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이 군대 철수에 참여한 덩케르크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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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이 군대 철수에 참여한 덩케르크 작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2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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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참여해 국난극복하는 영국의 애국 스토리

 

1939년 9월 1일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폴란드를 공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2차세계대전이 개막한다.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맹주 3국간의 전쟁은 바로 전개되지 않았다. 1939년은 그럭저럭 지나갔다.

해가 바뀌어 1940년 5월 10일 윈스턴 처칠이 영국 총리에 취임했다. 역사에는 어느 순간에 우연에 의해 진행되기도 한다. 처칠이 총리에 오르던 바로 그날, 히틀러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벨기에를 침공했다.

벨기에는 프랑스와 국경이 접하고 도버해협을 건너면 바로 영국이다. 히틀러의 벨기에 침공은 프랑스와 영국과의 교전을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개전 초기 영국과 프랑스군은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나치의 탱크 군단에 밀려났다.

1주일만에 전세는 결판이 났다. 벨기에는 보름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벨기에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한번도 싸워보지 못하고 바닷가에 고립되었고, 프랑스군은 마지노선이 뚤리고 자기네 국경을 지키기에도 버거웠다.

벨기에 해안으로부터 거대한 반원의 지역에 영국군, 프랑스군, 벨기에군이 갇혀 있었다. 독 안에 든 쥐였다. 독이 깨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덩케르크 작전시 지도 /위키피디아

 

▲ 덩케르크 작전을 지휘한 고트 장군 /위키피디아

여기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5월 26일 히틀러는 무지바헥 진군하던 탱크의 전진을 중단시켰다. 너무 빨리 진군했을 때 당할수 있는 적의 반격, 보급선의 이완 등등이 고려되었는지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히틀러의 불안한 정신상태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때 독일의 괴링은 공군을 앞세워 철수하는 영국군을 괴멸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어찌되었건, 이 틈을 타서 영국군 사령관 고트 경은 영국군을 도버해협 건너 본국으로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영국군 철수작전의 공식명칭은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이다. 벨기에의 항구 이름을 따서 덩케르크(Dunkirk) 철수작전이라고 한다. 6·25 때 미 해병대와 북한 탈출 주민의 철수작전, 즉 흥남철수작전보다 더 한 작전이 벌어진 것이다.

26일과 27일 이틀간 2만8.000명이 철수됐다. 하지만 해안에는 수십만의 군인들이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살아서 돌아간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물은 부족하고 먹을 것조차 모자랐다.

 

▲ 덩케르트 철수에 참여한 민간 선박들 /국방일보

 

이때 처칠은 민간 선박 동원령을 내렸다. 영국 정부의 동원령에 많은 영국인들이 동참했다.

화물선, 유람선, 트롤어선 등등…

영국은 해양 제국이다.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이었다. 선주와 항해사, 산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조국을 위해 나섰다. 병아리 같은 해군의 아들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덩케르크로 나아갔다. 징발 대상에서 제외된 소형선박들도 합류했다. 상류층들이 타는 호화요트도 몰려왔다. 심지어 학교 실습선도 합류해 영국군이 이를 만류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오직 적에 갇혀 있는 조국의 군인들을 살리기 위해.

도버 해협의 배들만 온 것이 아니다. 맨 섬, 글라스고에서도 왔다. 이렇게 해서 모인 민간 선박은 900여척.

 

독일이 민간인이라고 가만 둘리 없었다. 공군을 동원해 전함이건 민간선박이건 무차별로 공격했다.

여기서 행운의 신은 영국에게로 돌아갔다. 철수작전이 전개되던 기간에 날씨가 흐렸다는 사실이다. 도버 해협에 구름이 짙게 드리우면서 독일 공군들이 영국 선박들을 식별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공격이 어려웠다.

게다가 영국 공군의 치열한 방어도 한몫 해냈다. 영국 조종사들은 독일 폭격기를 저지하기 위해 밥 먹던 시간을 아끼며 출격했고, 연료가 바닥날 때까지 싸우며 대학살을 막아냈다. 이 철수 작전에 영국 공군기 177척이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덕분에 영국 민간 선박들은 독일 공군의 공급에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을 실어 나를수 있었다. 이 작전에서 33만8,000명의 병사가 영국으로 철수했다. 이중 프랑스 병사 12만명도 포함된다.

독일군들은 영국에서 온 크고 작은 배들이 군인들을 싣고 떠나는 것을 쳐다보고만 있어야 했다. 일부 장군들은 무리 해서라도 공격할 준비를 했지만, 히틀러는 육군에 대해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여러명의 독일 고급장교은 독일군 최고사령부가 공격명령을 내리는 시기를 늦췄기 때문에 영국원정군을 괴멸시키는 것에 실패한 것을 인정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서부전선에서 벌인 커다란 실수 중 하나였다.

 

덩케르케 철수는 본질적으로 패전의 스토리다. 하지만 처칠 내각과 영국언론들은 이 작전을 미화했다. 특히 덩케르크 작전에 참가한 민간 소형선박의 영웅담은 영국인들의 애국심을 호소하기에 적합했다. 국가가 어려울 때 국민 전체가 참여해서 국난을 극복하는 모습의 스토리였다.

고트 장군의 철수 결심도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만일 우물쭈물 하다가 30여만명의 병력을 모두 잃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수 있었다. 순간적인 판단이 연합군 34만을 구해냈고, 이들은 다시 정비해 독일과의 전선에 투입된다.

 

▲ 덩케르크 철수작전 기념비 /위키피디아

 

이 철수작전을 그린 영화 『덩케르크』가 국내에 상영되고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찍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손을 댔다.

▲ 영화 홍보자료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살리면서 철수 작전 와중에 구출하려는 자와 살려고 발버둥치는 군인들의 치열한 투쟁을 그려냈다. 군인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친다. 죽음이 아른거리는 군인도 목숨 끈을 질기게 부여잡고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초점은 고립된 군인들을 구하는데 쏠려 있다. 군인들 간의 죽고 죽이는 영화는 아니다. 포격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구출하려는 쪽과 구출을 저지하는 쪽의 전투다.

영화는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탈출을 대기하고 있는 덩케르크 바닷가의 육지, 수송과 구출대원들이 움직이는 바다, 구출을 저지하는 독일 공군과 구출대를 엄호하는 영국 공군의 하늘이 배경을 바꾸며 등장한다.

스토리의 또다른 특색은 군인이 조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민간인들이 군인을 구출한다는 것.

메시지는 간결하다.

"우린 끝까지 싸울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 승리다”

 

▲ 영화의 한 장면 /영화사이트
▲ 영화의 한 장면 /영화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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