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모어 『유토피아』는 없다…모순투성이 이상론
상태바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는 없다…모순투성이 이상론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10 14: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행 자유 제한, 가족제도 무시한 통제사회, 식민지 건설 및 노예제 정당화

 

정답을 알고 났을 때 문제를 답하기는 쉽다. 결과를 알았을 때 그 과정에 대해 ‘그건 아니쟎아’, ‘그 생각은 틀렸어’라고 쉽게 대답할수 있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Utopia)도 그런 부류의 책이다. 그가 이 책을 출간한 때는 1516년,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시기에 봉건적 질서가 완강하게 버티고, 군주의 절대정치가 횡행하던 때다. 요즘 용어로 하면 패러다임 시프트(paradime shift)의 시기이자, 변혁의 시기였다.

그가 주장한 유토피아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일 뿐, 현실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세계다. 우리는 지난 세기에 그것을 경험했고 목격했다. 소련 공산주의가 가져온 결과는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류에게 분명히 가르쳤다.

 

토머스 모어의 출발점은 인간의 탐욕이다. 탐욕은 사유재산에서 나왔고, 사유재산을 없앤 사회, 즉 유토피아라는 이상 사회를 그려낸 것이다.

『유토피아』는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권에서는 당시 유럽 사회와 영국 사회에 널리 퍼진 부정과 부패를 비판했고, 2권에선 그 대안으로 유토피아를 그렸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토마스 모어가 이 책을 저술하면서 만든 단어다. Utopia란 말은 ‘no-man’s land‘. 즉 ‘실재하지 않는 땅’ 또는 ‘어디에도 없다’ 이라는 뜻이다. 형식적으로는 토마스 모어가 라파엘 히들로디 (Raphael Hythloday)와의 대화에서 기록한 것으로 했다.

대화의 중심인물인 라파엘은 늙은 선원이다. 모어는 친구인 피터 자일스(Peter Giles)를 만나려고 브뤼셀(당시는 네덜란드령)에 잠시 머무르게 되는데, 그 동안에 자일스의 지인인 나이 많고 경험많은 현명한, 철학자 이자 탐험가이며 동시에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의 항해동지인 라파엘을 만나게 된다. 모어와 자일스, 라파엘은 대화를 하게 된다. 이때 라파엘이 현실 비판과 동시에 그가 경험한 유토피아를 설명한다.

 

▲ 1595년 삽화 /위키피디아

 

1권- 현실의 비판

 

제1권에서는 라파엘의 입을 통해 모어는 현실에 대한 비판 네가지를 정리한다.

① 영국 정부의 과도한 엄벌주의에 대한 비판

절도에 대한 처벌이 너무나 가혹하고, 효과가 거의 없다. 극형에도 절도는 더욱 늘어나는데, 차라리 절도범에 대해 노동형이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② 거지, 부랑자, 도적이 증가하는 원인에 대한 비판

이 현상(엔클로저 운동)은 농촌에서 봉건 제도가 몰락하고 농노가 추방된 탓이다. 이에 대해 모어는 “양이 사람을 먹어치운다”는 말을 하며 농장과 농촌을 회복시키는 법을 만들고, 부자들의 매점과 독점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③ 과도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

빈곤한 노동자의 불안한 생활은 지주와 상인 그리고 절대왕정에 기생하는 자들의 게으르고 사치스런 생활에 기인한다. 이런 사회적 불의는 부자들에 의해 법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고 비판한다.

④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의의 원인

모어는 화폐에 대한 욕망, 화폐의 사용, 그리고 사유재산제도에서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을 찾는다. 결국 모든 사회문제가 사유재산제에서 나오므로, 이를 철폐해 공동소유제로 바꾸지 않는 한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현재 세계에 퍼져 있는 사회제도를 생각할 때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만, 부자들이 사회조직이라는 구성 하에 자기네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있는 음모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할수 없습니다. 부자들은 첫째로 부정하게 획득한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둘째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가능한 한 싸게 사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해서 온갖 사기와 간계를 고안해 냅니다.

 

나는 사유재산을 전적으로 폐지하지 않는 한 귀하는 결코 공평한 재산의 분배나 인간 생활의 만족스러운 조직을 실현시킬 수는 없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사유재산이 존속하는 한, 인류의 대부분의 사람들 즉, 이 탁월한 사람들은 가난과 고난, 고뇌라는 짐을 지고 고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그러나 귀하는 결코 그들의 어깨에서 이 짐을 내려 놓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 1516년 초판 /위키피디아

 

2권 - 유토피아의 제도와 생활

 

제2권에서는 유토피아 제도와 생활을 기술하고 있다.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시점의 유럽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흥미롭다.

유토피아는 플라톤이 설정한 공화국과 유사하며, 전 시민이 교대로 농업에 종사한다. 공무원으로 선정된 지식계급은 제외된다. 노동시간은 6시간이며 여가 시간은 수양에 충당된다. 6시간으로써는 충분한 생산물이 산출되는 근거로, 대단히 많은 기식자(寄食者), 귀족·지주도 일하고, 사치품과 같은 불필요한 제품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을 든다.

유토피아는 공동소유의 사회다. 공동소유제는 돈을 쓰지 않으며 금욕적인 무소유를 특징으로 한다. 이런 점에서 모어의 『유토피아』는 현실성이 없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이렇게 그리고 있다.

 

유토피아에서 모든 것이 공공소유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 창고가 가득차 있는 한, 결핍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나 공정한 분배를 받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나 거지가 있을수 없습니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으나, 누구를 막론하고 부자인 것입니다. … 따라서 유토피아인들은 그나 그의 아내나, 그의 자식, 손자, 증손재, 고손자, … 자손이 번창한 집안에서 바라는 대로 대가 이어지더라도 항상 먹을 것이 충분하며, 언제나 행복할 것임을 확신할수 있는 것입니다.

