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심한+α」를 통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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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심한+α」를 통일했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30 16: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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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준씨의 『신라인들은 신라가 삼국 통일을 말하지 않았다』를 읽고

 

이 책이 나왔다는 기사를 읽고, 내가 그동안 궁금해 하던 것을 파헤쳤냐먀며 반가워 했다. 그래서 조선일보 기자 출신 신형준씨가 쓴 『신라인들은 신라가 삼국 통일을 말하지 않았다』를 구입해서 읽었다.

▲ 책표지

책을 읽으면서 일단 신형준씨가 방대한 자료를 섭렵한데 대해 존경의 염을 보냈다. 그가 이 책을 쓰면서 가능한 모든 자료를 전수조사했다고 밝혔다. 고려 때 쓰여진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당대에 쓰여진 금석문의 판독문과 해석문을 인터넷 자료를 뒤져 파악했다고 했다. 이 방대한 자료에서 삼국통일 또는 삼한통일에 관한 내용을 걸러내 과연 당대의 신라인들이 삼국 통일을 했다고 생각했는지를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우선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명제는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부정하지는 못했다. 삼국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말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이다. 하지만 삼국시대를 그린 역사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읽다가 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말에 의심이 간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명제,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주제를 부정하기란 쉽지가 있다. 갈리레이나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주장을 해야 한다. 때론 목숨이 아까워 스스로의 주장을 접어야 한다.

그런 명제중의 하나가 신라의 삼국통일이다. 신형준씨의 『신라인은 삼국 통일을 말하지 않았다』는 그런 부류의 책이다.

 

그의 결론은 신라인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통일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마한 진한 변한의 보다 축소된 삼한을 통일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형준씨는 “신라가 통합한 영토의 경계가 가장 북쪽으로 올라갈 경우 대동강 이남이며, 남쪽으로 내려올 경우 임진강 이남”이라면서 신라인들이 북쪽의 고구려를 영토화해서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저자는 신라가 백제를 병합한 것은 맞지만 고구려를 병합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나중에 백제 땅을 놓고 신라와 당나라의 혈투가 벌여져 신라가 최종 승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 땅은 당나라가 정벌해 합병한다. 다만 고구려의 남부지방은 신라가 일부 획득한다.

이 명백한 사실을 놓고 우리나라 많은 역사학자들은 신라기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을 통일했다고 주장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그렇게 믿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 학계에서 인식되고 있는 신라의 삼국통일론에 다섯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①신라인들이 통일을 이룩한 왕으로 태종 무열왕을 꼽은 까닭은?

우리 역사 교과서에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 임금인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신문왕 12)에 따르면 당나라 중종이 “당 태종과 신라 태종 무열왕의 묘호가 같으니 칭호를 고치라”고 지시했다. 이에 신문왕은 “선왕 춘추는 삼한을 통일한 공적이 매우 크다:고 말한다.

여기서 신라인들은 삼한 통일의 주역을 태종 무열왕으로 보았다.

신형준씨의 전수 조사에 따르면 신라인들의 기록에서 삼한 통일을 한 임금으로 문무왕보다 무열왕으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②신라인들이 ‘삼국통일’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이유는?

신라인의 기록이나 고려인의 기록인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통털어 볼 경우 삼국통일이란 표현이 거의 쓰이지 않고 삼한통일이란 표현을 썼다. 신라인들은 한반도 남쪽의 삼한을 통일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③신라인들에게 ‘삼한’은 어디였을까?

삼한=삼국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남쪽의 마한 진한 변한을 의마했다.

 

④발해 건국에 신라가 모르쇠를 한 까닭은?

신라는 철저하게 발해 건국을 무시했다. 고구려 후예인 발해 건국을 무시한 것은 발해를 통일 대상에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⑤‘삼한=삼국’이면 삼국통일은 당나라가 했다?

중국에서 발견되는 금석문에는 고구려를 삼한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이를 인정해 삼한=삼국으로 보게 될 경우 삼국통일은 당나라가 한 것을 인정하게 된다. 결국 중국 동북공정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출판사 서평>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는가?

더 나아가, 신라인들은 삼국을 통일했다고 스스로 자부했을까?

본질적인 질문으로 교과서 속 역사 기술에 의문을 제기하다

모든 한국사 교과서가 ‘신라의 삼국 통일’을 역사적 사실로 적고 있다. 『신라인은 삼국 통일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렇게 교과서에 흔들리지 않는 사실로 각인된 ‘신라의 삼국 통일’에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저자의 질문은 본질적이어서 더욱 도발적이다.

