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벌어진 고려-베트남 유학자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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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벌어진 고려-베트남 유학자 대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1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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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로 맺어진 한-베트남 인연…호치민 목민심서 심취, 양국 사신 교류

 

베트남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호 치 민(Ho Chi Minh, 胡志明)은 젊은 시절에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감명 깊게 읽었다.

▲ 호 치 민 /위키피디아

그는 정약용의 문집에 심취해 정약용 기일에 향불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호 치 민은 목민심서를 47번이나 읽어 나중엔 책이 흐늘흐늘해 졌다고 한다. 베트남을 통일한 후에도 그는 목민심서를 머리맡에 두고 교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호 치 민의 아버지는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도 훈장을 하던 유학자의 딸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에 익숙했고, 중국의 실학은 물론 한국 실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공산주의자로서 남베트남(월남)과 전쟁을 할 때는 손자병법에서 전략전술을 따왔고, 인민에 대한 통치에는 목민심서를 토대로 했다고 한다.

 

베트남과 한국.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던 시절에 두 나라는 남쪽과 북쪽에 멀리 떨어져 교류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두 나라의 역사는 너무나 흡사하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때론 적대적이고, 때론 조공·책봉의 화해관계를 맺어온 것도 같다. 중국의 입장에선 조선이 제1의 번국(藩國), 베트남이 그다음 순서를 차지했다.

베트남과 한국은 유교도 공유하고 있다. 유교는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던 두 나라를 맺는 하나의 매개체였다.

 

① 1회전, 베트남 유학자의 승리…막 딴 찌

 

기록상 가장 먼저 베트남과 한국 역사가 만나는 지점은 고려말이었다. 베트남은 쩐(Tran, 陳)왕조 기간이고, 중국은 몽골(元)이 지배하던 시절이다.

베트남과 고려는 몽골과 기나긴 항전을 벌였다는 데서 공통점을 갖는다. 두 나라 모두 지쳤다. 쿠빌라이(元 세조)가 베트남을 공격할 무렵, 고려는 몽골과 화친을 청했고, 이어 베트남도 평화의 손길을 내밀었다. 두 나라는 원나라에 조공 사절단을 보냈다.

1308년 베트남(대월)과 고려에서 파견한 사절단이 원나라 수도인 연경에서 만났다. 두 사절단은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한자를 공용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필담이 가능했다.

 

▲ 막 딘 찌 동상 /위키피디아

당시 베트남에서 최고의 유학자 막 단 찌(Mac Dinh Chi, 莫挺之)가 연경에 도착했다. 때마침 고려 사절단도 연경에 머물렀다.

원나라 황제는 각국 사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정에서 두 나라 사절에게 한시 실력을 겨루게 했다. (이 이야기는 베트남에서 널리 퍼져 있다. 베트남에서는 이 시합에서 원 황제가 막 단 찌에게 손을 들어주었다고 전한다.)

유교적 전통이 깊은 두 나라 유학자들 사이의 시문 겨루기를 몽고족 출신 황제가 심사했다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실 여부를 떠나 유교 이념에 대한 두 나라의 유별난 취향과 고려에 앞서 베트남에 유학이 유입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있을수 있는 이야기다.

호치민 시에는 막 딘 찌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을 정도로, 그는 베트남 유학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2001년 5월 호치민 탄생 111주년 학술대회에서 베트남의 한 역사학자가 “막 딘 찌가 연경에서 만난 고려 사신의 초청으로 고려 개경을 방문해 부인을 얻고 후손을 두었다는 구전을 소개했다.

이 구전에 따르면 막 딘 찌는 개경에 4개월 머물렀고 고려 사신의 중매로 그의 조카 딸과 결혼했는데, 그녀를 원나라로 데려가서 아들과 딸을 얻었다는 것. 막 딘 찌는 귀국하기 전에 고려를 다시 방문해 처가에 자식들을 맡기고 돌아갔고, 나중에 다시 고려를 방문해 6개월간 머물렀다가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이 기록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베트남의 한 잡지는 1924년 막 딘 찌의 한국 후손이 인삼을 판매한다는 기사를 실은 바 있다. /출처:위키피디아)

 

② 2회전, 조선 유교의 베트남 전파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베트남 사신과의 교류가 잦아졌다.

조선 사신들은 중국에 온 외국 사신들 중 베트남과 가장 많은 교류를 했다. 이항복이 쓴 글에 한(漢)나라의 베트남 지배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쯩짝(徵側) 쯩니(徵貳)의 자매 이야기가 있어 일찍부터 베트남 역사가 조선에 알려져 있었던 듯하다. 또 명나라의 베트남 침공을 두고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서 명나라를 경계하고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1460년(세조 6년) 조선 유학자 서거정(徐居正)이 베트남 레(黎) 왕조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온 양곡(Lương Như Hộc, 梁鵠)을 만났다.

 

『성종실록』 19년 12월 24일자에서 서거정의 죽음을 기록한(卒記) 대목에 그 기사가 있다.

