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정은 없다…칼과 종이가 교차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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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은 없다…칼과 종이가 교차하는 곳
  • 김송현 기자
  • 승인 2017.07.15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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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군사들이 칼을 갈고, 私草를 씻어 내던 냇가의 정자

 

1977년 5월 6일자 동아일보는 ‘35년만에 복원된 세검정’ 기사를 실었다.

 

지난 1941년 화재로 손실된 그 자리에 무허가 건물이 난립했던 세검정(洗劍亭)이 종로구 신영동 옛자리에 6일 서울시에 의해 복원돼 38년만에 옛모습을 재현시키게 됐다.

서울시 문화공보실이 작년 11월 2,640만여원의 예산(보상금 460만원)으로 착공, 6개월만에 복원된 세검정은 6평짜리 정자에 J자형 팔작(八作) 지붕을 얹어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렸고, […]

서울시는 이 세검정 자리가 도시계획선에 저촉된데다 무허가 건물이 들어서 있어 무허거 건물 철거와 함께 원위치 확인으로 주초석을 찾아내고 동시에 도시계획선을 변경시킴으로써 제 자리에 옛모습을 그대로 복원했다는 것이다.

 

주소지는 종로구 신영동이다. 홍제천 냇가의 큰 바위 위에 서 있는 작은 정자다. 풍광이 좋아 예로부터 선비들이 세검정 그림을 많이 그렸다.

동아일보의 기사에서처럼 세검정은 1941년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 화재가 나 주춧돌 하나만 남고 불탔다. 그러던 것을 서울시가 예산을 마련해 1977년 복원한 것이다.

멸실된 유적을 아무리 완벽하게 복원해도 문화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보는 정자는 ‘세검정 터’라는 명칭을 부여받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검정은 없는 것이다. 문화재로 대접받지 못하고, 서울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상명대 입구에서 북악터널 쪽으로 5분 가량 올라가면 냇가 큰 바위에 정자가 있다. 북한산에서 흘러나오는 계곡물이 홍제천을 이뤄 내려가면서 경치가 아름답다.

 

세검정은 영조 24년(1948년)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으로 옮겨 도성 방위와 북한산성의 수비를 담당케 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지었다고 한다.

그러면 왜 세검정이라고 했을까. 칼(劍)을 씻는다(洗)는 뜻이다. 광해군 15년(1623) 반정 주도세력이었던 이귀(李貴), 김류(金瑬) 등이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씻었다 하여 정자 이름을 ‘洗劍亭’이라 했다는 얘기가 유력하다.

 

▲ 세검정/ 사진=김인영

 

기록에 따르면 사관들이 역대 왕들의 실록을 완성한 후에 세검정 냇가로 와서 세초(洗草)하였다고 한다. 세초란 실록 편찬에 사용되었던 사초(史草)와 원고들을 없애는 일로, 간혹 불태우기도 했으나 보통은 종이에 먹물로 쓴 원고를 물에 씻어 글씨는 지워버리고 종이는 재활용하였다. 종이가 귀하던 시대였다. 그러한 세초를 굳이 세검정의 개천에서 행한 이유는 이곳에 종이 만드는 일을 담당하던 국가기관인 조지서(造紙署)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이곳 종이공장에서 불이 나 세검정이 탔으니, 종이와 관련이 있는 곳인가 보다.

칼과 종이, 즉 문과 무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겸재 정선은 부채에 세검정을 그렸다. 이 그림에는 주변 산자락이 발을 담그고 있는 계곡물이 너럭바위 사이로 넉넉히 흘러내리고 그 옆 높직하고 널따란 바위 위에 정자 하나가 오롯하게 그려져 있다.

소실된 세검정을 복원할 때 겸재의 그림을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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