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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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를 찾아서] 관련 기록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1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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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신라본기

 

① 지증왕조

 

6년(505년) 봄 2월, 임금이 몸소 나라 안의 주(州)ㆍ군(郡)ㆍ현(縣)을 정했다.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다. 군주(軍主)의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됐다.

(六年 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

13년(512년) 여름 6월, 우산국(于山國)이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했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고 하고, 바로 나무로 사자를 가득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했다.

 

(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飡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則降)

 

② 진흥왕조

 

2년(541년) 봄 3월, 이사부(異斯夫)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병마에 관한 일을 맡게 했다.

 

(二年 春三月 拜異斯夫爲兵部令 掌內外兵馬事)

 

6년(545년)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아뢰어 말했다.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은 것 나쁜 것을 먼 후손에게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역사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임금이 진심으로 그렇다고 여겨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문사들을 널리 모아 역사를 편찬하게 했다.

 

(六年 秋七月 伊飡異斯夫奏曰 國史者 記君臣之善惡 示褒貶於萬代 不有修撰 後代何觀 王深然之 命大阿飡居柒夫等 廣集文士 俾之修撰)

 

11년(550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했다.

 

(十一年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飡異斯夫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甲士一千戍之)

 

23년(562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했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됐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했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임금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했다.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았으나,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했다.

 

(二十三年 秋七月 百濟侵掠邊戶 王出師拒之 殺獲一千餘人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 入栴檀門 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論功 斯多含爲最 王賞以良田及所虜二百口 斯多含三讓 王强之 乃受其生口 放爲良人 田分與戰士 國人美之)

 

 

2) 삼국사기 열전

 

① 이사부조(제44권 열전 제4)

 

이사부(異斯夫)[혹은 태종(苔宗)이라고도 한다.]의 성은 김씨이고, 내물왕(奈勿王)의 4세손이다. 지도로왕(智度路王, 지증왕) 때 변경 관리가 되어 거도(居道)의 계략을 모방하여 말놀이로써 가야(加耶)[혹은 가라(加羅)라고도 한다.]국을 속여서 빼앗았다.

13년(512년) 임진에 그는 하슬라주(阿瑟羅州)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병합하려고 계획했다. 그는 그 나라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위세로 항복받기는 어려우니 꾀로서 항복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나무로 사자의 형상을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으로 가서는 속여 말했다.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즉시 항복했다.

진흥왕(眞興王) 재위 11년인 태보(太寶) 원년(서기 550)에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군사를 출동시킬 것을 명했다. 이사부는 그들을 쳐서 두 성을 빼앗고는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수비하게 했다. 이때 고구려가 병력을 보내 금현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자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하여 크게 승리했다.

 

(異斯夫[或云苔宗]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至十三年壬辰 爲阿瑟羅州軍主 謀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舡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 踏殺之 其人恐懼則降 眞興王在位十一年 太寶元年 百濟拔高句麗道薩城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異斯夫 出兵 擊之取二城 增築留甲士戍之 時 高句麗遣兵來攻金峴城 不克而還 異斯夫追擊之大勝)

 

② 사다함조 (제44권 열전 제4)

 

사다함(斯多含)은 진골 계통으로 내밀왕(奈密王, 내물왕)의 7세손이요, 아버지는 급찬 구리지(仇梨知)이다. 본래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서 풍채가 깨끗하고 준수하며 뜻과 기백이 방정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므로 마지못해 화랑이 됐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는데 사다함은 그들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진흥왕(眞興王)이 이찬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해 가라(加羅)[가야(加耶)라고도 한다.]국을 습격하게 했는데, 이때 사다함은 십오륙 세의 나이로 종군하기를 청했다. 왕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요청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貴幢) 비장(裨將)으로 임명했는데, 그의 낭도로서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국경에 이르자 원수에게 청하여 그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전단량(旃檀梁)[전단량은 성문 이름이다. 가라의 말로 문을 양(梁)이라 한다]으로 들어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놀라 막지 못하므로, 대군이 이 틈을 타서 마침내 가야국을 멸망시켰다.

군대가 돌아오자 왕은 그의 공훈을 책정하여 가라 인구 3백을 사다함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는 받은 즉시 모두 놓아주어 한 명도 남겨두지 않았다. 또 토지를 하사하였는데 굳이 사양하였다. 왕이 강권하니 알천(閼川)에 있는 불모지만을 청할 따름이었다.

사다함은 애초에 무관랑(武官郞)과 생사를 같이하는 벗이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무관이 병들어 죽자 너무 슬프게 울다가 7일 만에 그 역시 죽었다. 그때 나이가 17세였다.

