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우리’라는 이름의 온도를 일깨워준 ‘우리들의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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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우리’라는 이름의 온도를 일깨워준 ‘우리들의 블루스’
  • 권상희 문화평론가
  • 승인 2022.06.1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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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권상희 문화평론가] 죽음, 영원한 이별...

드라마가 끝났건만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여전히 채 가시지 않은 여운을 느낀다. 분명 예상했던 결말이었는데 이토록 가슴이 아려올 줄 몰랐다. 

어멍, 결코 평범한 모자지간일 수 없는 질곡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증오의 이름이 ‘엄마’로 불리는 순간,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단 한마디 말이라도 해주길 원하는 동석(이병헌 분)과 끝내 표현하지 않는 옥동(김혜자 분). 그녀가 삶의 끝자락에서 끓여놓은 된장찌개는 단지 몇 마디 말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었던 깊이의 사랑과 미안함을 담고 있었다. 인생의 마지막 뒤안길에서 아들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들을 대신한 엄마표 된장찌개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맛이었으리라. 

상처뿐인 인생 모두가 주인공

‘우리들의 블루스’ 마지막 에피소드는 눈물샘 마를 틈 없었던 새드 엔딩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해피엔딩이었다. 외면했던 서로의 시간과 관계가 회복됐으니 그거면 된 거다. 옥동의 건강이 좋아져서 꽃 피는 봄에 아들과 같이 백록담에 오르는 장면을 기대하는 건 현실을 빗겨간 욕심이기에 너무도 드라마적일 듯하다. 

‘우블’을 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적이길 바라지 않았다. “그 후로 그들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애초에 동화에서나 가능한 문법 아닌가. 순도 높은 현실감 때문에 웃고 울며 ‘우블앓이’가 가능했던 것 같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꽃길만 걷는 인생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보처럼 꽃길만 걷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우리네 삶 아니던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희망어구 하나쯤 있는 것만으로도 때론 힘든 오늘을 버틸 수 있게 해준다. 

각자의 삶에서 어느 누구도 주인공 아닌 이는 없다. 단지 그걸 깨닫지 못해서 오매불망 그것이 되길 바랄 뿐. 아마도 스토리를 이끌고 가는 원톱, 내지는 투톱 드라마 주인공들에 익숙해져서, 또 현실의 대부분을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만들어버리는 승자독식 구조에 함몰 되다보니 내 삶의 주인공이 나란 사실을 부인하는지도 모른다. ‘우블’은 상처뿐인 인생에 위로와 희망, 살아갈 힘을 주는 이 역시 또 다른 상처받은 인생들임을 보여준다. 그렇게들 살아간다. 들러리란 없다. 

우리들의 블루스. 사진제공=tvN

각자도생 시대에 만난 ‘우리’라는 낯설지만 익숙한 이름

제주도 ‘푸릉마을’ 사람들은 거칠고 투박하기 짝이 없다. 남의 삶에 왜 그렇게 관심들이 많은지 참견하고 끼어들기 일쑤다. 그런데 그 세련되지 못한 모습이 정겹고 그립기까지 하다. ‘우리’라는 이름이 습관처럼 쓰이던 시절, 옆집을 드나들던 일이 별일이 아니었던, 가까운 동네 사람들 이름을 죄다 알고 지냈던 그 때, 그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다. 의심도, 경계도 없는 마을의 모습은 현실의 ‘우리’와는 참 많이도 다르다. 

그들의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그리고 추억을 공유하며 현재를 살아간다. 여행자에겐 제주의 바다가 그저 낭만적인 곳일지 모르지만 그들에겐 거친 삶의 터전이고, 가족을 잃은 슬픔 저장소이며 한숨을 토해내는 해우소이기도 하다. 생활이 된 바다는 더 이상 에메랄드 빛 환상을 주지 않는다. 

이렇듯 척박한 환경에서 나고 자라고 살아가는 이들은 친구로, 연인으로, 선후배로, 이웃으로 관계 맺으며 함께 웃고, 아파하고 기꺼이 울어준다. 멀찍이 떨어져 관망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 타인의 삶에 핏대 세워가며 충고하고 훈수 두며 싸우고 안아준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동석이 죽어가는 옥동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영옥(한지민 분)이 발달 장애를 가진 언니 영희(정은혜 분)를 자신의 짐이 아닌 진정 가족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터다. 그 밖에도 은희(이정은 분)와 미란(엄정화 분) 등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관계를 회복하는 데는 이렇듯 촌스럽고도 적극적이며 따뜻한 그들만의 정이 존재한다. 모두가 밉지 않은 오지라퍼들이다.

‘나 혼자 산다’의 각자도생 시대에 ‘우리’라는 단어는 그저 나와 타인을 포함하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관계에 지나지 않는 의미로 존재한다. 참견도, 관심도, 오지랖도 절대 금물이다. 외로움도 혼자만의 몫이다. 하지만 푸릉마을 사람들의 ‘우리’는 서로를 보듬어주고, 지탱해준다. 그리고 그 끈끈함으로 연대한다. 

한때 익숙했던 ‘우리’가 낯설어진 지금, 식어버린 온도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드라마가 잊히기 전까지 그 온도가 꽤 그리울 것만 같다.

 

●권상희는 영화와 트렌드, 미디어 등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글을 통해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며 세상과 소통하길 바라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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