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심장을 쏜 안중근 의사…여순감옥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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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심장을 쏜 안중근 의사…여순감옥 방문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27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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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혀 있던 감방, 순국한 장소, 그가 쓴 휘호들이 전시…신채호 감방도

 

1909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하던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시찰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토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였다. 일본은 조선을 집어삼킨후 만주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이토를 그곳에 보낸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여러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 끝나는구나”며 그를 끝장내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토 나이는 69세. 죽을 때도 되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동포신문인 「대동공보」 사장 유진률(兪鎭律)에게서 권총 3정을 얻어 우덕순, 유동하, 조도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하얼빈으로 향했다.

일행은 10월 24일 유동하를 하얼빈에 남겨두고 바로 전 역인 차이자거우(蔡家溝)로 떠난다. 철로가 교차해 열차가 정차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이곳에서 거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안중근은 다시 하얼빈으로 돌아온다. 1차로 우덕순과 조도선이 차이자거우역에서 의거를 결행하고 실패하면 2차로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계획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뚫고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우덕순과 조도선은 러시아군의 저지로 열차에 접근하지 못해 실패한다.

9시경 이토가 탄 특별 열차가 하얼빈역으로 들어왔다. 이토는 열차 안에서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КоковцовВ. Н.)와 약 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 30분경 코코프초프의 인도로 역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는 찰라였다. 하얼빈역 1번 플랫폼, 의장대의 후방에서 기다리던 안중근 의사가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러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심장을 쏘아 뜨리며 거사에 성공했다. 안 의사는 러시아군에 체포되면서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했다고 한다.

그직후 안 의사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 애국열사 4명은 뤼순(旅順) 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안 의사는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결과는 뻔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는 순국했다. 그때 31세의 젊은 나이(한국나이 32세)였다.

 

▲ /이하 사진=김인영

 

그로부터 102년 되는 2012년 6월 24일, 우리 일행은 여순 감옥을 방문했다.

여순 감옥은 러시아가 처음 만들었다. 1902년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한뒤 동북 3성에서 저항하는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건축했다. 이어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이 곳을 점령했고, 러시아가 만든 감옥을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1907년 증축했다. 우리가 방문한 때의 감옥은 그 때 증축한 것이다.

여순 감옥에는 일본에 저항하거나 전쟁을 벌인 중국인, 러시아인, 한국인들이 수감되었다.

총 면적은 약 26,000㎡로, 275개의 감방이 있으며 2,000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형무소는 담장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담장 안에는 수색실, 고문실, 사형집행실, 공장 등이 있고, 담장 밖에는 강제노동소인 벽돌 공장과 과수원, 채마밭 등이 있었다. 건물의 외형은 큰대(大)자 형으로 방사형 구조이다. 건물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층마다 복도를 따라 감방이 나란히 나열되어 있으며 복도 중간부분에는 간수들의 감시 및 투광, 상하층의 공기소통 역할을 하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한국인으로는 독립운동가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박희광 등이 수감생활을 했다. 안중근과 함게 거사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도 이 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06~1939년 사이에 이 감옥에는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아인 등 연간 2만여 명이 수용되었고, 1942~1945년 사이에 수감자중 700명이 처형당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점령하면서 감옥의 사용이 중지됐고, 중국이 이 시설을 되돌려 받은후 1971년 7월 박물관으로 복원한후 공개했다.

2009년 8월 중국 당국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 맞아 안중근 의사 추모관과 전시관을 개관했다.

 

▲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곳 /김인영

 

안중근 의사가 구금된 방에는 한글과 중국어, 영어로 된 안내판이 게시되어 있었다. 게시판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조선 애국지사 안중근을 구금했던 감방 >

안중근(1879~1910)은 조선 황해도 해주부 사람이다. 1907년 조선의병운동에 가담하여 참모중장을 담당하였으며 1909년 “대한독립동맹” 조직에 참여하였다. 동년 10월 26일 그는 중국의 하얼빈역에서 일본제국주의 중심인물로 조선 초대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체포후 11월 3일에 여순감옥으로 압송되었으며 일본의 “국사범”으로 분류되어 간수부장 당직실 옆에 있는 이 감방에 단독으로 구금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안중근은 감옥 교수형장에서 순국하였으며 그때 나이는 32세였다.

 

▲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감방의 내부 /김안용

 

▲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 /김인영

 

민족사학자 신채호가 구금되었던 방도 찾았다. 그 감방에는 신채호의 사진과 수감 내역이 중국어, 영어로 쓰여 있었다.

 

▲ 민족사학자 신채호가 구금된 감방 /김인영

 

안중근 의사 추모기념관을 방문한 때는 그가 순국한지 102년 되는 해였다. 그의 기념관에는 동상과 그가 쓴 휘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 안중근 의사 동상 /김인영
▲ 안중근 의사 휘호
▲ 안중근 의사 흉상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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