 

첫째 질문

백제는 660년, 고구려는 668년 멸망했다. 신라는 두 나라가 멸망한 뒤 당나라와의 전쟁을 거쳐 676년 대동강~원산만 이남 통일을 이뤘다. 신라의 통일이 완성된 시기를 668년으로 보든, 676년으로 보든 당시 신라의 왕은 문무왕이었다. 한국사 교과서도 통일 임금으로 문무왕을 꼽는다. 그런데, 신라인들은 통일을 이룩한 군주로 문무왕이 아니라, 태종 무열왕을 꼽았다. 661년에 사망한 태종 무열왕은 백제의 멸망만 지켜봤을 뿐이다. 신라인들은 왜 고구려 멸망은커녕 고구려와 제대로 대결조차 한 적 없는 태종 무열왕을 통일 군주로 꼽았을까?

 

둘째 질문

신라인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자부했다면 당연히 ‘삼국 통일’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신라인들은 삼국 통일이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았다. 대부분 ‘삼한 통일’이라는 표현을 썼다. 신라인들은 왜 ‘삼한 통일’이라는 표현을 고집했을까?

 

셋째 질문

신라인들은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라고 생각했다. 발해가 고구려의 옛 땅 대부분을 차지하고 건국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신라인들이 ‘우리 선조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자부했다면 발해 건국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을 것이다. ‘통일 신라’를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발해 건국에 관심이 없었다. 발해가 강성한 국가로 자리 잡고도 ‘신라의 통일은 잘 유지되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고려나 후백제가 건국한 신라 최말기에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고 비탄에 잠긴 것과 대조된다. 신라인들은 왜 발해 건국, 그러니까 고구려 부활에 무관심했을까?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도 본질적으로 찾았다. 신라인은 물론, 고구려인이나 백제인이 남긴 모든 기록 유물을 전수 조사한 것이다. 그 과정을 거쳐 ‘신라인 대부분은 신라가 삼국 통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상 처음 논증했다.

한국사학계에도 소수이긴 하지만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부정하는 주장이 있다.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당과 전쟁을 마친 뒤(이 책에서는 이를 ‘통일 전쟁’이라고 부른다) 신라가 차지한 영역이 대동강~원산만 이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부정하는 한국사학자들도 ‘신라인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에는 의문을 두지 않았다.

저자는 ‘신라인들의 통일관’을 살피기 위해 ① 돌이나 토기 혹은 쇠붙이 등에 신라인이 직접 써서 남긴 모든 금석문, ② 원효나 최치원 등 신라인의 글을 모은 문집, ③ 우리나라에 남은 고구려나 백제의 기록 유물은 물론 당나라로 건너간 고구려나 백제 유민의 묘지명(죽은 이의 행적을 적어 무덤에 넣은 글), ④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이렇게 네 가지 항목 자료를 전수 조사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우리가 믿어온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인다.

 

우리 역사 속 오류와 모순을 바로잡을 기회가 왔다

저자는 한국사학계의 주장처럼 ‘삼국=삼한론’을 펼칠 때 닥칠 수 있는 후폭풍을 지적한다.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따라가면, 중국의 ‘제2의 동북공정’, 그러니까 고구려나 발해가 중국 지방 정권의 하나였다는 주장(기존 동북공정)이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될 위험과 맞닿게 된다.

7세기 이후 중국측 기록에는 ‘삼한=삼국’이 많이 보인다. 애초 삼한이란 표현은 중국이 자기 주변에 존재하는 나라나 종족에 대해 일종의 ‘인류학적 보고서’를 쓰면서 역사서에 처음 등장했고, 이때 삼한은 요즘 말로 하면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 정도로 묘사됐다. 조국 멸망 뒤 당나라로 건너간 고구려나 백제 유민들도 ‘삼한=삼국’을 받아들였다. 한데 여기서 삼한은 모두 당나라의 영토, 혹은 지배 지역으로 묘사돼 있다. 특히 ‘삼한=삼국’을 받아들인 고구려나 백제 유민들의 기록에 등장하는 ‘삼한’은 100% 당의 영토였다.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 중 7세기 중엽 이후 ‘삼한’을 언급한 묘지명은 모두 삼한을 당나라가 차지한 곳으로 기술했다. 심지어 고구려의 옛 땅을 발해가 차지한 상황에도 삼한은 당나라 영토인 것처럼 표현했다. 백제 유민의 것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국제정세를 묘사한 백제 유민의 묘지명도 모두 백제 지역마저 당이 차지한 것처럼 말한다. 물론 고구려나 백제 유민이 보인 ‘삼한은 당나라 영토’라는 표현은 당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사학계가 중국에서 비롯된 용례 변화를 바탕으로 필요에 따라 ‘삼한=삼국’을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 담긴 ‘정치적 함의의 변화’, 즉 ‘삼한은 당나라의 영토’라는 변화된 뜻에 대해 입을 다문다면 이는 학문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더 나아가 이런 식의 주장, 그러니까 ‘삼한=삼국’이라는 주장이 중국에 의해 악용된다면, 더 심화된 ‘동북공정’이 나올 수도 있다.

