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120주년…정동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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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120주년…정동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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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8.14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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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감시망 피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하던 비극의 현장들…

 

서울 사람들이 가장 걷고 싶은 길이 어디일까?

서울 중구 정동((貞洞)이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서양 사람들이 많이 정착한곳, 근대의 문화와 정치가 접목된 곳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예전에는 어땠을까? 근대의 정동은 한양에서 가장 활기가 있는 곳이었다. 100여년전의 정동의 거리 풍경은 지금만큼이나 재미있는 곳이었다.

 

▲ 덕수궁 돌담길 /한선생 제공

 

올해로 대한제국이 수립된지 120주년을 맞는다. 120년전 대한제국을 회상할 수 있는 서울의 거리는 정동이다. 그러면 정동의 과거로 떠나보자!

먼저 덕수궁 돌담길이다.

정동하면 떠오르는 덕수궁돌담길, 돌담길을 걷는 연인들은 헤어진다는 속설은 맞은편에 있었던 경성가정법원(현재 서울시청 별관) 때문에 생긴 말이다. 돌담길을 걸어 가정법원에 들어가 이혼하고 정동 삼거리에서 왼편 오른편 각자의 길로 간 것이 그렇게 비춰진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예배당인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왼쪽, 배재학당과 오른쪽 이화학당이 나뉘었다. 정동교회에서 댕그렁 댕그렁 종소리가 울리고 고딕풍의 창문사이로 풍금에 맞추어 남녀 학생들이 이양풍의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이것을 신기하게 어린아이들이 문틈으로 보고 있고 함께 보는 아주머니들이 부러우면서도 교회에서 연애질 한다고 수군거린다. 그래서 예배당을 연애당이라 했다.

 

▲ 정동교회 /한선생 제공

 

갓 인쇄된 잉크냄새 폴폴 나는 신문을 떠꺼머리 총각들이 들고 급히 배달을 가기 위해 나선다.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사이에 최초의 한글신문, 독립신문사가 있었다.

바로 맞은편 지금의 시립 미술관 자리 조그만 한옥에서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영어소리가 크게 들리고 이것을 따라하는 서툰 영어 발음이 수차례반복 된다. 조선의 명문가 자녀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육영공원(育英公院)이다. 이곳에서 공부했던 대표적인 학생이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이요, 영어를 가르친 선생이 大韓帝國期 조선을 위해 그토록 노력하셨던 헐버트 박사이니.. 이것을 알았더라면 헐버트는 이완용에게 영어를 가르쳤을까?

 

▲ 육영공원 /한선생 제공

 

건너편은 많은 공사관(公使館)이 밀집되어 있었다. 미국공사관,캐나다,러시아,프랑스공사관등 11개의 공사관이 있었다는데 믿어지는가? 가장 먼저 생긴 것이 미국공사관이다. 지금의 미국대사관저로 쓰이는 곳이다. 고종은 미국과 국교 체결후에 춤을 추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미국공사관이 들어온 후 이곳에 부쩍 코쟁이들이 많아졌다. 이 앞을 수많은 大韓帝國期의 대신들이 마차를 타고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는 것이다.

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있었기 때문에 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 러시아공사관 /한선생 제공

 

이화학당을 막 지나가는데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난다. 손탁호텔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다. 이화학당의 출입구쪽에는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처남의 처형 손탁여사가 운영하는 손탁호텔이 있었다.

 

▲ 손탁호텔 /한선생 제공

 

그 호텔 맞은편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성경 찬송가를 들고 나온다. 지금의 예원학교 운동장 즈음에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저에서 나오는 길이다. 양화진에서 조랑말을 타고 들어온 언더우드(최초의 장로교선교사), 아펜젤러(최초의 감리교선교사), 스크랜튼여사(이화학당설립자)등의 코쟁이 선교사들이 선교와 서양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와 있었다. 선교사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정동교회에서 들리는 찬송가 소리, 정동 길모퉁이의 시병원에서 진료받고 있는 환자들의 신음소리등과 어우러져서 이국적인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이곳이 조선이 맞는가? 정동길이 맞는가?

 

다시 50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곳에 커다란 왕릉이 있었다.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이성계의 계비로 남편의 지극히 사랑을 독차지하였던 강씨는 이곳의 우물(우물井, 그래서 정동井洞이라 부르기도 한다)에서 이성계에게 물을 바친다. 더운 여름날 사냥하고 돌아오다가 목이 탄 이성계에게 천천히 드시라고 물에 버들잎을 띄워 바치는 속 깊은 강씨에게 반해 그것이 인연이 되어 조선의 초대 왕비가 되었다. 왕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으나 왕자의 난으로 방석을 이방원에게 잃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유언으로 하는 말이 연에 자기 이름을 단 꼬리표를 붙이고 하늘로 띄워 그것이 떨어진 곳에 자기의 무덤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연이 떨어진 곳이 처음 이성계에게 물을 건넨 우물이라니 참 묘한 인연이 서린 곳이다.

그런데 웬걸, 4대문 안에는 묘를 쓸 수 없는 것이 나라의 법이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아주 커다란 능역을 조성한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다. 그 능을 정릉이라 했다.

 

▲ 청계천 광통교 /한선생 제공

 

이성계는 그 당시 한양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광화문에 올라 능을 바라보고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였다. 능의 원찰인 홍천사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바라보는 이방원의 마음이 편하였겠는가? 마침내 부왕이 돌아가셨다. 이방원은 신덕왕후의 능을 파헤쳐 지금의 국민대학교 맞은편 정릉으로 천장(遷葬)시키고 그 거대한 능의 부속물인 난간석, 병풍석을 가지고 청계천에 다리를 만들어 백성들이 밟고 다니게 하였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병풍석을 거꾸로 뒤집어 다리를 만들었다. 지금의 청계천 광통교(廣通橋)이다.

 

▲ 거꾸로 뒤집힌 정릉의 신장석 /한선생 제공

 

다리 아래에 가면 거꾸로 뒤집힌 문양의 돌들을 볼 수 있다.

역사는 흘러도 사랑은 남고 사랑이 남은 곳이 미움이 되어 역사가 되었다. 지금도 청계천의 무심한 물길 옆에 거꾸로 박힌 돌이 600년의 사랑과 미움을 증명하고 있다.

그 정릉(貞陵)에 정자가 남아 아직도 정동(貞洞)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글은 문화해설사 한선생의 글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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