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들의 파산⑤…월가의 인맥 총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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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의 파산⑤…월가의 인맥 총동원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9.0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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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지펀드 벼락 창업…창업 땐 호황이었지만, 서서히 아시아에서 먹구름

 

존 메리웨더는 운이 좋았다. 1994년부터 미국 증권시장은 물론 전세계 채권시장이 호황을 구가했다. 뉴욕증시 다우존스 지수는 94년초 4,000에 불과했으나 3년후 9,000으로 껑충 뛰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월가의 투자자들은 세계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리웨더는 미국보다 많은 수익을 내는 글로벌 시장을 알고 있었고, 과실이 잘 익은 처녀림이 어디 있는지를 환히 꿰고 있었다.

LTCM은 다른 헤지펀드보다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헤지펀드는 일반적으로 100만 달러를 하한선으로 회원을 모집하는데, LTCM은 최소한 1,000만 달러를 가져와야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헤지펀드들 중에서 가장 높은 회원 입회비였다. 연간 수수료는 다른 헤지펀드에서는 총 자산의 1%인데 비해 LTCM은 2%를 요구했고, 펀드 수익금도 다른 헤지펀드들은 20%인데 비해 LTCM은 25%를 달라고 했다.

예를 들면 10억 달러의 자본금으로 한해동안 4억 달러의 이익을 냈다고 가정하자. 보통의 헤지펀드는 경상비조로 자본금의 1%인 1,000만 달러를 수수료로, 이익의 20%인 8,000만 달러를 수수료로 각각 뜯어 모두 9,000만 달러를 챙긴다. 이에 비해 LTCM은 수수료로 2,000만 달러, 수익금으로 1억 달러를 합쳐 모두 1억2,000만 달러를 챙긴다. 당연히 LTCM의 회원들은 연말에 돌아오는 몫이 작아질수밖에 없다. 스타군단이 포진했다는 이유로 LTCM은 회원들에게 비싼 대가를 요구했던 것이다.

투자자금을 빼가는 것도 보다 어렵게 돼 있다. 대개의 헤지펀드는 1년에 한번씩, 주로 연말에 투자자들이 자금을 상환할수 있도록 내규를 정해놓고 있으나, LTCM은 투자후 3년동안 돈을 빼내지 못한다는 약정을 만들어놓았다.

까다로운 조건에도 불구, 스타 매니저와 학자(나중에 노벨상 수상자), 그리고 연준리 고위간부의 결합은 전세계에서 투자자들을 끌어모으게 하는 힘을 가졌다. 해외에서도 투자자들이 줄을 이었다. 독일의 드레스드너 은행이 투자했고, 이탈리아 은행은 처음에 1억 달러를 투자한후 그것도 모자라 또다시 1억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세계적인 은행가 에드문트 사파라씨가 뉴욕 지점을 통해 투자하는등 유럽의 큰손들이 몰려들었다. 처음 약속한 율리우스 베어 은행도 물론 참여했다.

미국에서는 페인웨버 그룹이 1억 달러를 넣었고, 페인웨버의 회장 도널드 매런씨는 개인 자격으로 사재 1,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뉴욕의 세인트 존 대학도 대학 운영금 1,000만 달러를 메리웨더에 맡겼다.

메리웨더는 이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다. 그는 월가의 돈줄을 잡으려면 메릴린치와 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당시 메릴린치 회장이던 대니얼 툴리(Daniel Tully)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툴리 회장은 선뜻 호응했다. 메릴린치가 나서자 월가의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몰렸다. 툴리 회장은 메릴린치의 이름으로 모금에 나서 무려 15억 달러나 되는 목돈을 모아주었다. 그리고 투자자금 모금의 댓가로 받은 1%의 공전 1,500만 달러마저도 메리웨더의 펀드에 집어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메릴린치는 나중에 LTCM과 14억 달러 상당의 자금 지원 및 스왑 계약을 체결했다.

메리웨더는 어음 결제 기관으로 월가의 투자은행 베어스턴스(Bear Sterns)와 손을 잡았다. 베어스턴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빈센트 매톤(Vincent Battone) 부사장이 살로만에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였다. 메리웨더는 이 관계를 이용했다. 베어스턴스는 메리웨더의 펀드를 통해 선물 거래, 리스크 중개, 담보부 거래등을 함으로서 연간 2,5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베어스턴스의 회장 제임스 케인씨도 매톤 부사장의 말만 믿고 개인 재산 1,300만 달러를 LTCM에 투자했다.

월가에는 수많은 투자회사들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서로 빤히 아는 좁은 동네다. 한다리 걸치면 동료요, 대학 동기다. 메리웨더는 이런 끈들을 연결, 마침내 거대한 헤지펀드를 창업했다.

 

▲ 미국 경제전문잡지 비즈니스위크가 메리웨더의 LTCM에 관한 특집기사를 드라었다. /비즈니스위크 캡쳐

 

막대한 초기 수익

 

LTCM은 1994년 2월부터 본격적인 트레이딩을 시작했다. 메리웨더는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LTCM은 거래 첫해에 19.9%의 고수익률을 올렸다. 메리웨더의 동료들도 열심히 뛰었다. 둘째해인 95년엔 수익률 42.8%, 그 다음해엔 40.8%의 높은 수익률을 달성했다. 그무렵 헤지펀드의 평균 수익률이 16~17%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메리웨더 군단은 채권시장에서 돈을 쓸어갔음을 알수 있다.

