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신이 된 이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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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를 찾아서] 신이 된 이사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1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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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에는 이사부의 딸 숙명이 아버지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존경심은 끔찍할 정도였다. 『화랑세기』 12대 보리공조에 숙명이 아들 보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숙명공주가) 한번은 (보리공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 태종 각간은 곧 너의 할아버지다. 하늘도 높다 않고 땅도 넓다 않는 대영웅이다. 너는 마땅히 신으로 받들어야 한다.”

 

이사부의 가문에서 후손들은 그를 신으로 격상시켜 우러러 보았다고 한다. 국토를 확장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영웅을 넘어 신으로 격상시켰다. 이사부는 부인인 지소태후에겐 존경의 대상으로, 딸은 숙명과 손주에겐 신으로 떠받들어진 것이다. 아마 숙명이 아들 보리에게 훈계한 시점엔 이사부가 이 세상을 하직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사부가 죽은 해는 진흥왕 말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엔 진지왕 원년(576년)에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으로 삼았고, 진평왕 2년 (580년)에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으로 삼았는 기록이 있다. 진지왕이 즉위한 해에 당시 실세였던 거칠부의 나이가 78세다. 그런 실세를 고령의 나이에 최고 관직인 상대등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진흥왕 말기까지 상대등에 버금가는 상징적 인물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이사부였을 것이다.

진평왕때 신임 병부령을 임명한 사실을 두고 그 직전까지 이사부가 살아있지 않았을까 하는 관측도 있지만, 진흥왕 5년(서기 544년)에 병부령을 1명 증원했다는 기록(『삼국사기』 「잡지」)이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적다. 그렇다면 이사부가 죽은해는 그의 마지막 기록이 나오는 562년(대가야 정벌)에서 진흥왕 마직막해인 576년 사이가 된다. 70대 후반 또는 90대초가 된다.

『삼국사기』 진흥왕조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있다.

 

“진흥왕 33년(572년) 10월 20일, 전쟁에서 죽은 장수와 병졸들을 위하여 왕성 밖의 절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열어 7일 만에 마쳤다.”

 

팔관회는 진흥왕 때 개최한 이래 고려에 이어진 일종의 종교행사로, 10월에 열렸다. 산천용신제(山川龍神祭)와 제천행사 등 토속행사와 불교의식과 결합해 종교의식으로 단일화, 대형화한 축제였다. 신라시대엔 팔관회가 전쟁터에서 죽은 영웅호걸과 병졸에 대한 위령제 역할도 했다.

진흥왕은 오랜 영토확장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죽은 장수와 병졸들을 위해 팔관연회를 열어 7일간의 장례행사를 치른다. 이때 거칠부, 김무력과 무력의 형인 세종은 살아있었다. 그렇다면 지증, 법흥, 진흥왕 3대에 걸쳐 신라의 국토 확장을 위해 최고의 공로를 세운 장수가 세상을 떠났고, 그를 애도하는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을 것이다. 그 장수는 다름 아닌 이사부였음이 분명하다. 이때 이사부의 나이는 실직에 갈 때 나이를 20세로 볼 때 87세가 된다.

3대 임금에 걸쳐 최고 어른 역할을 했던 이사부가 죽고 나서 최고관직인 상대등을 임명했다고 보면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신라는 상대등 제도를 만든 초기에 종신직으로 운영했다. 상대등은 항시 두는 관직이 아니고, 상대등이 없을때도 있었다.

이사부가 마지막 기록인 대가야 정벌시, 이찬으로 2등급 관직에 있었지만, 진흥왕 조엔 사실상 상대등에 비견되는 재상의 역할을 했고, 그가 죽은 후에야 거칠부를 새로운 상대등을 임명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사부가 노년에 들었던 진흥왕 때는 상대등이 임명된 기록이 없다. 이사부가 최고의 권력자였고, 2인자 격인 거칠부도 상대등에 임명된 것은 진흥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진지왕 원년이(서기 576년)었다. 이사부 다음의 실세 거칠부는 상대등에 오른 직후 곧바로 노령으로 사망했다.

 

▲ /삼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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