 

사은사(師恩使)로 부경(赴京)하여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국(安南國) 사신 양곡(梁鵠)을 만났는데, 그는 제과 장원(制科壯元) 출신이었다. 서거정이 근체시(近體詩) 한 율(律)로 먼저 지어 주자 양곡이 화답하였는데, 서거정이 곧 연달아 10편(篇)을 지어 수응(酬應)하므로, 양곡이 탄복하기를,

"참으로 천하의 기재(奇才)다." 하였다.

 

1597년(선조 30년) 진위사(陳慰使)로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李睟光)은 베트남 레 왕조에서 온 풍 칵 꽌(馮克寬, Phùng Khắc Khoan)과 만났다. 두 사람은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이나 함께 머물렀다.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이수광은 베트남 사신에게 명 황제에게 바치는 ‘만수경하시집(萬壽慶賀詩集)’의 서문도 써 주었다.

고국에 돌아간 풍 칵 꽌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고려말에 베트남과의 유핵 대결에서 고려가 졌지만,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베트남에 수준 높은 유학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인조실록은 이수광 졸기에 이렇게 정리했다. (인조 6년(1628년) 12월 26일자)

 

그가 중국에 사신갔을 때, 안남(安南, 베트남), 유구(琉球, 독립국 오키나와의 국명), 섬라(暹羅, 태국)의 사신들이 모두 그의 시문을 구해 보고 그 시를 자기들 나라에 유포시키기까지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던 자가 상선을 따라 교지(交趾, 북베트남)에 갔었는데, 교지인이 그의 시를 내 보이면서 "그대는 당신 나라 사람인 이지봉(芝峰은 이수광의 호)이란 이를 아는가?"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도 존중을 받았다.

 

사연인즉, 조완벽(趙完璧)이라는 진주 출신 유생이 정유재란 때 일본 사쓰마(가고시마)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교토 상인에게 팔려간다. 그는 교토 상인을 따라 필리핀, 베트남 등지를 따라 다니다가 베트남 고관이 초대한 연회에 참석한다. 베트남 고관은 조완벽이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책을 하나 꺼내면서 “이 책은 당신네 나라 이지봉(이수광)이 쓴 시인데, 당신은 알겠지요“라고 묻는다. 조완벽은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포로가 되어 이수광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대답하자 베트남 고관이 서운해 하며 그 책자를 보여줬다. 조완벽이 그 책을 보니, 첫머리에 이수광의 시가 실려 있었다. 베트남 고관은 좋은 시 구절에 비점(批點, 붉은 표시)을 찍어 두었는데, 그 대목의 하나는 이렇다.

 

山出異形饒象骨 (산은 이상한 형상으로 솟았으니 코끼리 뼈가 넉넉하고)

地蒸靈氣産龍香 (땅에선 신령한 기운이 피어오르니 용향을 생산하네)

 

베트남 고관은 또다른 책을 꺼내면서 “이 책은 귀국 이지봉이 쓴 책인데, 우리나라 유학생들은 모두 외우고 있다”고 말했다. 조완벽은 베트남 유생들을 만나보니 정말로 이수광의 시를 외우고 있더라고 전한다.

그는 포로로 잡혀갔다가 10년만에 돌아와 이런 사실을 전했다. 조완벽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트남에는 글 읽기를 숭상하여 이곳저곳에 학당이 있어 아이들이 고전을 외우고 시문도 익혔다고 한다.

 

이밖에도 조선 성종 때 사신으로 간 조신(曺伸) 연경에서 베트남 사신 레 티 꺼((Le Thi Cu, 黎時擧)과 시를 주고 받은 일이 어숙권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수록돼 있다.

또 베트남 대학자 레 꾸이 돈(Le Quy Don 黎貴惇)도 유명하다. 그는 1760~1762년 사이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조선 사신 홍계희를 만나 주고받았다는 기록이 베트남에 남아있다.

  

▲ 중국에 온 베트남 사신들의 모습을 조선 사신이 그린 그림. /나무위키

 

③ 유교로 맺어진 한-베트남의 돈독한 관계

 

올해는 베트남과 수교한지 25년주년이 되는 해다. 대한민국과 베트남과의 관계는 1956년 외교관계를 수립했지만, 그 베트남(월남)은 1975년 패망하고, 현재의 베트남(월맹이라 불렀다)과는 1992년 외교관계를 다시 수립했다.

두 나라는 한때 전쟁을 치르는 적대적 관계에 있었지만, 재수교 이후 오랜 역사 과정에서 맺어진 길고 깊은 인연을 이어 오고 있다. 그 인연의 끈은 유교였다.

지금 베트남에는 한국문화(한류)가 인기다. 어쪄면 오래전부터 한국과 베트남 사이를 연결해온 문화의 고리가 다시 연결된 것이라 할수 있다.

수교 25년이 지나면서 한국과 베트남은 서로 '사돈의 나라'로 부른다.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들을 포함해 한국에 체류하는 베트남인은 13만명이나 된다. 국내 체류 외국인 188만명 가운데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다.

결혼 이주민 가운데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 한국 남성의 가족이 가장 평안하다는 얘기가 있다. 두 나라 사이에 유교가 맺어온 문화적 공통점이 가정의 화목을 가져오는 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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