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 호남 근거지를 세우다…배매산성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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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 호남 근거지를 세우다…배매산성의 비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8.07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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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지역이 백제에 편입된 시기는 언제일까.

역사서를 훑어보다 이 대목에 늘 궁금증이 생긴다.

『삼국사기』엔 백제 건국자 온조왕이 재위 26년(시기8년) 10월에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나라를 합병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강 변에 소국을 세운지 20여년만에 삼한(三韓)의 최강국 마한을 병합한다는 기록은 믿기질 않는다.

이 기사의 뒷부분에 “(마한 지역에서)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후 온조왕 34년(서기 16년) 10월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하여 배반하였다. 임금이 친히 병사 5천을 거느리고 가서 치니 주근이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죽였다.”고 했다. 따라서 온조왕의 마한 병합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마한은 삼국사기의 기사와 달리 오래 존속했고, 백제가 건국초기에 마한의 일부만을 점령한 것으로 보면 무방할 것 같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마한이라는 나라가 버젓히 나온다. 이 사서를 편찬한 진수(陳壽, 233∼297)는 3세기의 인물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1세기에 백제에 병합되었다던 마한이 3세기에 쓰여진 삼국지 동이전에선 새롭게 부활한다. 망했던 나라가 부흥한 것일까. 게다가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백제가 마한 54국 가운데 하나의 소국으로 나온다. 위지 동이전은 당대에 편찬된 사서이고, 삼국사기는 천여년 후에 쓰여진 역사서이므로, 마한은 3세기에 한반도 서남쪽에서 강한 세력을 형성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백제가 마한을 완전하게 멸한 시기는 언제일까. 일부 역사학자들은 4세기 근초고왕때로 잡는다. 하지만 삼국사기 근초고왕 시기의 기사 가운데 마한을 점령했다는 기사가 없다. 다만 근초고왕조에 “그해(즉위 24년, 369년)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고 적고 있다. 구체적으로 마한을 병합했다고 적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부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근초고왕 마한병합설도 설득력이 약하다.

다만, 한강유역의 백제가 강성해지면서 한반도 남서쪽에 군림하던 부족연맹체 마한의 영역이 남쪽으로 위축되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면 한성에 도읍지를 두었던 백제가 마한의 영역인 호남지역에 언제부터 근거지를 확보하기 시작한 것일까. 이 미스터리의 단초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 완주 배매산성 전경 /문화재청

 

전라북도 완주군의 야트마한 야산에 묻혀 있던 토성을 발굴해보니, 그 성터가 한성백제의 것과 유사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문화재 당국은 호남지역에서 한성백제 시기의 토성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라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발굴 조사는 (재)전라문화유산연구원(원장 천선행)이 했다. 이 연구원은 전북 완주군 소재 배매산성이 한성백제 시대의 토성인 것으로 확인했다.

배매산성은 완주군 봉동읍 둔산리에 자리한 배매산(해발고도 123m)의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테뫼식(山頂式) 산성은 산의 7~8부 능선에 테두리를 돌린 것처럼 쌓은 산성 축조방식을 말한다.

연구원은 2000년에 성벽 주변에 있는 건물지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한데 이어 지난 6월부터는 산성의 축조 시기와 축성 기법 등을 조사하기 위한 발굴조사를 진행해왔다. 이번 조사는 산성의 서쪽 성벽과 성 안쪽 지역 평탄지 일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조사에서 ▲ 토사(土沙, 흙과 모래)와 쇄석(碎石, 부순 돌) 등을 이용한 삭토기법으로 성벽이 조성됐고 ▲ 성벽의 가장 아래층에는 성벽을 따라 열을 지어 목주공(木柱孔, 나무기둥구멍)이 나열되어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또 성 안에 있는 평탄지에서는 거칠게 다듬은 돌로 만든 배수시설, 석축열, 건물지와 배연(排煙, 연기를 뽑아 냄)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삭토기법(削土기법) : 성곽이 축조될 기반층을 깎아내고 그 위에 다시 흙을 쌓아 성곽을 축조하는 기법.

 

▲ 완주 배매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문화재청
▲ 배매산성 성벽 단면 /문화재청

 

조사과정에서 유물로 백제 한성도읍기 말기에 사용된 굽다리접시(고배, 高杯), 삼족토기, 계란모양의 장란형(長卵形) 토기 등 각종 토기류와 성을 쌓을 때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철부(鐵斧, 쇠도끼)가 나왔다.

이는 기존의 한성백제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의 조합양상과 거의 일치한다. 특히, 굽다리접시와 장란형토기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등 서울․경기 지역의 한성백제 유적에서 나온 유물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또 성벽의 축성방법도 한성백제 시대에 쌓은 화성 길성리토성과 유사하다. 이와 같이 유물과 축성방법 등을 미뤄보아 완주 배매산성은 백제 웅진‧사비기 이전인 한성도읍기 말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배매산성이 호남 지역에서는 최초의 백제 한성도읍기 토성라고 진단했다. 즉 완주 배매산성은 호남 지역의 한성도읍기 백제 산성의 축조기법과 축성방법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배매산성은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두었을 시기에 호남 지역에 발을 들여 놓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배매산성의 건축 시기가 언제인지는 더 많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굳이 사료를 동원해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근초고왕 때가 아니었을까, 추정해본다.

 

이 산성이 한성백제의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해서 이 시기에 마한이 멸망하고 백제에 병합되었다고 할수는 없다. 마한은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한성을 뺏기고 웅진으로 천도한(475년) 이후에 마한을 병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 완주 배매산성 위치 /전라문화유산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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