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캄보디아 여왕 메이…베트남의 허수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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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캄보디아 여왕 메이…베트남의 허수아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8.05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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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인의 첩이라는 수근거림, 언니의 처형 목격하고 미쳐 버린 비극의 주인공

 

19세기초,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지배한 적이 있었다. 1835~1847년 사이 13년 간이다.

이 시기에 캄보디아에 허수아비 왕이 있었는데, 그는 캄보디아 역사상 유일한 여왕이었다.

이름은 앙 메이(Ang Mey), 1815년에 태어나 1874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재위기간은 애매하다. 스무살인 1835년에 왕위에 올라 점령국인 베트남이 직접 통치를 하던 1840년까지 5년간이라고도 할수 있지만, 나중에 베트남이 형식적으로 복권시켰기 때문에 그때를 재위기간에 포함시켜야 할지 모호하다. 어쨌든 베트남에 의해 수모를 겪으며, 이용당하기만 한 비운의 여왕이다.

 

메이는 아버지 앙 찬(Ang Chan) 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앙 찬은 아들을 두지 못하고 딸만 넷을 두었다. 맏이가 옥변(玉卞, Baen)이고, 그 아래로 옥운(玉雲, Mey), 옥추(玉秋, Peou), 옥원(玉原 Sngon)이다.

캄보디아는 이웃에 베트남과 태국에 둘러 싸여 있고, 오랫동안 두 나라의 침략에 시달렸다. 지배층은 친베트남파와 친태국파로 나눠져 대립하고 있었다. 부왕 앙 찬은 친베트남이었고, 그의 배다른 동생들, 앙 스구온, 앙 임, 앙 두앙은 태국의 지원을 받으며 배다른 형 앙 찬과 권력투쟁을 벌였다.

앙 찬 재위 시절에 태국은 캄보디아내 친태국파의 지원을 얻어 1812년과 1833년, 두차례에 걸쳐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그때마다 앙 찬은 베트남으로 도망을 쳤고, 베트남은 군대를 동원해 태국군을 쫓아 냈다. 베트남은 수도 프놈펜 왕성 바로 옆에 진서성(鎭西城)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캄보디아 왕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리고 총독격인 보호진랍(保護眞臘)이라는 관리를 파견했다. (진랍은 중화권에서 캄보디아를 부르는 명칭이다.) 부왕 앙 찬 시절에 캄보디아는 이미 베트남의 보호국이 된 것이다.

그러던 부왕은 1844년 12월(이하 음력)에 세상을 떠났다.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에서 정치와 권력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 캄보디아 유일의 여왕 앙 메이(Ang Mey) /위키피디아

 

아들 없이 임금이 죽자 다음 왕위는 동생들에게 넘어가는 것이 순리이지만, 동생들은 모두 친태국파였다. 베트남은 딸 넷 중에서 다음 임금을 찾았다. 첫째 옥변은 태국파였다. 그의 어머니는 태국 영향 아래 있었던 바탐방 지배자의 딸이었다. 베트남의 민 망(明命) 황제는 둘째 옥변, 즉 메이를 선택했다. (옥변과 옥운은 어머니가 달랐다.) 이때 메이의 나이 스무살이었다.

메이는 캄보디아 왕이 되었지만, 할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상 통치는 보호진랍의 직책을 갖고 있는 베트남인 총독 쯔엉 민 장(Truong Minh Giang, 張明講)이 수행했다.

아울러 메이에 대한 칭호도 격하시켰다. 베트남에서 메이에게 부여한 명칭은 진랍군주(郡主)였다. 아버지 앙 찬은 진랍국왕이란 칭호를 내렸지만, 딸에게 준 칭호는 국왕이 아니라, 지방행정관 정도의 자리, 군수(郡守) 쯤으로 불렀던 것이다.

▲ 베트남의 캄보디아 총독 진서장군의 직인. 鎭西將軍之印 /위키피디아

베트남의 민 망 황제는 어린 여왕을 앉혀 놓고 곧 마각을 드러냈다. 메이가 즉위하던 1835년 10월 그나마 보호국으로서의 지위조차 빼앗아 캄보디아를 병합했다. 그리고 ‘보호진랍’의 지위를 ‘진서장군’으로 전환했다.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이 총독에서 통감으로 전환한 것과 다르지 않다. 나라 이름도 지워 진랍이나 캄보디아라는 국호를 쓰지 못하게 하고 진서성으로 했다. 베트남 왕국의 1개 성으로 전환된 것이다. 메이는 허수아비, 진서장군 쯔엉 민 장이 사실상 캄보디아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10개 부(府)와 23개 현(顯)으로 재편했다. 1940년 메이의 칭호도 진랍군주에서 미림군주(美林郡主)로 강등했다. 미림은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설치한 10개 부의 하나였다. 캄보디아에서 조그마한 지방 하나를 맡는 지위로 격하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언니와 두 여동생에게는 현군(顯君)으로 봉해 고을의 원님 정도 지위로 떨어뜨렸다.

 

그러면 메이는 베트남에 저항했는가. 그녀는 베트남에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순종했다. 베트남의 경계심을 자극할만한 어떠한 언행도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베트남에 저항하는 눈치라도 보이거나 태국 왕실 또는 캄보디아내 친 태국파와 손을 잡았더라면 그는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언니의 삶을 보면 쉽게 할수 있다. 언니 옥변은 1840년 친태국 인사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했다. 그것도 잔인하게…. 일설에는 옥변이 메콩강에 빠뜨려 죽였다는 설이 있고, 진서장군 쯔엉 민 장에 의해 고문당해 죽자 그녀의 시체는 자루에 담겨 강물에 빠뜨렸다는 설도 있다.