 

이제 한국사학계가 설명해야 한다

‘신라인이 삼국 통일을 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하려면 아래 의문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① 왜 신라인들은 통일을 이룩한 왕으로 현재 사학계처럼 문무왕이 아니라 무열왕을 꼽았을까?

② 고구려를 발해가 계승했다고 여긴 신라인들이 왜 발해 건국 때 아무런 군사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통일이 깨졌다는 생각조차 가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발해를 두고서도 ‘삼한은 여전히 통일됐다’고 말했을까?

③ 문무왕이 당나라와의 통일 전쟁 때 왜 “당 태종이 (신라 무열왕에게) 평양 이남 백제 땅을 주기로 했다”며 고구려 최남단만 당나라에 요구했을까?

④ 사망 직전(673년) 김유신은 왜 신라와 당이 한반도 중부에서 한창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삼한은 통일됐다”고 했을까?

⑤ 당 황제가 대동강 이남을 신라에게 준다고 했을 때 신라 성덕왕은 왜 감사하다고 했을까?

⑥ 삼한과 삼국이 같은 표현이라면, 신라인은 왜 삼한을 통일했다는 표현을 주로 쓰고, 삼국을 통일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⑦ 신라인이 7세기 중엽 이후 중국 기록을 받아들여 ‘삼한=삼국’이라고 생각했다면, 신라인도 ‘삼한은 당나라 땅’이라는 중국이나 고구려 백제 유민의 입장을 받아들였는지, 또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중국에서 또 다른 동북공정론을 제기한다면 어떻게 우리 역사를 ‘방어’할 수 있는가?

한국사 교과서는 이에 대해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말로 답을 대신하고 있다. 왜 태종 무열왕을 통일을 이룩한 왕으로 신라인들이 꼽았는지, 발해 건국 때 신라가 왜 모르쇠를 하면서 통일은 유지되고 있다고 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하는 형편이다.

하지만 ‘신라인들은 애초 삼한보다 약간 더 북쪽으로 확장된 지역을 통일하려 했고, 실제로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신라인들은 신라가 통일 전쟁 뒤 차지한 영역을 삼한의 지역적 범위로 생각했다’고 답하면, 위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애초 신라의 목적은 백제 지역(혹은 그보다 북쪽으로 약간 확장된 지역) 통일이었기에 통일을 이룬 왕은 백제 멸망(660년)을 목격한 태종 무열왕(661년 사망)이 될 수밖에 없다. 고구려는 신라가 통일한 지역이 아니었기에 그곳에 발해가 들어서든 발해를 무너뜨리고 요나라가 들어서든 신라인들은 상관이 없었다. 그곳은 신라가 통일한 땅이 아니었으니까! 그랬기에 신라인들은 ‘삼국 통일’이라는 표현보다 ‘삼한을 통일했다’는 표현을 압도적으로 많이 쓴 것이다. 비록 고구려의 옛 땅을 당나라가 잠깐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 세대 뒤 고구려 후예인 발해가 건국하면서 만주와 한반도 북부는 다시금 우리 역사로 들어왔다. ‘삼한=삼국=당나라 영토’라는 중국 논리를 신라가 받아들인 적도 없지만, 발해 건국과 함께 이 논리는 설 자리를 잃는 것이다.

 

구체적인 수치로 입증한 ‘삼한 통일’의 근거

‘신라인들이 삼국 통일을 이뤘다고 생각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모두 5개다. ‘삼한=삼국’으로 본 기록 2건과 ‘삼국 통일’이 표현된 3건이다.(통일 군주로 문무왕을 꼽은 ‘문무대왕릉비’나 『삼국사기』 문무왕 9년과 21년 기록 세 가지를 거론하면서, 이를 신라가 삼국 통일을 했다는 증거로 삼으려는 주장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통일 군주로 문무왕을 삼은 것뿐이다. 문무왕은 당나라에 보낸 편지에서도 밝혔듯, 통일 전쟁에 임하는 신라의 목표는 고구려 땅이 아니라, 백제 땅 확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라인들은 삼국이 아니라, 대동강~원산만 이남을 뜻하는 삼한을 통일했다고 생각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45건이다. 삼한을 ‘통일 전쟁 이후 신라가 실제로 자치한 영역’으로 생각했음을 드러내는 기록이 18건, 통일 군주로 백제의 멸망만을 지켜본 태종 무열왕을 꼽은 기록이 7건, ‘삼한 통일’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기록이 11건, ‘고구려가 발해가 됐다’며 고구려 지역이 신라의 영토가 아님을 명확히 한 기록이 4건, ‘북국에 사신을 보냈다’며 발해를 국가적 실체로서 인정한 기록이 2건, 신라의 국경이 대동강~원산만 이남임을 밝힌 기록이 3건이다.

