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화랑세기②…며느리 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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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를 찾아서] 화랑세기②…며느리 미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7.0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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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에서 이사부는 미실을 아들 세종의 부인으로 맞는다

 

세종은 이사부의 아들이기도 하거니와, 지소태후를 중심으로 볼 때 왕가의 혈통이었다. 『화랑세기』는 정비(正妃)가 아닌 후궁 소생이거나 정비가 정식 남편이 왕 아닌 다른 남자와 낳은 왕자에 대해 ‘전군(殿君)’이라는 표현을 썼다. 따라서 이사부의 아들 세종은 전군으로 왕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화랑세기』에 전하는 일화를 소개한다.

 

“태종공(이사부)이 일찍이 일이 있어 사사로이 제(帝, 진흥왕)를 찾아볼 때 공(세종공)이 시측했다. 태종공은 제(帝)에게 먼저 절하고(先拜)하고 (세종)공에게 다음 절(次拜)했다. 세종공은 황망하여 나아가 (이사부를) 부축하며 감히 절을 받지 않았다.

제(帝)가 말하기를 “이 어른은 중신이기는 하나, 나의 신하이다. 몸으로 너에게는 절하지 않을수 없다”고 했다. 세종이 울며 말하기를 “아버지입니다. 어찌 신으로 삼을수 있겠습니까. 덕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라고 아뢰었다.

이에 이사부가 놀라 말하기를 “태후(지소부인)는 신성하여 지아비 없이도 전군을 신화(神化)할수 있다. 전군은 신자(神子)이다. 어찌 감히 신하가 아버지가 되겠는가”라 했다.

(세종은) 아버지(이사부)를 안고 울며 말하기를 “일찌기 모후가 나의 아버지라고 하신 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진흥제는 “태후의 신성과 예덕으로 중신을 총애함으로써 (오늘의) 내가 있으니, 집안의 경사로구나. 공은 나의 아우이지만, (이사부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라”고 허락했다. 이에 세종공은 처음으로 부자의 상견례를 갖고 왕의 은혜가 끝이 없음을 감사했다.“

 

이 스토리는 이사부와 세종 사이의 부자의 도와 왕족과 군신간의 예에 관한 대화다. 아들 세종은 아버지로서 예의를 갖추려 했고, 진흥 임금은 세종에게 왕족으로의 체면을 유지하라고 했지만, 중신인 이사부에게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다고 허락한다는 요지다.

이 대화를 『삼국사기』 연대표를 놓고 볼 때 진흥왕의 친정체제가 수립된 서기 551년 이후의 일일 것이다. 진흥왕이 한강 하류 북한산 일대까지 영토를 넓힌 이후에도 이사부는 중신으로서의 예우를 받고 있었다는 얘기다.

지소태후가 이사부의 첫 번째 부인일까. 진흥왕 원년에 이사부의 나이는 50대 후반이다. 이사부가 그 나이까지 결혼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첫째 부인이 있었고, 그 부인과의 사이에 자식이 있었을 터이다. 『화랑세기』는 지소태후 이전의 이사부 가정사에 대한 설명이 없다.

 

며느리 미실

 

이사부는 지소태후와의 사이에 숙명과 세종을 낳는다. 『화랑세기』엔 세종의 가족계통(世係)를 설명하면서 세종에 앞서 숙명을 언급해, 숙명이 세종의 누나임을 암시했다.

아들 세종은 『화랑세기』에서 그 유명한 미실(美室)과 결혼한다. 부인 지소가 미실을 며느리로 삼기 앞서 지아비인 이사부에 그 의향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화로 이사부와 지소 사이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지소태후는 공경(公卿)의 미녀들을 택해 궁중에 모아두고 세종공이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지를 보았다. 공은 미실낭주를 가장 좋아했다.

태후는 진흥제(帝)에게 묻기를 “미실의 아름다운데, 전군(세종)에게 맞을 것 같습니까”라고 했다. 제(帝) 또한 아름답게 여겨 “오직 어머니가 정할 바 입니다만, 태종(苔宗, 이사부) 노신이 알지 못해서...”라고 했다.

이에 태후는 태종을 불렀다. 미실에 관해 의논하며, “며느리를 얻는 데 지아비에게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폐하의 집안일을 어찌 감히 말씀 드리겠습니까”라고 했다. 태후가 “이 처녀는 곧 영실(英失)의 손입니다. 나의 우군(右君)으로 영실은 나에게 잘못이 많았기에 꺼렸습니다. 그리하여 좋아하지 않게 되어 결정하기 어려운 바 되어 묻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영실은 지소태후의 전남편이며, 진흥왕에게는 계부(繼父)가 된다.

이사부가 “영실은 (법흥의) 총신입니다. 유명(遺命)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전군(세종)이 이미 좋아한다면 또한 황후 사도를 위로할 수 있으니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여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잘못할 뻔 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미실로 하여금 궁에 들어오게 했다.”