 

유토피아는 54개 자치도시로 구성되고, 주민이 뽑은 대표로 정치를 하는 민주주의 체제다. 각 도시에는 주민이 뽑는 시장이 있다.

경제기반은 공동소유제의 농업이다. 개별 농장에는 40명 미만이 살고, 농촌에서 2년을 살고 나면 도시로 돌아간다. 매년 농촌에서 20명씩 돌아오는 대신 도시에서 20명이 농촌으로 간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모든 사람이 노동을 하므로 노동시간이 오전과 오후에 3시간씩 모두 6시간이다. 8시간 수면을 취하며, 나머지 시간에는 자유로이 행동한다. 자유시간은 주로 지적 추구에 사용된다.

유토피아에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된다. 그 속에서의 삶도 자유롭다. 도시의 집은 사유가 아니므로 누구나 드나들 수 있고, 10년마다 집을 서로 바꾸며, 사람들은 정원 가꾸기를 즐긴다. 그들은 식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일을 공동으로 하며 허식과 사치를 배척한다.

유토피아는 또 반전 평화주의이다. 모든 전쟁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한다. 다만 정의를 위한 전쟁은 참여한다는 점에 주목된다.

 

유토피아의 문제점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첫째, 가족을 통제하고 여행을 제한한다.

 

여행 증명서 없이 나갔다가 자기 구역 밖에서 잡히면 그는 망신을 당하고 집으로 송환되며 탈주자로서 엄중한 처벌을 받습니다. 한번 더 위반하면 그 처벌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각 도시는 농촌을 제외하고 6천 세대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리고 인구를 가능한 고정시키기 위해 ‘어떠한 가정도 어른은 열명 이상 열여섯명 이하여야 한다’ - 어린애의 수는 정확히 확정할 수가 없으므로 - 는 법률이 있습니다. 어른이 초과하는 경우에는 모자라는 가정으로 이주시켜 이 법을 준수합니다. 도시 전체의 인구가 팽창하면 초과인구를 비교적 인구가 적은 도시로 이주시킵니다. 섬 전체 인구가 초과하면 각 도시의 일정한 국민에게 도시를 떠나 대륙의 가장 가까운 곳 - 원주민에 의해 개발되지 않은 광대한 지역이 남아 있습니다 - 에 식민지를 세울 것을 명령합니다.

 

식민지 건설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있다. 결국 유토피아인들을 위한 또다른 착취구조를 인정한 셈이다.

 

이러한 식민지는 유토피아인들이 지배하지만 원주민들읁 그들이 원하면 함께 살수 있습니다. 유토피아인들과 원주민이 함게 살게 될 때에는, 원주민과 식민지 개척자는 곧 단일한 생활방식을 가진 단일 사회를 형성하여 양측에 대단히 유리하게 될 것입니다. 유토피아의 방식을 채용하면 한 민족에게 필요한 것도 생산하지 못하리라고 생각되었던 토지에서 두 민족이 쓰고도 남을 만큼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원주민이 유토피아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그들은 병합된 지역 밖으로 축출됩니다. 만일 그들이 저항하려고 하면 유토피아인들은 전쟁을 선언합니다.

 

노예도 인정하고 있다. 죄수들을 노예화한다는 발상이지만, 노동력이 부족할 경우 외국 노예도 자발적이라는 전제하에 받아들인다.

 

노예는 여러분이 상상하시듯이, 비전투원인 전쟁 포로도 아니고, 세습적인 노예도 아니며, 외국 노예시장에서 사들인 자들도 아닙니다. 노예들은 유토피아의 죄수들이거나 또는 외국의 사형수들 -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입니다. 그들은 보통은 값을 치르지 않으나 때로는 약간의 지불을 하고 사형수들을 대량으로 획득합니다. 이 두가지 유형의 노예들은 사슬에 묶여 중노동을 하며, 유토피아인들은 외국인보다 더 나쁜 대우를 받습니다. …

또다른 유형의 노예는 외국의 노동자들인데, 그들은 본국에서 가난에 찌들며 살기보다는 오히려 유토피아의 노예가 되기를 지원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에 익숙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유토피아 시민들과 거의 같은 친절한 대우와 존중을 받습니다. 그들이 유토피아를 떠나기를 원할 때에는 - 흔히 있는 일은 아닙니다만 - 완전히 자유롭게 떠날 수 있으며 약간의 사례금을 받습니다.

 

토머스 모어는?

 

토머스 모어(Sir Thomas More, 1478. 2. 7~1535. 7. 6.)는 영국의 법률가, 사상가, 정치가이자 인문주의자였다.

▲ 토머스 모어(1478~1535) / 위키피디아

법률가 존 모어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캔터베리 대주교 존 모턴을 섬겼고,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요구로 중퇴하고, 법률가가 되기 위해 링컨 법학원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에 대륙의 르네상스 문화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에라스무스와 친교를 맺었다. 에라스무스는 모어의 집에 머물면서 『우신예찬』(愚神禮讚)을 저술했다. 법학원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고, 의회에서도 의석을 차지했다.

1515년에는 통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건너가, 외교교섭을 벌였다. 그 때 해외출장 중에 이상적 국가를 그린 『유토피아』를 저술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귀국해 완성했다.

그는 탁월한 수완과 식견으로 헨리 8세의 신임을 얻어 1529년에는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헨리 8세의 이혼에 끝내 동의하지 않고 1532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34년 반역죄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1535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1935년, 로마 교황은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내렸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