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중평마을, 도자기 메카로 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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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중평마을, 도자기 메카로 입증
  • 김송현 기자
  • 승인 2017.08.1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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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최대 ‘초기 청자’ 가마터 발견…후삼국시대부터 도자기 생산

 

인류사에서 도자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세계의 어느 박물관에 가도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고, 고대 도자기의 제작기술과 제품이 그 나라 역사와 문화의 수준을 대변한다.

전라북도 진안고원은 예로부터 도요지(도자기를 굽는 가마)의 보고이자 도자 문화의 중심지였다. 지질학적으로 도자기 원료인 고령토가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천혜의 이점이 있었다.

호남의 지붕으로 불리는 진안 고원은 고려 초기청자의 메카로 알려져 있다. 특히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중평마을은 후삼국시대부터 청자를 생산했다. 도통리와 외궁리등의 초기 청자 요지를 비롯해 진안군에 100여곳의 도요지가 고고학계에 보고되고 있다.

그중 도통리 중평마을은 진안고원 도요지의 중심으로 알려져 있다. 땅을 일구거나 길을 내다보면 도자기 조각이 무수하게 나왔다. 이 곳에선 고려 초기의 순청자부터 조선의 분청사기와 백자, 옹기 등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솥내 옹기에서는 지금도 옹기를 생산하고 있다.

중평 마을에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7곳의 청자 요지가 밀집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주민들이 마을을 형성하면서 집을 짓고 계단식 농지를 일구고 도로를 놓으면서 가마 유적의 대부분이 훼손되거나 파괴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도 집을 짓지 않거나 개발되지 않는 곳에서 가마터로 추정되는 부지가 남아 있어 발굴의 여지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중평 도요지는 일제시대인 1938년 일본인 노모리 켄(野守健)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고, 1980년대에 학자들에 의해 조사가 실시되었다가 2013년 11월부터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진안군과 국립 군산대 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이 공동으로 중평 청자요지에 대해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이 지역에서 호남지역에서 최대규모의 ‘초기 청자’ 가마터를 발견했다고 문화재청이 10일 밝혔다. 중평 청자요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34호로 지정돼 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초기 청자를 생산했던 가마 2기가 확인되었고, 다양한 종류의 초기 청자와 요도구(窯道具, 도자기를 구울 대 사용하는 도구) 등이 출토되어 호남 지역에 가장 이른 시기의 청자 생산유적으로 밝혀졌다.

 

▲ 진안 도통리 중평 청자가마터(위)와 2호 가마(아래) /문화재청

 

진안 도통리 중평 청자요지는 전북 진안군 성수면 백운면에 자리한 내동산(해발고도 887.8m) 줄기의 서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2013년부터 2016년까지 가마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3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지난 5월부터 진행 중인 4차 발굴조사는 2호 가마의 규모와 구조, 성격 등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현재까지 조사 결과, 2호 가마는 길이 43m, 경사도 12° 내외의 단실 등요(登窯, 가마)로서 전형적인 초기 청자 가마의 속성을 보여준다.

또 처음에 벽돌로 축조하였는데 얼마 후 진흙 가마로 개축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초기 벽돌가마는 호남 최초의 벽돌가마이자 초기 청자가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고창 용계리 청자요지의 가마터에서 나온 ‘초기 청가’ 가마(약 38m)보다도 약 5m 가량 커 호남 최대 규모의 ‘초기 청자’ 가마로 확인되었다.

한 기의 가마가 벽돌가마에서 진흙가마로 변화한 사례는 현재 우리나라 청자가마에서 확인된 최초로써, 앞으로 청자가마의 변천과정과 구조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가마 주변에 있는 대규모 폐기장에서는 한국식 해무리굽완, 잔, 잔받침, 주전자, 꽃무늬 접시 등 다양한 초기 청자와 다량의 벽돌, 갑발(匣鉢, 도자기를 구울 대 담는 큰 그릇) 등 요도구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大’자 명 등의 명문이 새겨진 청자와 벽돌가마의 불창(가마 안을 보는 구멍)으로 추정되는 벽체, 용도 미상의 요도구 등은 앞으로 초기 청자 가마의 구조와 성격을 파악하는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진안군이 고려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도자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이번 발굴에 의해 확인되었다 특히 진안 도통리 일원에 도통리 중평 청자요지를 비롯한 3개소의 초기 청자 가마가 1㎞ 내에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진안에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고 무역을 거래하던 시절부터 도자기를 생산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월이 송(宋)나라에게 망하고 도공들이 다른 나라로 떠났는데, 그중 일부가 고려로 와서 오월의 선진문물인 청자제작 기술을 전수했다고 한다. 그 기술이 진안고원의 도요지에 전수되어 초기 청자를 생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 초기에 진안의 도공들이 이주를 당해 한 대 진안의 도자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가 12~14세기에 다시 도자기 생산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엔 진안에 두었다는 특수행정구역인 ‘강주소(岡珠所)’의 위치가 도통리 일대로 추정된다. 강주소는 향, 소, 부곡과 같이 농사에 종사하면서 국가에 특수 공납품을 생산하는 마을을 의미하는데, 고려시대에 진안에 두었다는 강주소의 치소 위치는 아직도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 2호가마 전경과 세부구조 /문화재청
▲ 2호가마(위)와 조사 전 퇴적 양상(아래 왼쪽), 폐기장 수습 벽돌(아래 오른쪽) /문화재청
▲ 출토유물: 다양한 청자(위)와 각종갑발등 요도구(아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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