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사진일까? 낙산사 불탄 자리에 새싹이…
상태바
이게 무슨 사진일까? 낙산사 불탄 자리에 새싹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8.12 16: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복원한 동종은 세워졌지만, 조상들이 만든 보물은 영원히 사라져

 

오래 전에 찍은 사진을 들여다 보다가, “이게 무슨 사진이지”, “이걸 왜 찍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 나왔다. 봄이 갓 온 듯한데, 풀잎이 돋아나는 사진이다. 어느 야산에 풀잎이 돋아나는 것을 찍은 것이다.

디지털 사진이라, 찍은 시기를 살펴보니 2005년 5월 8일이었다. 이리저리 그때 찍은 사진을 비교해 보니,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 길가의 어느 모퉁이다. 5월에 뒤늦게 새싹이 돋아 나는게 신기한 게 아니라, 모든 게 불 탄 자리에도 새싹이 돋아 난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이다.

그해 4월 5일 식목일에 낙산사에는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산불은 낙산사를 전소시켰다. 얼마나 화마가 거셌던지, 보물 479호였던 낙산사 동종마저 녹여버렸다. 화마가 난지 한달후, 필자는 고향을 다녀오는 길에 낙산사를 들렸던 것이다. 화마가 모든 것을 태워비린후 그 곳에 새싹이 돋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 사진으로 찍어둔 것이었다.

 

▲ 2005년 낙산사 화재 이후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 /사진=김인영

 

그때 찍은 사진들을 돌아보며, 사찰 전소라는 초유의 참화를 겪은 지 한달 후, 낙산사를 둘러본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낙산사 입구 홍예문(虹霓門)에는 ‘무료입장’이라는 안내판에 붙어 있었다. 경내에 들어서니 어지럽게 널려있던 타버린 건물과 집기 잔해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언뜻 보아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모습이었다.

경내 곳곳에 걸려있는 “낙산사 화재에 아픔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는 현수막이 봉사자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산불로 단체여행 일정이 대거 취소됐고, 방문객도 절반 이하로 줄어 들었지만, 낙산사를 찾는 발길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낙산사는 힘들 때 찾아준 방문객들에게 고마움을 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낙산사 화재를 참회하며 기도드리는 스님 /사진=김인영

 

한국전쟁의 포화도 이겨냈다는, 건재한 사천왕문을 지나 낙산사 중심부로 들어서자 인근 군부대가 세워준 군용막사 3동이 반겼다.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버린 원통보전 주변에서는 유일하게 몸을 쉴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낙산사 신도회원들이 관광객들에게 차를 대접하고, 기와불사를 접수받았다.

진품 논란이 있었던 동종이 녹아내렸던 그 자리에는 누군가가 1968년 보물지정 당시 세워진 표지석을 올려놓아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비닐테이프를 둘러쳐 접근을 차단해 잔해가 아직 그대로 있는 원통보전 터에는 인등용 등잔이 나뒹굴고 있었고, 그 앞에 있는 7층 석탑만 외로이 남아 옛 낙산사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했다.

사찰을 에워싼 검게 그을린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얀 해수관음상은 안쓰럽기만 했다. 텔레비전 보면서 답답한 마음이 들어 춘천에서 달려왔다는 양재수 씨는 “늘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하고 흐뭇했는데, 이 같은 참화를 당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안타까워 했다.

한 선생님은 동종이 걸렸던 기단 위에 올라서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향해 소리쳤다. 낙산사는 어느새 ‘산불 체험학습장’이 되어 있었다.

사찰이 안정을 찾으면서 복구를 위한 공사이 진행되고 있었다. 의상교육관 2층에서는 불단조성 공사가, 홍련암 법당 옆에서는 요사채 공사 등이 진행되고 있었다. 불단이 완공되면 의상교육관 지하에 있는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362호)은 2층으로 올라온다고 했다.

화재로 낙산사가 불타고 난 다음날(4월 6일)부터 참회기도가 시작됐다. 스님과 신자들은 홍련암에서 24시간 참회기도를 하면서 목탁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산불이라는, 인간이 제어하지 못하는 천재지변에 의한 참화였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 모두의 공업(共業)으로 말미암은 결과라는 자성이 참회의 기도였다. 참회기도는 5명의 스님이 2시간씩 교대로 해서 24시간 쉬지 않고 이어가갔다. 동참자가 한 명이든 두 명이든 기도는 계속됐다.

해조음(海潮音)을 배경으로 울려 퍼지는 정근 소리에 금방이라도 무명이 걷히고 깨침의 문이 열릴 것만 같다. 업장을 녹여 이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참회기도야말로 진정한 낙산사 복원의 시발점이었다.

몇 년후 필자는 낙산사를 다시 찾았다. 화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이 새로 지어졌다. 동종은 2년후 복원되었지만, 보물의 지위는 상실했다. 복원된 문화제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될수 없다.

불탄 대지 위에 새싹은 다시 나지만, 선조가 만든 보물은 아무리 완벽하게 복원해도 보물이 될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와 닿는다.

문화재청 기록에 보물 479호는 공란으로 비어 있다. 우리는 그 보물을 잃어버린 것이다.

 

▲ 회재후 낙산사를 찾는 사람들1/사진 김인영
▲ 화제후 복원중인 낙산사 경내 /사진 김인영

 

<낙산사 개요>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강현면(降峴面) 전진리(前津里) 낙산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 3 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해변에 있는 특이한 구조를 갖춘 사찰로서, 한국 3대 관음기도도량 중의 하나다.

낙산은 산스크리트 보타락가(補陀洛伽)의 준말로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다. 671년 의상(義湘)이 창건했다. 의상 대사가 바닷가 바위절벽 위에서 여러날 기도하다가 용으로부터 여의주를 를 받고 관음보살로부터 수정염주를 받은 후 이를 안치한 후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훗날 의상(義湘)대사가 수도한 절벽위에 정자를 세워 의상대(義湘臺)라 불렀고, 관음보살이 바다에서 붉은 연꽃을 타고 솟아오른 자리 옆에 절을 지어 홍련암(紅蓮庵)이라 했다.

고려 초기에 산불로 소실되었으나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면했다. 그 뒤 몽골의 침략으로 전소되었다. 전소된 뒤 몇 차례 중창·중건되었다가 6·25 때 다시 전소된 것을 1953년 일부 복구했고, 1976년 원철(成徹)이 중건했다.

몇차례 소실된 경험을 갖고 있는 낙산사는 2005년 4월 5일에 산불로 일부분만 남겨두고 전소했다가 다시 복원했다.

주위경관이 빼어나고 동쪽 멀리 떠오르는 아침해, 저녁달은 찾는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운치가 있다.낙산사(洛山寺)는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인도 보타낙가산(普陀洛迦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창건 이전에 바닷가 동굴에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의상(義湘)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자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우리나라 4대 관음성지의 하나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