론이 순식간에 물거품돼

 

1998년 9월의 어느날. 마이런 숄스(Myron Scholes) MIT 교수는 고향인 캐나다 온테이오주 해밀턴을 찾았다. 철광산이 인접해 있어 철강 공업이 번창한 캐나다의 공장지대에서 자라난 숄스 교수는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축하연에서 감정에 북받치는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시골뜨기가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의 저명 교수로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출세한 셈인데, 경제학자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노벨 경제학상을 타질 않았던가. 그는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스웨덴에 상을 타던 감격적인 이야기를 자랑했다. 그리고 열열한 박수를 받았다.

고향을 뒤로하고 커네티컷으로 돌아온 숄스 교수는 자신의 영광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노벨상 상금을 포함, 자신의 재산을 부었고, 스스로가 파트너로 있는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가 파산 직전에 몰렸기 때문이다.

LTCM 사건이 뉴욕 월가를 시끌하게 한 한 것은 구제금융 때문만 아니다. 존 메리웨더라는 스타 펀드매니저가 실패한 것, 노벨 수상자들의 이론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사실 등이 소설과 같은 스토리를 엮어냈다.

 

천재적 두뇌의 모임

 

천재적 두뇌의 모임인 LTCM에는 두명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파트너로 개입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마이런 숄스 교수(54)와 로버트 머튼(Robert C. Merton) 교수(57)다. ‘파트너(partner)’란 투자회사에 사업 자금을 대고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이른바 동업자를 말한다.

숄스와 머튼 교수는 제자들이 운영하는 헤지펀드에서 자신의 이론을 실험하려고 했다. 그들은 투자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이를 전세계에 가르친 학자이자, 선생이었다. 그들은 ‘옵션(option)’이라는 파생금융상품의 가격설정 이론을 밝혀냈고, 세계 금융시장의 참여자들은 이들 선지자의 이론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이론은 미래의 채권시장 움직임이 과거의 경험을 반영하는 정상적인 시장 상황에서만 통했고, 금융시장에 대혼란이 왔을 때 허구로 입증됐다.

숄스 교수는 타고난 세일즈맨이었다. 1941년 캐나다의 조그마한 광산촌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온테리오주 해밀턴으로 이사를 왔다. 숄스는 맥매스터 대학이라는 이름없는 대학에서 학부를 한다음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부터 투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시카고대 시절부터 그는 주식 투기에 가담한 적이 있다고 캐나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나는 봉급을 받아 주식시장에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주식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았지요. 나는 집사람에게 이것은 대출이 아니라 투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70년대 미국 증시가 불황에 빠졌고, 숄스는 주식 투자로 손해를 보았다. 그는 은행 대출자금도 갚지 못해 은행에 통사정을 해 만기를 연장한 적도 있다. 그러나 얼마후 증시가 살아나고 숄스 청년은 은행 대출도 갚고 너끈히 이익을 챙겼다.

70년대초 숄스는 매사추세츠 공대(MIT) 경영학부에 교수직을 얻었고, 74년부터 83년까지는 시카고대, 그후에는 캘리포니아의 스탠포드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그는 어디를 가나 학생과 교수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했다.

숄스 교수는 카리스마적이었다. 어느 제자는 “그는 우리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 상대할 학생들이 없었다”며 “마치 아인슈타인이 살아있는 느낌이었다”고 술회했다.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이론은 MIT 시절에 정리됐다. 당시 MIT에는 피셔 블랙(Fischer Black)이라는 경제학계 거장이 있었는데, 그도 자신의 펀드를 설립, 이론을 검증할 실험실로 쓰고 있었다. 두 교수는 팀을 이루어 스톡 옵션에 관한 공식을 개발했다. 이 연구는 선물, 옵션, 파생금융상품 거래를 증폭시킬수 있는 선지자적 업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시에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 노벨상 경제학상 수상자들. 마이런 숄즈와 로버트 머튼. /위키피디아

 

머튼 교수는 수학을 전공한 학자였다. 그는 실제 세계의 모든 일을 수학화할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머튼은 1944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컬럼비아대의 유명 사회학 교수인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이다. 아버지 머튼은 사회학에서 유명한 ‘일탈 행동(deviant behavior) 이론’의 선구자로, 아들에게 이름을 물려주었다.

머튼은 뉴욕 컬럼비아대 학부 과정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캘리포니아 공대(CIT)에서도 수학을 계속했다. 그는 수학 이외에도 주식을 비롯, 유가증권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수학을 취소하고 전공을 경제학으로 바꿨다. 그는 복잡한 경제 현상을 수학 체계로 정리할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경제학 바탕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원 과정에서 그를 받아주는데가 없었다. 다행히 MIT에서 67년에 그를 받아주었다. 머튼의 대학원 입학은 유명한 통계학자인 해롤드 프리만(Harold Freeman) 교수의 덕택이었다. 프리만 교수는 MIT 경영대에서 박사 학위 없는 유일한 교수였는데, 머튼의 뛰어난 수리능력에 반해버렸다. 다행스럽게도 머튼은 당대의 저명 통계학자 여러명의 추천을 받으면서 MIT를 들어갔다.

MIT에서 머튼은 폴 사뮤엘슨(Paul Samuelson) 교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사뮤엘슨은 미국 최초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미국 경제학계에 수리경제학 붐을 일으킨 거장이다. 사뮤엘슨은 뉴욕타임스지와의 인터뷰에서 “머튼은 내가 가르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젊은 학생이며, 나와 함께 문제를 풀어나갔다”며 “내가 교단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은 그가 내를 능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때”라고 말했다.

박사 학위를 마친 머튼은 곧바로 MIT에서 조교수가 됐다. 그때 그는 나중에 LTCM 파트너가 된 에릭 로젠펠드(Eric Rosenfeld), 데이비드 멀린스(David Mullins), 로렌스 힐리브랜드(Lawrence Hilibrand)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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