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화랑세기③…풍월주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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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를 찾아서] 화랑세기③…풍월주 가문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0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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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아들, 손주, 외손주가 풍월주…며느리 미실을 통한 풍월주들과의 풍문등

 

이사부의 며느리인 미실을 중심으로 보면 2대 미진부는 아버지, 6세 세종은 남편, 4세 사다함과 7세 설원랑은 정을 통한 남정네, 10세 미생랑은 동생, 11세 하종은 아들, 12세 보리는 조카다. 1대 위화랑도 미실에게는 외가로 증조부 격이다.

 

이사부의 딸 숙명공주는 아버지 이사부와 어머니 지소태후의 권력을 등에 업고 진흥왕에게 접근해 태자를 얻었지만, 왕비인 사도의 견제를 받는다.

『화랑세기』 4세 풍월주 이화랑(二花郞) 조의 내용이다.

 

“지소태후가 매우 사랑했다. 황화, 숙명 송화공주가 모두 공(이화랑)을 따라 배웠다. 공은 이에 숙명궁주와 정을 통했다.

그 때 태후는 (숙명이) 진흥제의 총애를 홀로 받게 하고자, 모든 일을 숙명공주에게 받들게 했는데, 왕은 ‘어머니가 같은 누이’(胞妹)라고 하여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 공주 또한 그러했다. 공주의 아버지는 곧 태종공(이사부)인데, 그때 상상(上相)으로서 나라를 위한 가장 중요한 신하였다. 그래서 왕은 공주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숙명)공주는 총애를 믿고 스스로 방탕했다. 태자를 낳고 황후로 봉해지자 더욱 꺼림이 없었다. 왕은 평소에 사도(思道)황후를 사랑하여 그 아들 동륜을 태자로 삼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화랑세기』

 

진흥왕은 숙명을 일러 ‘어머니가 같은 누이’이므로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숙명의 아버지이자 새아버지(繼父)인 이사부에 대한 위엄에 눌려 마지못해 숙명과 잠자리를 했고 황후로 봉하고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을 태자로 삼아야 했다.

한편 사랑하는 또다른 아내 사도황후가 낳은 동륜을 태자로 삼지 못했다는 진흥왕의 서글픈 사연이다. 진흥왕이 어머니인 지소태후보다는 최고권력자인 상상 이사부의 눈치를 보며 숙명과 관계를 맺었다는 얘기다.

숙명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다는 얘기는 삼국사기에서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동복이부(同腹異父) 간인 진흥왕도 숙명의 콧대를 꺾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숙명에게도 위기가 닥쳐왔다. 바람을 핀 것이다. 숙명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진흥을 떠나 이화랑에게 접근한다.

 

“숙명은 공(이화랑)과 더불어 정을 통함이 더욱 심해졌고, 여러번 왕에게 들켰다. 왕이 (숙명황후)를 폐하려 하자, (지소)태후가 울면서 간하여 이룰수 없었다. 왕이 숙명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숙명은 스스로 임신했다. 이에 공(이화랑)과 더불어 도망쳤다. 군신들이 태자가 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의심을 했다. 이에 (사도황후의 아들인) 동륜을 태자로 삼았다.” 『화랑세기』

 

사도황후의 아들 동륜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태자 자리에 오르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도 숙명 때문이었다. 아니, 진흥왕은 최고권력자 상상(上相)의 자리에 올라 있는 이사부의 영향력을 밀어내고 사도황후의 아들 동륜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어려웠다. (동륜은 개에게 물려죽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화랑세기』는 서술했다.)

숙명이 이화랑과 바람을 피워 신료들이 숙명이 낳은 태자의 아버지를 의심하게 되자, 이사부도 외손주의 태자자리를 더 이상 주장할수 없었다.

나중에 숙명은 진흥왕의 허락을 받아 이화랑과 결혼한다. 숙명의 연적인 사도의 권유가 있었다고는 하나, 집안의 평화를 원하는 어머니 지소의 입김으로 진흥왕이 숙명의 외도를 승낙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화랑과 결혼해 원광(圓光)과 보리를 낳았다. 원광은 신라 불교를 반석에 올린 사람이며, 이사부는 원광에게 외할아버지가 된다. 보리는 12세 풍월주가 됐다.

