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의 개조 역설한 루쉰의 『아Q정전』 『광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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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개조 역설한 루쉰의 『아Q정전』 『광인일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8.20 17:0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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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기의 우매하고 무지한 중국 민중의 현실을 그려

 

마오쩌둥(毛澤東)은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루쉰(魯迅)에 대해 “그는 위대한 문학인일 뿐 아니라 또한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고 평가했다.

▲ 루쉰 / 위키피디아

루쉰은 중국을 대표하는 문학인일지는 모르지만, 사상가와 혁명가로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 중국에선 마오쩌둥의 평가를 뒤집지는 않고 있다. 위대한 사상가이지 혁명가로서의 루쉰은 여전히 중국인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의 대표적으로 곱히는 소설 『아Q정전』(阿Q正傳)은 1911년 쑨원(孫文)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실패한 역사적 교훈을 중국 하층민의 우매하고 무지한 상태에서 찾으려는 노력에서 나왔다는 해석이다. '아Q'라는 무지렁이 백성을 통해 중국 국민의 열악한 근성을 노출시켰다. 중국인들에게 배어 있는 노예근성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혁명이 성공할수 없다는 그의 생각을 담았다.

 

『아Q정전』의 줄거리

 

소설은 '아Q'란 이름에 대한 내력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황당한 한 인간의 인생 이야기를 쓰자니, 이름을 드러내야겠는데 분명한 이름이 확인되지 않아서 영어식 철자법으로 '아(阿) Quel'라 쓰고 약해서 '아Q'로 했다는 것이다.

아Q는 집이 없어 토지신을 모시는 토곡사라는 사당에 살면서 날품팔이로 연명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해 그의 안중에 웬만한 주민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이 돈이 좀 생겨서 도박을 하다 모두 털리고, 동네 깡패들에게 두드려 맞으면서도 자기가 남을 때린 기분으로 의기양양하게 누워 잠이 들었다.

무식쟁이 아Q는 마침 여승이 지나가기에 집적거리다가 욕설을 들어먹는다. 그래도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가 짜오 가의 한 여종에게 수작을 걸다가 경을 치렀다.

그는 읍내로 들어가 도둑질을 해서 돈을 구해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가 도둑질을 해서 장물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어느날 신해혁명의 풍문이 들려 왔다. 그는 마치 혁명 당원이 된 것처럼 기분이 들떠 거리를 돌아다니며 "혁명이다. 혁명이다!"라고 외친다. 주민들은 오히려 아큐의 비위를 맞추는 이도 있었다. 그는 부자의 물건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혁명은 매우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짜오 댁이 약탈당했다. 그는 혁명 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약탈한 물건을 분배하지 못한 것이 대단히 마음에 걸렸다. 토곡사 안에서 이런 불평을 하고 있는데, 그는 밤중에 갑자기 체포되었다. 그래서 문초를 받고 남의 일에 엄벙대다가 결국은 도둑으로 몰려서 총살형을 당한다.

 

]『아Q정전』은 1910년대 중국 농촌의 풍경을 그렸다. 한 날품팔이를 모델로 삼아 중국의 국민성 문제를 거론한 작품이라는 평가다. 루쉰은 일본유학시절에 "이상적인 인간성은 무엇인가?", "중국 국민성의 병폐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주목했고, 그는 중국인들의 우매함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 우매함의 대표적 인물이 아Q이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솔이 대표작 『아Q정전』이다.

루쉰에게 아Q와 같은 존재는 혁명에 불필요하고 교화되거나 사라져야 할 국민상이었다. 그래서 1930년대 중국의 한 마르크스주의자는 '죽어버린 아Q시대'라고 말했고, 그 후 사회주의 중국에서 아Q는 개조대상의 인물이었다.

 

루쉰의 또다른 대표적 광인일기(狂人日記)』는 1918년 나온 소설로, 중국내에서 백화문으로 쓴 첫 작품이었다. 『광인일기』로 루쉰의 명성은 중국을 깜짝 놀라게 했고, 그는 중국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광인일기는 ‘미치광이’의 일기를 통해 중국 역사 5천년 동안 이어져 온 ‘식인(食人)’의 역사를 폭로했다. 사람을 잡아 먹는 반문명에 대한 반성이었고, 식인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미치광이는 루쉰 자신이었다.

루쉰은 식인에 관한 내용을 『약』(藥)이라는 단편소설에서도 다뤘다. 사람의 피가 폐병환자에 즉효하다는 미신에 따라 사형수의 피를 넣은 만두를 병든 아들에게 먹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온다. 20세기초 혁명전야의 우매한 중국인들의 미신을 소설속에 숨기지 않고 다뤘다.

 

 

루쉰(1881년 ~ 1936년)은?

 

루쉰은 1881년 중국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저우 장서우(周樟壽)였고, 루쉰(魯迅)은 필명이다. 비교적 유복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족의 잇달은 불행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1898년 난징의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에 입학했고, 이후 광무철로학당(礦務鐵路學堂)에서 공부하며 계몽적 신학문을 접했다.

졸업 후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학교(仙臺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해 의사가 되려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강의중에 상영하는 영상에서 중국인이 처형되는 장면을 보고 격분하여 학교를 자퇴했다. 그는 의학공부를 단념하고, 중국국민성 개조를 위한 문학을 지향했다.

1909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그만두고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중화민국 신정부의 교육부원이 되어 일하면서 틈틈이 고서) 연구 등에 심취했다.

1918년 문학혁명을 계기로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루쉰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그후 이어 『콩이지』(孔乙己) 등 단편을 발표했고, 1921년에 대표적인 『아Q정전』(阿Q正傳)을 발표했다.

1920년 이후에는 베이징(北京)대학, 베이징여자사범대학 등의 교단에 섰다.

그후 소비에트 문학작품을 번역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흡수, 소개하기도 했다. 1930년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해 활약하고,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민족주의 문학, 예술지상주의 및 소품문파(小品文派)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다. 한때 좌익작가연맹으로 인해 국민당 정부에 수배되어 도피생활을 하였다.

1936년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그해 10월에 사망했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주장에 따라 문학계의 통일전선(統一戰線)이 형성되었다.

 

루쉰이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1957년에 누군가가 마오저뚱에게 “만약 루쉰이 살아있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마오저뚱은 잠시 생각하더니 “나의 생각으로는 (루쉰은) 감옥에 갇혀 글을 쓰고 있거나, 아니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아무 소리도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 같소.”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마오쩌둥 말기에 전개된 문화혁명 기조에서 보면, 루쉰의 문학은 무기력하고 사변적인 중국 인텔리겐차의 작품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 /사진 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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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REY1748 2021-01-25 16:42:06
https://vfddrive.ru/moschnost-potrebljaemaja-chastotnika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