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삼척출항의 재조명⑥…우산국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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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삼척출항의 재조명⑥…우산국 상황
  • 이효웅 해양전문가
  • 승인 2017.08.2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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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 정벌은 동해의 제해권 확보로 왜구 침략 근절시켰다는데 의의

 

[이효웅 이사부기념사업회 기획이사(해양모험가)]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하여서 함대 규모를 어느 정도로 할까? 에 대한 해답은 우산국에 대한 정보일 것이다.

첫째, 우산국에 대한 정보는 당시 가야는 왜와 교류를 하였고, 대마도는 우산국과 교류 하였다. 그러므로 우산국에 대한 소문이나 기초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둘째, 실직군주로 있는 동안 첩보선 3대 정도를 띄워 우산국을 정탐(偵探)하였을 것이다.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길 수 있다는 가장 기초적인 병법이다.

필자는 둘째 방법인 첩보선을 띄웠다고 본다.『삼국사기』권 제44 이사부조에 나와 있듯이‘그 나라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워서 위세로 항복 받기는 어렵지만 계략으로 복속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그러므로 이것은 직접 가보거나 믿을 만한 부하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본다. 울릉도를 배에서 내리지 않고도 울릉도의 정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울릉도는 사방이 경사가 심한 산이라 대부분 해안 가까이에 거주하므로 아침·저녁으로 선박으로 한 바퀴 돌면서 밥 짓는 연기를 세어 보면 주민들의 위치와 수를 짐작할 수 있다.

울릉도는 화산섬의 산악지역으로 농토가 부족하여 근본적으로 주민들이 많이 살 수 없는 지형이나, 기후가 좋고 화산섬이라 밭작물과 나무는 잘 자란다. 특히 겨울철에는 눈이 많이 오고 풍랑이 심하여 이동하기조차 어렵다. 지금은 온난화 현상으로 많이 따뜻해졌으나 과거의 겨울나기는 동물들의 겨울나기와 같았을 거라 본다. 그러므로 당시의 우산국은 많은 집단의 주민이라기보다는 남양, 현포, 천부를 중심으로 적을 대비하여 서너 곳에 모여서 살았을 것이다.

 

이희돈의 「언제부터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을까? 울릉도의 고분군」을 보면

 

울릉도의 고분군은 현포리를 중심으로 하는 대집단과 남서리·천부리의 중집단, 그리고 나머지 소 집단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또한 각각의 소집단들은 중집단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으며, 전체 적으로 현포리 대집단을 중심으로 위계화된 상태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이 비록 정교하 고 치밀한 고분 조사나 부장 유물과 같은 정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고분의 수나 규모만을 가지고 내 린 추론이라고는 해도 당시 울릉도 사회가 내부적으로 상당히 위계화된 사회였음을 추론케 한다.

 

우산국의 주민은 많지 않아도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주민들은 자연적으로 사납고 무서워 질 수밖에 없고, 해적이나 왜구의 집단이 이주해왔을 수도 있으므로 많은 함선이나 군사 보다는 계략을 구사하는 방법이 피해를 줄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 삼척시 오분리의 오화리 성터 /이효웅 제공

 

정보수집에 따른 전략

 

*우산국은 실직의 높은 곳에서 보인다.(삼척 원덕 일원 200m-300m 이상에서 가능)

*우산국은 실직의 동쪽에 위치하며 정방향에 있다.(92도 정동 방향)

*우산국과의 거리는 배로 이틀거리에 있다.(삼척-성인봉 148km, 성인봉 높이 984m)

*우산국의 해로 가운데는 안개가 자주 끼고 기상이 변한다.(필자도 보트 탐사 시 두 차례 경험)

*우산국의 둘레는 백리정도로 하루가 걸린다.(해안선 길이 56.5km/6km=약10시간)

*우산국은 가운데 산을 중심으로 산이 높고 나무가 많으나 농토는 보이지 않는다.

*우산국에는 항구와 강이 없으나 산이 높아 바람이 불어도 반대쪽은 조용하여 피항 할 수 있다.

*우산국의 큰 마을은 남쪽과 북쪽에 있으며 400-500명(최대)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고, 실제 전투력은 어린이 부녀자를 제외하면 250-300명 정도일 것이다.

*우산국 주민은 사납고 무서워 가까이 갈 수 없다.

*우산국을 왕복하는 데는 보름 이상 걸린다.(참고로 필자가 2002년 코스모스호로 울릉 도·독도탐사 시 기상을 살피느라 9일이 소요됨)

 

우산국의 특성상 사나운 주민들을 복속시키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나 이사부 장군이 선택한 목우사자(木偊師子)는 기상천외한 방법이었다. 목우사자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여기에서 논외하고 이 방법은 당시 부관 및 목공 등 관계자들을 매우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다행히 이 중요한 비밀병기를 만드는 곳은 실직에 외딴섬이어서 보안관리가 쉬웠고, 목우사자로 인한 기만작전으로 병력과 전선의 수를 줄일 수 있었다. 

 

맺음말

 

1500년 전 울릉도로 간다는 것은 명령과 유망(流亡), 표류(漂流)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우산국 정벌은 이사부가 지혜 많은 젊은이고 신라의 숙원사업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사부 함대는 실직의 오십천 하류 정라진 외딴섬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동해안 전체를 보아도 이만한 조건을 갖춘 자연항은 없다.

정라진 건너불은 우산국과 거리가 가깝고 정동방향이며 당시 송림으로 싸여있어 파도와 외부의 적으로부터 안전하고 보안이 쉽다. 또한 선박재료를 쉽게 구하고 옮길 수 있으며 인근에 배후도시인 실직성과 실직 제일의 갑자평야가 있다.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사부 장군은 북진정책을 잠시 멈추고 왜구의 피해를 막고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산국정벌을 먼저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지증왕의 명령인지 이사부장군의 전략인지는 모르지만, 우산국을 복속시켜 공물을 바치게 하였고, 신라의 숙원인 왜구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으며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신라가 북진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삼국시대의 선박 발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데, 이사부 전선은 어떻게 생겼으며 전선에는 돛을 달았을까? 이사부장군도 이 문제로 선박 기술자들과 많은 토론을 하였으리라 본다. 당시의 신라 전선에는 돛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보지만, 이사부 전선은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하여 신라 전선 최초로 돛을 달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목우사자를 계획할 이사부 장군이라면 당연히 비밀병기인 전선 제작에 다른 나라의 최신정보를 수집하였을 것으로 본다. 우산국을 정벌하는데 6-7년이라는 많은 기간이 걸렸는데, 여기에는 전선을 만들기 위하여 선형, 크기, 범(돛), 척수, 도구, 방법 등의 문제점으로 시행착오도 여러 번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벌은 그동안 왜구와 왜병들이 신라에 많은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우산국 복속으로 공물을 얻는 것 보다 동해의 제해권 확보로 신라의 숙원인 왜구들의 침략을 근절 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남해의 이순신 장군은 23전 23승의 불패 신화와 거북선의 신화가 있다면, 동해의 이사부장군은 한 번의 승전으로 200년간 신라를 평온케 한 목우사자의 신화를 창조하였다. 이사부 장군의 현명한 판단과 지략이 오늘날 울릉도의 부속 도서인 독도와 함께 12해리의 영토와 200해리의 경제수역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이 영토를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

아울러, 광진산 일대를 발굴하여 광진산 봉수대를 복원하고 이곳에 이사부 테마공원을 조성하기를 제안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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