 

지소태후가 전남편의 손녀딸을 며느리로 데려오는 문제를 남편 이사부와 의논하는 장면이다. 이때는 진흥왕이 임금이었다. 이사부의 아들인 세종은 진흥왕의 동복(同腹) 동생이었으므로, 궁에 거주했고, 지소태후는 먼저 미실을 며느리로 들일지 여부를 아들인 진흥왕과 의논한후 지아비와 의논한다.

전남편의 손주 딸을 며느리로 삼는데 지아비에게 미안함이 있기에 지소태후는 골품으로는 신하이지만 지아비인 이사부에게 공손하게 물어본다. 지소로선 지아비에게 존경하는 말투이고, 이사부는 전후 사정을 들어 냉정하고 침착하게 결정하라고 권했다. 태후는 그의 조언을 고맙게 받아들인다.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라고까지 표현하는 지소부인의 태종에 대한 태도를 보라. 아버지의 명령으로 재혼한 영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를 이어 남편이 되었을 이사부에게는 깍듯하기까지 하다. 이사부가 가정사에서도 그릇이 컸다.

『화랑세기』는 화랑의 우두머리 풍월주(風月主) 시대(540~681)를 서술한다. 1세 풍월주 위화랑(魏花郞)에서 32세 신공(信功)까지의 기간은 진흥왕 원년에서 문무왕 말년까지 일곱 임금을 거친다. 32명의 풍월주 중심으로 인간관계와 여성과의 스캔들을 다뤘기 때문에 이사부에 관한 기록도 그의 사위인 4대 풍월주 이화랑, 아들인 6대 풍월주 세종, 손주인 11대 풍월주 하종 등에 띄엄띄엄 나온다.

 

▲ KBS 사극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 분) /KBS

 

색공지신

 

『화랑세기』는 이사부의 며느리인 미실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화랑세기』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미실이며, 미실을 주제로 한 김별아의 소설 『미실』이 출간돼 있다.)

미실은 이사부의 며느리로 들어와 곧바로 쫒겨 난다. 남편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고 색사만 일삼다가 시어머니의 미움을 산 것이다.

“지소태후는 미실을 (며느리로) 불러들인 것을 후회했다. 이에 미실을 불러 꾸짓기를 “너로 하여 전군(세종)을 받들게 한 것은 단지 옷을 드리고 음식을 받드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사사로이 색사(色事)로 전군을 어지렵혔으니, 죄를 용서할수 없다”고 하고 출궁을 명했다.“ 『화랑세기』

지소태후는 미실을 쫓아내고 진종전군의 딸 융명을 정비로 삼았다. 미실은 궁에서 나가 제5세 풍월주 사다함과 사랑에 빠진다. 사다함이 이사부를 따라 대가야 전투에 참전한 후 지소태후는 상심한 세종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미실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인다.

 

“전군(세종)은 기뻐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지소태후는 마지못해 (미실로 하여금 세종을) 섬기도록 명했다. 이에 전군은 태후에게 청해 미실을 전군부인으로 삼고 융명을 차비(次妃)로 삼았다. 융명이 불만으로 여겨 물러나 살 뜻을 비쳤다. 미실은 전군과 더불어 정을 배반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융명을 내쫓았다.

다함이 돌아왔을 때 미실은 이미 궁중에 들어가 전군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까닭에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슬퍼했다.“ 『화랑세기』

 

미실은 남자를 쥐락펴락했다. 시어머니에게 쫓겨나 출궁한후 사다함과 사귀다가 궁으로 다시 돌아와선 세종의 본처를 내쫓고 들어앉았고, 사다함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사다함이 지었다는 청조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 되리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 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미실궁주(宮主)는 진흥왕 중기부터 진평왕 초기까지 40년에 걸쳐 빼어난 미모에다 어려서부터 할머니로부터 교태 부리는 방법, 방중술을 배워 숱한 사내들을 녹여냈다. 공식적인 남편은 이사부의 아들인 세종이지만, 세종은 부인 미실의 복잡한 남자관계를 인내하며 지켜주었다.

미실의 모계는 전통적으로 색을 임금에게 바치는 색공지신(色供之臣)의 혈통이었다. 『화랑세기』 미생랑 조에서 미실의 어머니 묘도는 “우리 집은 대대로 색을 바치는 신하로 총애와 사랑이 지극하였다”라고 했고, 딸인 미실도 색공지신이 됐다.

미실은 진흥왕과 그의 세자인 동륜태자, 그의 동생으로 나중에 진지왕이 되는 금륜태자,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왕등 세명의 임금과 1명의 태자에게 색(色)을 바쳤다. 세종, 설화랑, 사다함은 물론 심지어 친동생인 미생등 4명의 풍월주들을 색정의 포로로 만든다. 결혼한 아녀자의 몸으로 임신한 상태에서 임금에게 색공(성접대)을 바치고, 천하의 풍월주들이 그녀의 치마에서 허우적거렸다. 화랑세기에서 미실은 신라 최대영토를 일군 진흥제도 미실과의 음사에 미쳐 재위 36년만인 43세 젊은 나이에 죽고, 왕후를 시켜주지 않는다고 임금을 갈아치우는(진지왕) 권력가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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