 

(斯多含 系出眞骨 奈密王七世孫也 父仇梨知級飡 本高門華冑 風標淸秀 志氣方正 時人請奉爲花郞 不得已爲之 其徒無慮一千人 盡得其歡心 眞興王命伊飡異斯夫 襲加羅[一作加耶]國 時 斯多含年十五六 請從軍 王以幼少不許 其請勤而志確 遂命爲貴幢裨將 其徒從之者亦衆 及抵其國界 請於元帥 領麾下兵 先入旃檀梁[旃檀梁 城門名 加羅語謂門爲梁云] 其國人 不意兵猝至 驚動不能禦 大兵乘之 遂滅其國 洎師還 王策功 賜加羅人口三百 受已皆放 無一留者 又賜田 固辭 王强之 請賜閼川不毛之地而已 含始與武官郞 約爲死友 及武官病卒 哭之慟甚 七日亦卒 時年十七歲)

 

 

3) 삼국유사

 

지철로왕(智哲老王)조 (제1권 기이 제1)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명주(溟州, 강릉)이다.] 동쪽 바다에 순풍이 불면 이틀만에 이를 수 있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지금은 우릉(羽陵)이라고 한다.]가 있었는데, 섬 둘레가 26,730보였다.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가서 그들을 위협하며 말했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겠다.”

그러자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했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아슬라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又阿瑟羅州[今溟州] 東海中 便風二日程 有于陵島[今作羽陵]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王命伊飡朴伊宗 將兵討之 宗作木偶獅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而降 賞伊宗爲州伯)

 

 

3) 단양신라적성비

 

▨▨年▨月中王教事大衆等喙部伊史夫智伊干

支沙喙部豆弥智干支喙部西夫叱智大阿干

支▨▨夫智大阿干支內禮夫智大阿干支高頭林

城在軍主等喙部比次夫智阿干支沙喙部武力智

阿干支文村幢主沙喙部噵設智及干支勿思伐

城幢主喙部助黑夫智及干支節教事赤城也尔次

▨▨▨▨中作善懷懃力使死人是以後其妻三

▨▨▨▨▨▨▨▨▨▨▨許利之四年小女師文

▨▨▨▨▨▨▨▨▨公兄文村巴下干支

▨▨▨▨▨▨▨▨前者更赤城烟去使之後者公

兄▨▨▨▨▨▨▨▨異葉耶國法中分與雖然伊

▨▨▨▨▨▨▨▨▨子刀只小女烏禮兮撰干支

▨▨▨▨▨▨▨▨使法赤城佃舍法爲之別官賜

▨▨▨▨▨弗兮女道豆只女悅利巴小子刀羅兮

▨▨▨▨▨合五人之別教自此後國中如也尒次

▨▨▨▨▨▨懷懃力使人事若其生子女子年少

▨▨▨▨▨▨▨兄弟耶如此白者大人耶小人耶

▨▨▨▨▨道使本彼部棄弗耽郝失利大舍文

村幢主使人▨▨▨▨勿思伐城幢主使人那利村

▨第次▨▨▨▨▨人勿支次阿尺書人喙部

▨▨▨▨▨▨▨使人石書立人非今皆里村

道使▨▨▨▨▨智大烏之

 

 

4) 일본서기

 

卷17 繼體天皇23년

이달(계체천황 23년 3월)에 使臣을 보내 己能末多干岐를 바래다주었다. 아울러 任那에 있는 近江 毛野臣에게 詔勅을 내리기를 ‘(任羅)가) 上奏한 바를 잘 물어서, 서로 의심하는 것을 화해시키라’고 하였다. 이에 毛野臣은 熊川(창원시 웅천)에 머물면서(一本에는 임나 久斯牟羅(마산)에 머물렀다고 한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을 불렀다.

(중략: 신라는 1등 대신인 久遲布禮(거칠부라)를, 백제에서는 은솔 彌騰利를 보냈다. 왕이 오지 않자, 모야신은 두 사신을 꾸짓어 쫓아 보냈다.)

이로 인해 신라는 다시 上臣 伊叱夫禮智干岐(신라에서는 大臣을 上臣이라고 한다. 一本에는 伊叱夫禮智奈末이라고 하였다)를 보내 무리 3千을 이끌고 와서 詔勅듣기를 청했다. 毛野臣은 멀리서 兵仗에 둘러싸여 있는 무리 수천 명을 보고 熊川에서 임나 己叱己利城에 들어갔다. 이질부례지간기가 多多羅原에 머물면서 삼가 歸服하지 않고 석 달을 기다리며 자주 조칙을 듣고자 청하였으나 끝내 전하지 않았다. 이질부례지가 거느린 사졸들이 취락에서 밥을 구걸하다가 毛野臣의 從者河內馬飼首御狩와 서로 마주치게 됐다. 御狩는 다른 문으로 들어가 숨어 있다가 그 구걸하던 자가지나가기를 기다려 주먹으로 쳤다. 구걸하던 자가 보고, ‘삼가 석 달 동안 칙서의 내용을 들으려고 기다렸으나 아직 전해주지 않고, 칙명을 듣고자 하는 사신을 놀리고 있다. 이제 (그들이) 上臣을 기만하여 죽이려는 것임을 알겠다’고 했다

이에 자기가 본 것을 상신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했더니, 상신이 4개의 촌(金官․背伐․安多․委陀가 4개 촌이다. 一本에는 多多羅․須那羅․和多․費智를 4개 촌이라 했다)을 抄掠하고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다다라 등 4촌이 초략당한 것은 毛野臣의 잘못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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