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제국주의②] 아프리카가 맨나중에 유럽에 먹힌 까닭은?
상태바
[기술과 제국주의②] 아프리카가 맨나중에 유럽에 먹힌 까닭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8.09 14: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세기 말라리아 특효 키니네 효용 알려지며 급속히 대륙 분할

 

남미 인디언들은 오래전부터 기나나무(cinchona) 수액을 받아 열병을 치료하는데 사용해왔다. 스페인 점령자들이 17세기에 페루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1633년 제주이트 신부들은 ‘페루 수액’이라는 용어를 썼다. 스페인의 한 백작부인이 페루에서 말라리아에 걸렸는데, 이 수액을 먹고 치료됐다는 기록이 있다.

기나나무 수액을 의학명으로 키니네(quinine 또는 퀴닌)라 부른다. 하지만 이 수액이 말라리아에 효험이 있다는 사실이 유럽에 알려지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독일인 탐험가 알렉산더 폰 훔불트가 18세기말에 에콰도르에서 기나나무 껍질의 약효에 관한 정보를 유럽에 제공했다.

이 키니네라는 약물이 인류에게 말라리아라는 전염병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줌과 동시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아프리카에서였다.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는 신대륙이었지만, 아프리카는 구대륙이었다. 북부 아프리카는 고대 이래 유럽과 교류와 충돌의 역사를 이어왔고, 포르투갈안들은 아프리카 서부해안도 컬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이전에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프리카 대륙이 유럽인들에게 식민지로 떨어진 것은 19세기말이었다.

아프리카가 오랫동안 유럽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된 것은 만리장성도, 무기도, 기후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전염병이었다.

유럽인들이 인도와 동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도시를 건설한 것은 16세기부터였다. 영국과 스페인이 아메리카에 노예를 데려갈 때 아프리카 해안에만 겨우 배를 정박시켰을 뿐이다. 해안에 배를 댄 채 내지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질병 때문이었다.

이질, 황열병, 장티푸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풍토병이 유럽인의 아프리카 접근을 차단했다. 이들 질병의 원인은 말라리아였다.

이 병에 한번 걸렸다 하면 유럽인들의 저항력은 일시적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은 낮은 정도의 말리리아를 평생 반복해 앓기 때문에 면역성을 갖지만, 유럽인들은 한번도 저항력을 키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치명적이었다.

1777~79년 아프리카 동부 델라고아만을 탐험하던 유럽인 152명중 132명이 질병으로 사망했고, 1805년 니제르강 상류 탐험에 참여한 유럽인 전원이 현지 풍토병으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1816~17년 콩고강 탐험에 나섰던 54명의 유럽인 가운데 19명이 사망했다. 토착인과의 교전이 있었거나, 기후에 대한 부적응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날 갑자기 닥쳐온 열병에 숨져갔다.

탐험대만이 말라리아에 죽은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 건설을 위해 해안에 주둔했던 군인들도 죽어 나갔다. 1819~1836년에 시에라리온에 근무한 1,843명의 백인 군인 중에서 890명이 사망했다. 사망률 48.3%. 백인들에게 아프리카는 ‘죽음의 땅’이었다. 1824년 한해에 영국령 골드 코스트에서 죽어나간 유럽인은 224명중 221명이었다. 19세기초 아프리카 주둔 백인 군인 중에서 전체의 77%가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21%가 병들고, 2%만 복무를 지속했다는 통계가 있다.

유럽 침략자에겐 재앙이었지만, 아프리카인들에겐 말라리아가 어떠한 무기보다 강력한 보호막이 되었다.

 

▲ 19세기에 그려진 키나나무 /위키피디아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발견되었다. 북아메리카 서인도제도에서 아프리카로 파견된 군인들의 사망률은 백인의 10분의1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멕시코만의 서인도 현지에서 서인도인 군인의 사망률은 현지에 파견된 유럽인 군인의 사망률보다 두배나 높았다.

아메리카 토착인들의 아프리카 적응력이 유럽인들보다 높았던 것이다. 서인도인들은 어려서부터 황열병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던 탓이었다. 아프리카는 백인들만의 무덤이 되어버렸다.

제주이트 교단에서 일찍부터 키니네가 말라리아 특효약이라는 사실을 본국에 보고해 의학계에서 그 효능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 침략자들이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와 그에서 파생된 각종 풍토병에 시달리면서도 키니네를 적극 도입하지 않았다. 우선 기나나무 껍질이 안데스 산맥에서 자라기 때문에 유럽에 공급되는 양이 부족했고, 가격이 매우 비쌌다. 기니 껍질이 유럽에 들어갈 땐 이미 다른 것이 섞여 품질과 가치가 아주 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등 신교도 국가들은 제주이트 수사들의 주장에 의혹의 눈초리로 보았다. 영국 청교도 혁명의 주역 올리버 크롬웰은 말라리아로 죽어가면서도 ‘교황의 치료법’이라며 키니네 복용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키니네는 끔찍하게 독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풍토병을 극복해 나갔다. 과학과 종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한 임상 체험이 키니네 치료의 효율성을 입증시켰다.