메리웨더의 펀드가 막대한 수익을 올리자, 세계적인 은행들이 줄을 섰다. 메리웨더는 배짱을 부렸다. 아무 돈이나 받아쓰다간 그와 창업 동료들의 지분이 줄어들므로 아주 까다로운 조건을 달며 투자를 받았다.

스위스 최대은행 UBS의 일화를 보자. UBS는 앞서 얘기했지만 메리웨더가 헤지펀드를 창업하기 위해 투자를 요청하러 갔을 때 퇴짜를 놓았던 은행이다. 은행이란 남의 돈으로 이문을 늘리는 돈장사 회사다. 메리웨더가 많은 이문을 남겨주는데 이보다 더 좋은 사업 거리가 없다. UBS는 자존심을 저버리고 고개를 숙여 투자를 받아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94년말 LTCM이 UBS 은행에게 신용등급을 매겨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UBS은행의 신용평가 담당자들은 LTCM의 요청을 가볍게 거절했다. 헤지펀드의 회계에 투명성이 결여돼 있고, 부채가 너무 많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UBS 은행 간부들이 나서서 헤지펀드의 신용 평가를 내려주라고 신용평가 담당 부서에 지시했다. LTCM은 좋은 신용 점수를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UBS의 대출을 얻을수 있었다. 투명성이 최고라는 스위스 은행마저 신용평가에 이해관계가 중요한 관건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LTCM이 높은 수익률을 올리자, UBS는 투자의 차원을 넘어 차제에 헤지펀드에 지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메리웨더는 95년말부터 더 이상 지분 참여를 제한한다는 방침을 정해놓고있었다. 그러나 유럽 최대은행이 지분 참여 요청을 무시할수 없었다. 숄스 교수가 꾀를 냈다.

UBS의 1억 달러 지분 참여를 허용하되, 7년 옵션 거래 조건을 걸었다. 숄스 교수의 조건은 UBS의 지분 참여를 7년동안 질질 끌고 동시에 세금 감면 혜택을 받기 위한 것이다. 파트너들이 지분을 한꺼번에 UBS에 매각할 경우 39.6%라는 고율의 개인소득세를 물어야 한다. 그렇지만 옵션이라는 파생금융상품 거래를 통해 지분을 매각할 때 20%의 장기자본 취득세를 물게 된다. 세금을 절반으로 줄일수 있는 조건이었다.

UBS는 숄스 교수의 교묘한 작전을 알지 못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조건을 받아들였다. UBS측이 LTCM의 지분 참여를 얼마나 반겼던지, 보수적인 스위스 은행은 대외 홍보 비디오에서 LTCM 지분 확보를 자랑했을 정도다. 스위스 은행의 각 부서들은 미국에서 잘나가는 헤지펀드의 지분을 확보했다고 공을 내세웠다.

 

아시아위기의 역풍

 

그러나 세월은 마냥 메리웨더의 편에 서 있질 않았다. LTCM에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1997년 태국 방콕에서 시작한 아시아 위기는 LTCM의 컴퓨터로 답을 찾을수 없는 금융시장의 왜곡을 형성했다. 95년과 96년 연간 40%의 고수익을 올렸던 메리웨더는 97년에 17.1%로 수익률이 떨어졌다. 이마저 다른 헤지펀드나 월가의 기관투자자들보다 높은 이익률이었다. 그러나 고속으로 달리던 외발자전거의 속도가 둔화됐을 때 저항감은 크게 느껴진다.

메리웨더를 믿고 돈을 빌려준 채권은행들은 LTCM의 포트폴리오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전혀 알길이 없었다. 그만큼 메리웨더는 은행에 돈을 빌리면서도 전체 포트폴리오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점조직과 같이 포트폴리오를 구성했기 때문에 투자자나 채권은행이 LTCM이 무슨일을 하는지 알길이 없었다. 이 헤지펀드에 가장 많은 투자자금을 모아준 메릴린치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비드 코만스키(David Komansky) 메릴린치 회장은 나중에 “사업을 같이 했지만, 포트폴리오의 일부분도 알수 없었다”며 “그들은 전문성과 월가의 평가, 두뇌로 이뤄진 집단으로 어떤 투자에도 실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고 실토했다.

1998년 상반기, 한국,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등 아시아 국가들은 질곡에서 헤멨다.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는 LTCM도 처음으로 적자를 냈다. 그해 상반기 메리웨더는 10.1%의 영업적자가 났음을 인정했다.

투자자들과 채권 은행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메리웨더와 그의 부하들은 일시적인 시장 교란에 의한 수익률 둔화일뿐 장기적으로는 높은 수익을 얻을수 있다고 장담했다.

1998년 8월. 러시아가 마침내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LTCM의 뿌리를 흔들어버린 그날 메리웨더는 중국에 있었고, 로젠펠드는 여행중이었다. 다른 파트너들은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의 국가 파산의 여파로 자신의 펀드가 붕괴될줄 전혀 예상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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