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그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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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그 길을 걷다
  • 김송현 기자
  • 승인 2017.08.1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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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켜켜이 쌓여있는 길…망국의 아픔을 절절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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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6대 임금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원구단(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황제로 등극했다. 또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대한제국은 조선이 일제에 의해 국권을 잃은 1910년 8월 29일까지 존속했다.

올해로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는다. 정부와 서울시는 이를 맞아 각종 행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면 서울시내에서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유적지를 찾아 나서보자.

 

서울시는 지난해 대한제국의 길을 제정했다.

대한제국의 역사성을 기념하기 위해 길을 정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참 뜻깊은 것이다. 사실 이 길의 대부분은 정동 영역에 포함된다. 이번에는 정동에 소재하고 대한제국의 길에 속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곳도 많다. 고색창연한 정동에서 대한제국의 역사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이 길을 연인과 가족과 함께 걸어보시기를 권한다.

 

▲ 서울시가 정한 대한제국의 길 /서울시 홈페이지

 

■ ‘대한제국의 길’ 5개 코스
▲ 1코스 배움과 나눔(성공회성당 – 세실극장 – 영국대사관 등)
▲ 2코스 옛 덕수궁역(구세군 중앙회관 – 선원전 터 – 구 러시아공사관)
▲ 3코스 외교타운(미국대사관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 정동교회 – 중명전 등)
▲ 4코스 신문화와 계몽(광무전망대 – 배재학당 – 서울시립미술관 등)
▲ 5코스 대한제국의 중심(환구단 – 서울광장 – 시민광장 등)

 

서울 중구 정동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무엇일까?

미국공사관이다. 1882년 조미수호조규를 체결하고 그 이듬해에 초기 전권공사 프트에 의하여 2200달러에 민계호의 집을 매입하여 미국공사관으로 삼았다. 선교사들이 들어와 그 옆에서 살기 시작했다.

 

▲ 대한제국 주한 미국 공사관 /한선생 제공

 

아관파천 후에는 미 공사관 주위로 경운궁 영역을 넓게 하였으니, 경운궁이 먼저 조성된 것이 아니라 미 공사관이 생기고 이 부지 주위로 경운궁이 확장된 것이다. 이 공사관을 현재는 미 대사관저로 쓰고 있다. 마치 거인들만 사는 곳의 성채처럼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 쌓여있어 내력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곳이 무엇하는 곳인지 궁금하게 생각 할 뿐이다. 1974년에 하비브 미 대사가 새롭게 건물을 지었으니 지금도 하비브 하우스라고 명명하는 까닭이다. 세계 각국의 대사관저 중에서 그 나라의 전통양식으로 지은 첫 사례에 속한다. 이곳에서 아이젠하우워, 카터 대통령이 묵기도 하였다

 

정동일대의 모든 공사관들이 이양풍의 건물을 지었는데 왜 유독 미 공사관은 한옥을 고집하였을까? 아니 왜 자금을 투자하여 이양풍의 큰 건물을 짓지 않고 매입한 한옥을 그대로 사용하였을까? 아마도 미국이 우리나라와 수호 조약은 맺기는 하였지만 생각에 비해 크게 바랄 것이 없어 큰 기대는 하지 않은 증거가 아닐까? 미국과 수교후에 고종은 춤을 추듯이 기뻐했다. 오죽하면 조약을 맺어준 것에 감사하는 의미로 민영익을 단장으로 미국으로 보빙사(報聘使)까지 파견하였을까? 이토록 미국에 대한 의지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동일하였다.

 

그러나 정작 미국은 우리 모르게 일본과 은밀한 거래를 하고 있었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하여 일본이 우리를 보호국화 하는 것과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것에 서로 관여하지 않도록 한 것이니, 을사늑약이 일어난 1905년 7월 29일에 있었던 일이다.

이 조약은 1924년에야 알려지게 되어 밀약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도 모른 채 고종은 헐버트를 파견하여 미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우리의 입장이 담긴 친서를 보냈지만 들어줄리 만무하였다.

루즈벨트는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스스로 다스릴)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 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들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있게 통치한다면 만인을 위해 보다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피력하였다.

 

▲ 창덕궁 선원전 /한선성 제공

 

미 대사관저 옆에는 큰 공지가 있다. 덕수궁에 포함돼있던 선원전(璿源殿)터 4,500평이다. 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곳인데 새문안길 쪽에서 들어오면 영성문을 지나 크고 작은 전각들이 10개나 있었던 곳이다.

일제는 고종의 승하후에 이곳에 있던 어진을 창덕궁 신선원전(新璿源殿)으로 보내고 전각은 뜯어 없앴다.

 

큰길을 내어 왕궁을 훼손하고 역사 지우기를 시도했다. 그 터에 들어온 것이 해인사포교원, 그 자리를 1948년 미국이 한미행정협정에 의하여 차지하고, 미국 부대사관저(副大使館邸)로 삼았다. 남아있는 자리에는 일인자녀들을 위한 경성제일고등공립여학교가 있었다. 이 자리에 해방 후에는 경기여고가 들어선 것이다. 경기여고가 1988년 강남 개포동이전 후 빈터인 이곳에 15층의 미대사관과 8층의 대사관직원 아파트를 건립하려고 하였다. 송현동의 미대사관직원 숙소터, 미문화원 부지에 29억원을 더해 맞바꾸자고 한 것이다.

이곳이 경운궁 선원전터가 된다는 것을 아는 많은 문화재민간 단체와 시민들의 반대하여 계획을 무산시켰다. 미 대사관은 용산 기지에 신축예정이라고 한다. 시민의 힘으로 미국의 계획을 무산시킨 엄청난 사례다. 이곳에 2015년부터 25년에 거쳐 선원전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때 영성문을 통과후 미 공사관저 옆길로 지나갔다. 일명 고종의 길이다. 또한 영친왕의 생모 엄황귀비의 국장행렬이 이 길로 나갈 때 고종과 영친왕이 이곳에서 통곡하였다고 하니 그냥 의미없이 지나치기 힘든 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이 길을 오늘 걸으며 망국의 아픔을 가슴 절절히 느끼며 지나갔을 고종을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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