①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략했을 때인 1832년, 프랑스 주둔군 2,788명중 1,626명이 풍토병에 걸려 병원신세를 졌고, 다음 해엔 5,500명중 4,000명이 병에 걸려 입원환자 7명중 2명이 죽어 나갔다. 당시 프랑스군 의료진의 지침은 피를 뽑는 방혈과 식이요법을 사용하되, 그렇게 해서도 안 될 경우에만 키니네 요법을 쓰도록 했다.

하지만 장 앙드레 안토니니와 프랑수와 클레망 마욜트라는 두 군의관은 상부의 지시를 거부하고 환자에게 풍부한 영양을 섭취하도록 하고, 키니네 요법을 우선 시행했다. 이 두 군의관의 치료법은 7명중 2명의 사망률을 20명중 1명으로 크게 줄였다. 다른 군의관에 목숨을 맡겼던 군인들이 아우성을 치며 두 군의관에게로 도망쳐 왔다.

② 1839년 시에라리온 해안에 정박해 있던 노스 스타호 선상에 근무하던 20명의 승무원들이 복무하는 동안에 기나나무 껍질을 규칙적으로 먹었는데, 한명의 장교는 먹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장교만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③ 1841년 3척의 영국 탐험대가 159명을 3척의 선박에 태우고 니제르강을 탐험했다. 이 탐험에서 50여명의 유럽인이 희생됐다. 이 탐험대에 참여했던 톰슨이라는 의사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기나나무 껍질과 키니네를 주면서 실험을 했다. 그는 이 임상실험을 통해 키니네의 효과를 입증했다.

 

숱한 희생을 내면서 유럽인들은 키니네의 효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19세기 중엽엔 키니네가 유럽인 식민군에 보급되었다. 아프리카에 주둔하는 백인 군인들의 사망률이 크게 낮아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었다. 아프리카는 더 이상 ‘백인의 무덤’이 아니라, 개척의 대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 식민화의 대상이 된 것이다.

백인들이 말라리아의 해법을 알게 되면서 아프리카는 순식간에 유럽인에게 넘어갔다. 그들은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하는 철제선을 보유하고 있었고, 기관총으로 무장했다. 이런 장비와 무기로도 건너지 못했던 말라리아 장벽이 해제되면서 아프리카인들은 이제 아메리카에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서구인의 노예로 떨어졌다.

 

19세기 후반에 들어가면서 기나나무는 남미에서만 생산되지 않고 인도와 인도네시아에서도 생산되었다. 영국은 인도에서,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기나나무 재배법에 성공했고, 대량 재배와 효과 높은 수액 추출에 성공했다. 이제 안데스 산맥은 키니네 산지에서 밀려나고, 아시아 열대우림이 이를 대체했다.

 

▲ /위키피디아

 

말라리아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아프리카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먼저 땅을 차지하면 되는 미지의 땅이었다. 19세기말, 미국 오클라호마주에서 먼저 달려간 사람이 토지를 얻게 하던 같은 시기에, 아프리카에선 영국과 프랑스의 군인들이 무주물(無主物) 선점의 원칙으로 땅따먹기 경쟁에 나섰다.

영국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과 이집트 카이로를 잇는 종단 정책을 펼쳤고, 프랑스는 이에 맞서 알제리와 마다가스카르를 이어내는 횡단 정책을 추진했다. 아프리카를 종과 횡으로 이으려는 두 제국주의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마르샹 소령이 지휘하는 아프리카 원주민 부대 150여명은 1896년 가봉을 출발해 2년간 3,200㎞를 동진한 끝에 1898년 7월 이집트·수단 남부의 나일 계곡 파쇼다에 도착해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고 진지를 구축했다.

이에 영국의 키치너 장군은 병력을 이끌고 수단을 남하해 9월 2일 하루툼을 점령하고 18일 파쇼다에 도착했다. 키치너는 마르샹에게 수단 지역에 대한 우선권은 영국에 있다며 프랑스 국기를 내리고 철수하라고 요구했지만, 마르샹은 이를 거절하고 본국에 긴급 구원을 요청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해 11월 프랑스는 파쇼다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위기를 봉합했다. 대신에 두 나라는 이집트는 영국이, 모로코는 프랑스가 차지한다는데 합의했다.

저들 마음대로 아프리카의 경계를 그은 것이다. 아프리카는 19세기 후반 50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유럽 열강에 의해 급속히 식민화되었다. 키니네에 의한 말라리아 퇴치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