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들 옮겨가면 이나라에 무엇 남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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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들 옮겨가면 이나라에 무엇 남을까 두렵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24 1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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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김각중 회장 우려에도, 아들 대에서 베트남으로 공장 이전하는 경방의 사연

 

지금부터 20년쯤 되는 1990년대 중반, 서울 영등포 경방 본사에서 김각중 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섬유산업은 사양길로 들어섰고, 경방 회장실에서 내려다 보면 홍등(紅燈)의 불빛이 휘황찬란했다. 건너편엔 경방필 백화점(타임스퀘어)을 짓고 있었다.

그때 불쑥 치기 어린 생각으로, “이 요지에 아직 이런 낡은 건물을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김 회장은 “아버님이 일으킨 회사이니까, 하고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김 회장은 그후 김대중 정부 시절에 전경련 회장을 역임했고, 2004년엔 자서전을 냈다. 노무현 정부 초기다. 그의 자서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전경련 해체론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거 야단이구나 싶기도 하다. 내가 회장을 역임하면서 회장이 불과 몇 달 사이에 물러나거나 전경련이 툭하면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과할 일이 생겼으니. 그리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다. […]

공장들이 자꾸 해외로 옮겨가고 나면 대체 이 나라에 무엇이 남을까 두렵다. 노사 문제도 무조건 평등 의식만으로는 풀리지 않으며, 그같은 단순한 접근은 공멸의 길을 열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2012년 세상을 떠났고, 경방 그룹은 그의 맏아들 김준 회장이 맡고 있다.

 

▲ 김준 회장 /경방 사이트

김준 회장이 언론에 등장했다. 경방 이사회는 24일 광주공장의 베트남 이전을 결정했다. 그는 “섬유산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년도 최저임금 16.4% 인상이 결정되면서 더 이상 버텨낼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베트남의 인건비는 한국의 10분의 1이다. 이번에 올라간 최저임금 상승폭만큼만 주면 똑같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앞으로 더 올린다고 하니, 늦기 전에 옮겨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전비를 충분히 뽑을 수 있다고 한다.

김준 회장은 한국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대로 가면 폐쇄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공장은 낮은 인건비를 찾아 이전하면 되겠지만, 그는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가슴 아파했다. 김 회장은 인터뷰에서 “평생을 이 일만 해온 분들이 이제 어디서 일을 해야 하나 걱정”이라며 “반도체, 정보기술(IT)산업이 잘 된다고 해서 이분들이 그곳에 가서 일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걱정했다.

한국경제 보도에 따르면 이런 이유로 김종태 면방노조위원장마저 최저임금 인상을 반대하고 있다. 최저임금이 16.4% 오르면 업계 전체에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경제 기사: 김준 경방 회장의 탄식 "공장 아주머니들 일자리는 어디서 찾아야 하나")

 

▲ 경방 광주공장 /경방 홈페이지

 

경방은 1919년 경성방직으로 출발했다. 동아일보 창업자 김성수와 삼양사 창업자 김연수가 ‘우리 옷감은 우리 손으로’라는 이념으로 전국을 돌며 1인1주 공모주 방식으로 자본금을 마련해 세웠다. 설립당시 2만주 모두 한국인이 소유하는 민족기업이다. 일제시대 경성방직은 일본의 방해로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그후 사실상 창업자는 김용완이었다. 그는 1938년 경성방직 지배인으로 취임해 해방후 1946년부터 1970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경방은 1956년 증권거래소가 처음 출범할 때 12개 종목중 하나로 상장됐으며, 회원번호 001이었다. 그만큼 국내 기업의 상징이었고, 1960년대 경제개발 때 섬유산업의 선두주자 역할을 했다.

 

경방은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100년 기업이다. 그러던 경방은 이제 김준 회장의 부친 김각중 전 회장이 걱정하던 상황을 직면했다. 공장을 베트남으로 이전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이 나라는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김준 회장은 한국경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일자리 정부를 표방하며 다양한 정책을 펼치는 것을 높이 평가하지만 산업 전환기에 사양산업에 종사하는 기업인으로서 고충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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