최종 스코어 45 대 5로, ‘신라인들은 삼국이 아니라, 자신들이 실제로 차지한 삼한을 통일했다고 생각했다’는 주장을 논증하는 증거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이럴 때 어느 주장에 손을 들어줘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전문가의 이야기라고 무조건 믿지 말고, 자기 눈으로 역사를 직접 검증하자

저자는 ‘신라인은 삼국 통일을 말하지 않았다’는 주장 검증에 ‘한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국민이 참여할 수 있다고 손을 내민다. 예전처럼 한자 자료를 해석해야 했을 때는 숙련된 소수 전문가만 ‘논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과 정보 공개 발달로, 신라와 관련한 모든 사료는 국문으로 번역돼 인터넷에 올라 있다. 삼국시대 사람들이 남긴 모든 기록과 번역문까지 말이다. 이제 검증은 전문가들만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술이 수도사 등 소수 지식인이 독점하던 지식 체계의 운용을 바꿨듯이, 인터넷 발달과 학술 정보 공개는 우리 역사 연구에서 대중의 접근을 비약적으로 확대시킨다.

한국사 교과서도 기술을 바꿔야 한다. 현재 교과서는 삼국을 통일했다는 의미로 ‘통일 신라’라는 표현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발해도 다룬다. 그래서 8세기 이후 역사를 ‘통일 신라와 발해’라고 부른다.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생각한다면 ‘통일 신라’에서의 ‘통일’은 삼국이 아니라, 대동강~원산만 이남을 의미하는 삼한을 의미하는 것이라야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주장하는 순간, 발해라는 존재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신라의 삼국 통일을 주장하려면, 발해 건국으로 삼국 통일이 깨졌다고 해야 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와 발해는 양립 불가능한 존재다. 그렇다면 8세기 이후 우리 역사는 ‘삼한 통일 신라와 발해’ 혹은 ‘남북국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역사를 미화해온 콤플렉스, 이제는 과감하게 벗어나자

저자의 집필 동기로 두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는 어린 시절부터 가져온 의문, 즉 고구려 영토를 신라가 통합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자답하고 싶었다고 한다.

둘째는, 20년 가까이 문화재 기자를 하면서 느낀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저자 역시 기자 초년병 시절, ‘우리 문화유산의 찬란함’ 내지는 ‘우리의 빛나는 전통과학 기술’ 등의 표현을 많이 썼다고 한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자료에 접근하면 할수록 ‘한국사 중심으로 모든 역사가 돌아가는 듯한, 역사 인식의 천동설’에 혀를 차게 됐다.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자였다고 한국사학계는 주장하지만, 최전성기에도 중국 대륙의 ‘반쪽짜리 왕조’에 조공한 고구려가 어떻게 동북아시아의 패권일 수 있는가? 석굴암이 루트 2의 비례미라는 극도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건축됐다고 여러 연구서가 언급했지만, 막상 석굴암을 실측하니 그 어떤 ‘수학적 비례미’도 찾을 수 없었다. 조선 후기에 자생적 근대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국사학계는 입을 모으는데, 근대의 최선구로 볼 수밖에 없는 실학자 그 누구도 서구 근대 과학을 언급하며 우리 사고 체계에 통절한 반성을 촉구하지 않았다. 적어도 19세기 중엽 이전까지는.

저자는 근대화에 뒤늦어 외세 강점을 겪게 됐다는 열등감, 즉 ‘근대성 콤플렉스’ 때문에 외세 강점 이전의 역사에서 찬란함과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시도가 광복 이후 시작되거나 강화됐는데, 어느덧 그런 움직임이 ‘역사를 왜곡하는 미화’로 변질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역사를 잊거나 비하해서는 안 되지만, 미화나 과장을 해서도 안 된다는 지적이다.

최근 논란인 ‘유사 역사학’ 논쟁도 연원을 따지면 한국사학계의 잘못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한국사학계 자체가 우리 역사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더 미화시킨’ 것이 유사 역사학이라는 입장이다. 우리 역사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읽자는 작은 시도로, 그리고 지난 40여년 이상 품어온 의문에 자답하면서 준비한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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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준 2017-07-31 01:22:46
저자 신형준입니다. 상세하고도 깊이 있는 분석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