베트남은 메이가 형식적으로 여왕의 위치에 있었고, 게다가 베트남에 저항한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목숨은 살려주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캄보디아 민중들 사이에 메이가 베트남 총독인 쯔엉 민 장의 첩이 되었다는 루머가 확산되었다. 증거는 없었다. 쯔엉은 이미 베트남인 아내가 3명이나 있었고, 아무리 권력자라고 해도 태국 여왕을 첩으로 삼는다는 것은 베트남 황제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민중들 사이에는 미확인 루머가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요즘 용어로 치면 가짜뉴스였다.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가짜 뉴스는 여론을 좌우한다. 베트남에 반감을 갖고 있는 세력에게 메이는 “권력에 집착해 벌레 같은 베트남놈들로 하여금 캄보디아를 집어삼키게 했고, 자신은 안락한 삶을 누리면서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다”는 비난을 쏟아냈다. 게다가 베트남 점령군 우두머리에게 몸도 팔고 나라를 팔았다는 소문에 시달린 것이다.

여기에 불을 지른 것은 베트남이 메이 여왕을 납치한 사건이다. 아무리 실권없고, 악성루머에 시달리는 군주였지만 메이는 캄보디아인들에겐 정신적 구심점이었고, 그녀가 캄보디아에 존재하는 한 반베트남 저항의 중심이 될 소지가 있었다. 이미 수도 외곽의 밀림지대엔 태국의 지원을 받는 반군들이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악수(惡手)를 두고 말았다. 베트남 민망황제와 캄보디아 총독 쯔엉 민 장은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1840년 베트남 오페라가 공연되고 술잔이 도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메이 여왕과 자매들은 메콩강에 배를 띠우고 유유자적하게 노닐고 있었다. 그러다가 메콩강에 준비된 한 선박에 유인됐다. 그들은 사이공으로 옮겨졌다. 이때 언니 옥변이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 죽임을 당했다.

 

▲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민 망 황제 /위키피디아

 

베트남이 아무리 국왕으로 대우하지 않고 격하했어도 캄보디아인에게 메이는 국왕이었다. 국왕이 베트남으로 납치되었다는 것은 나라가 사라졌음을 깨닫게 한 계기가 되었다. 베트남은 메이를 베트남으로 데려가면 캄보디아 내지화가 순조로울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오산이었다. 오히려 ‘국왕=나라’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던 캄보디아인들의 저항만 불타오르게 했다. 메이가 프놈펜을 떠나자 귀족층들은 다음 순서가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민중들은 나라 잃었다는 상실감에 동요했다. 이틈을 파고든 것이 메이의 삼촌 앙 두앙이었다.

캄보디아의 저항이 걷잡을수 없이 번져 나갔고, 태국군이 이 틈을 타서 개입했다. 1840년 캄보디아를 집어삼킨 베트남 민 망 황제가 사망하고 곧이어 진서장군 쯔엉 민 장도 캄보디아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베트남은 메이를 다시 캄보디아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한해만이다. 메이를 돌려보내면 캄보디아인들을 진정시킬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캄보디아인들의 저항은 베트남이 진압하지 못할 정도로 거세졌다. 삼촌 두앙은 태국군의 지원 아래 캄보디아 독립의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메이는 베트남의 앞잡이로 그려진 구도에서 그녀의 귀국은 베트남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841년 9월 베트남군은 마침내 캄보디아에서 철군한다. 메이도 베트남군을 따라 다시 남부 베트남의 캄보디아인 거주지역에 이주했다.

메이의 가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베트남과 태국, 캄보디아 저항군 사이에 지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누구도 우세하지 않는 상태에서 1845년 정전 협상이 벌어졌다. 협상의 결과 태국의 지원을 받는 두앙이 왕위에 오르되, 메이는 군주(郡主)로 복귀해 두 사람이 공동으로 통치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후 메이는 캄보디아에 영구 귀국했다. 하지만 권력의 대세는 삼촌 두앙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다만 베트남으로선 메이가 자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존재였고, 따라서 두앙도 조카 메이를 살려둘 수밖에 없었다. 메이는 베트남의 지지를 받아 생존이 허용되었다.

베트남 실록에서 메이의 기록은 1856년까지 이어진다. 캄보디아 왕실기록에 따르면 메이는 캄보디아 우동에 생존해 있었으며, 사고로 화상을 입어 1874년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기 몇 달전 프랑스인 장 무라(Jean Moura)가 방문해 메이를 만났는데, 그때 메이는 정신병자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고운 자태를 유지했다고 하며,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과거 일을 또박또박 회상했으며, 발작을 일으키면 누군가를 격하게 욕하곤 했다고 한다. 시련의 주인공은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베트남에 나라를 잃은 군주이자, 여성의 지위가 낮은 동아시아의 군주로서 메이는 한많은 인생을 삻았다. 베트남 장수에게 몸을 팔았다는 수근거림, 언니가 처형되는 모습, 베트남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신세를 몸소 체험햤으며, 말년에는 삼촌의 견제 속에서 우동 왕국의 한 구석에서 미쳐 죽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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