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피서지, 무릉계곡과 삼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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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피서지, 무릉계곡과 삼화사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25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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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들이 노닐던 곳…두타와 청옥의 골짜기가 만든 비경, 그곳에 천년고찰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흐르면서 태백산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하나 치니, 두타산(1,352m)이 섰다. 그 옆에 청옥산(1.403m)이다. 두타산과 청옥산이 만든 계곡을 타고 내가 흐르고, 그 개울이 동쪽으로 14km의 계곡을 형성한다.

무릉(武陵)계곡이다. 신선이 산다는 곳이다.

쌍용씨멘트 공장의 희뿌연 모습을 지나 골짜기로 들어서면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면적은 6.600㎡. 1천 명은 너끈히 앉을수 있다. 동해·삼척의 학생들이 소풍을 오던 곳이다. 산골 소년·소녀들은 이 너럭바위에 앉아 어머니가 싸주던 김밥을 먹으며 하루를 놀았다.

두타와 청옥을 가르며 흘러 내린 맑은 물이 넓적한 자연 암반을 씻어내리며 흐른다. 어찌 오래 흘렀는지, 바위에 검은 때가 눌러 앉았다.

옛 사람들도 지금의 어린 학생들처럼 이 곳에 소풍을 자주 왔다. 옛 시인 묵객들은 너럭 바위에 걸터얹아 태팩의 맑은 물이 깎아 만든 작은 못에 발을 담그고 시상(詩想)에 취했다. 그들은 생각나는 대로 시를 썼다. 그리고 바위 위에 적어 놓았다. 당시는 자연 훼손의 개념이 없었다.

그중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글도 있고, 조선 시대 명필인 양봉래의 글도 있다. 이름을 알수 없는 김가, 이가의 글도 있다. 언제 다녀갔는지 알수 없지만, 우리보다 몇세대 앞에 살던 조상일 것이다.

 

▲ 무릉계곡 /사진=김인영

 

▲ 삼화사 / 사진=김인영

 

너럭바위를 지나면 바로 만나는 것이 삼화사(三和寺)다. 셋이 하나가 되어 화합한다는 뜻이다.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년)에 자장법사가 지었다. 벌써 1,400년 전이다. 대관령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다. 자장법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귀국해 이 곳에 절을 짓고 흑련대(黑連臺)라 고 했다.

그후 신라 경문왕 4년(864)에 사굴산파의 시조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절을 다시 지어 삼공암(三公痷)이라고 했다.

고려 태조때 다시 삼화사라고 했는데, 왕건이 삼공암에서 후삼국 통일을 빌었다고 해서 절 이름에 이름을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는 의미를 가미했다고 한다.

삼화사를 지나 계곡을 올라가면 무릉의 비경이 나타난다. 용추폭포가 있는 4km의 구간이 무릉계곡이다.

무릉계곡은 고려 시대 문신 이승휴(李承休)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다음해 홀어머니를 뵈러 삼척에 갔다가 몽골의 침략으로 길이 막히자 어머니를 모시면서 전쟁의 참상을 겪었다. 이승휴는 관직에 나갔다가 파직되어 다시 무릉계곡으로 돌아와 1287년 그 유명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썼다. 이 책에는 단군조선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적혀 있다.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무릉계곡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절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선경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신라와 고려·조선 시대는 물론 멀리 단군 시대에까지 무릉계곡은 비경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 무릉계곡 너럭바위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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