지소태후와 딸 숙명은 비슷한 길을 걷는다. 지소는 입종갈문왕과 진흥왕을 낳은후 사별하고 영실을 거쳐 최고 권력자 이사부와 결혼하고, 숙명은 진흥왕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지만, 사랑을 찾아 당대 사내중의 사내 이화랑과 다시 결혼한다.

 

풍월주 가문

 

『화랑세기』에 나오는 풍월주 가운데, 이사부의 가계를 보면 4세 풍월주 이화랑이 딸 숙명의 남편, 즉 사위이고, 6세 세종은 아들, 11세 하종은 손주, 12세 보리공은 외손주로 4명의 풍월주가 등장한다.

이사부의 며느리인 미실을 중심으로 보면 2대 미진부는 아버지, 6세 세종은 남편, 4세 사다함과 7세 설원랑은 정을 통한 남정네, 10세 미생랑은 동생, 11세 하종은 아들, 12세 보리는 조카다. 1대 위화랑도 미실에게는 외가로 증조부 격이다.

미실이라는 요부가 여러 풍월주들을 흔들어 놓았다. 아울러 진흥왕 시절에 이사부와 부인 지소, 그리고 며느리 미실은 막강한 권력 구조를 형성하고, 서라벌 왕궁은 물론 화랑제도를 좌지우지했다고 『화랑세기』는 전한다.

『화랑세기』에서 지소태후와 미실궁주의 중심에 서 있는 이사부(태종)의 지위는 상상(上相) 또는 각간(角干)으로 표현된다. 삼국사기에서 이사부가 진흥왕 시절에도 지증왕 때 받은 2위 등급인 이찬(伊飡)으로 이어지는 것과 차이가 있다.

이사부는 진흥왕 초기에 병부령을 맡아 권력자로 부상한다. 지소태후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어린 진흥왕을 보좌하며 최고 권신으로 신라를 이끌어갔음을 『화랑세기』는 전하고 있다.

 

화랑세기 위작론

 

『화랑세기』는 김대문(金大問)이 경덕왕 시절(서기 702년~737년)에 지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김대문은 전기(傳記) 몇권을 지었는데, 이중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郎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는 아직 남아있다”고 했다. 김부식이 1145년 국왕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할 무렵에는 『화랑세기』를 볼수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김부식은 『화랑세기』가 전하는 내용을 삼국사기에 옮겨적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학자의 입장에서 지금 필사본으로 전하는 비윤리적인 내용을 차마 사서에 기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 화랑세기 필사본 /유튜브 캡쳐

안타깝게도 그후 8백여년간 『화랑세기』는 사라졌다. 그러다가 1989년 부산의 한 가정집에서 필사본 『화랑세기』가 발견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필사본의 내용이 워낙 파격적이어서 진위 논쟁이 벌어졌다. 1995년엔 두 번째 『화랑세기』 필사본도 부산의 같은 집에서 공개됐다. 『화랑세기』 위작논쟁이 한층 가열됐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려인이 쓴 신라 이야기인데 비해 『화랑세기』는 신라인이 쓴 신라의 얘기다. 필사본 『화랑세기』를 진짜로 믿는 학자들은 신라의 역사를 450년 이상 앞당길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주장하고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 두 필사본은 한사람이 작성한 것이며, 1995년 공개분이 모본(母本)이고, 1989년의 것은 발췌본(拔萃本)이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다.

두 종류의 『화랑세기』 필사본을 쓴 사람은 남명 박창화(朴昌和라)는 인물로 밝혀졌다.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39~1944년 사이에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우연히 『화랑세기』를 발견하고 그대로 필사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하고 필사본이 세상에 나왔고, 죽기 전에 이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남겨놓지 않았다고 한다.

필사본 『화랑세기』 진위 논쟁은 자료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시작돼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필사본을 믿는 쪽은 “박창화가 원본을 충실히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반대의 입장에서는 “박창화의 개인 작품, 곧 위작”이라고 반박한다.

진위 논쟁을 풀 열쇠는 일본 궁내성에서 『화랑세기』 원작을 발견하는 것이지만, 최근까지 박창화가 베꼈다는 원본을 찾는 작업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또다시 사라진 것인지, 일본이 한국 문화유산을 빼앗다는 것을 감추고 싶어 내주지 않는 것인지, 알길이 없다. 하지만 원본이 나오지 않는 한 위작 논쟁은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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