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 문화
상태바
[이사부를 찾아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 문화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20 13: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산강 유역에서 일본식 무덤이 다량으로 나오는 까닭은?

 

『삼국지』 「동이전」과는 별도로 국내 사학계에서도 영산강 유역에 일본식 무덤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다는 조사보고서가 나와 파문을 일으켰다.

1972년 고려대박물관 주임으로 근무하던 윤세영이 충남 부여 규암면 합송리의 구릉 네곳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한국에도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실었다. 전방후원분은 4~6세기 일본에서 성행했던 무덤양식으로, 평면도 상으로 보면 원형(圓形)과 방형(方形)의 분구가 붙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열쇠구멍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영어로는 ‘keyhole-shaped tomb’이라고 번역하며, 국내에서는 장고 같이 생겼다고 해서 ‘장고형 고분’이라고 한다.

윤세영의 주장으로 국내 고고학계는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웠고, 정부는 전문가들을 불러 문화재위원화를 개최했다. 위원회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

또다시 일본식 무덤 논쟁의 불을 지핀 사람은 1983년 강인구 영남대 교수였다. 강인구 교수는 경남 고성과 함안, 경북 고령, 전남의 나주, 영암, 무안, 함평의 고분들이 장고분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고고학계는 “외형만 전방후원분일뿐, 실상은 자연구릉”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일본 학계에서 뜨거운 관심을 일으켰다고 한다.

논쟁의 대상이 됐던 고분 중에서 부여와 고성의 고분은 나중에 장고형 고분이 아니라는 학계의 결론이 났다.

1980년대 후반엔 전남 함평 일대, 영암 일대, 광주 일대등 영산강 유역에서 장고형 고분이 연이어 발견됐다. 한국고고학계에서도 더 이상 장고형고분, 즉 일본식 정방후원분이 한국에 다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영산강 유역에서 10여기 이상의 장고형 고분이 발견됐다. 이제 더 이상 일본식 무덤이니, 단순한 자연구릉이니 하는 논쟁도 사라지고,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로 초점이 넘어갔다.

 

전라도 일대 전방후원분에 대한 조사는 일제때부터 시작됐다.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30여기의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반남고분군이다.

그곳의 고분이 겉모양에서 일본식과 비슷하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관심을 갖고 조사에 착수했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는 1917~1918년 고고학자들을 동원해 반남고분군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1차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반남면 자미산 주위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 대지 위에 수십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겉모양은 원형 또는 방대형(方臺形)이며, 한 봉토 내에 1개 또는 여러개의 도제옹관을 간직하고 있다. (중략)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 조사단은 1차 조사후 오랜 기간 동인 정밀 조사를 미루었는데, 그 사이에 도굴이 발생해 나중에 2차 조사를 할 때 부장품을 거의 찾지 못했다고 한다. 국사학자 이덕일은 이희근과 함께 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에서 일본이 ‘아마 왜인일 가능성’만 제기하고 정밀 조사를 미루어 도굴을 조장했는데, 그 이유는 임나본부설을 뒤집는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덕일은 앞의 책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 안정복의 『동사강목』, 『당서』등의 지리지를 종합해 왜와 나주고분의 상관관계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등 5도호보와 대방주(對方州)를 설치했는데, 대방주가 과거 왜의 세력이 설치한 주(州)였다. 대방주의 중심현은 나주 회진현이며, 반나현이 지금의 반남현이다.

따라서 반남고분군의 주인공이 바로 한반도 왜의 지배자일 가능성이 크다.

 

영산강 일대의 한반도 왜가 실재했다는 증거가 쌓이면서 『삼국사기』의 의문점이 조금은 풀린 듯 하다.

벌휴이사금 때 호남지방에 가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 굶주린 한반도 왜인 천여명이 영남지방으로 몰려가 유민으로 떠돌았고, 영산강 유역의 왜가 소백산을 넘어 사신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신라를 침공해 수백, 수천의 신라인을 잡아 육로로 끌어와 노비로 부렸을 것이다.

 

▲ 마한 옹관묘 /전남대 출판부 「전라도를 다시 본다」에서

 

일본 문화의 마한 원류설

 

우리나라 고대에는 신라·백제·가야·고구려가 형성되고, 호남은 백제 문화에 뿌리를 두고 발전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에 앞서 한반도 남쪽에는 마한·진한·변한의 3한이 존재했다.

백제는 신라 및 가야와 발전과정이 달랐다. 신라는 진한의 한 부족에서 출발했고, 가야는 변한에서 나왔다. 이에 비해 백제는 마한과의 충돌과정을 거치면서 한강유역에서 충청권, 호남지역으로 남하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온조로 대표되는 고구려계 유이민들이 마한지역에 유입해 마한을 병합해 나갔으며, 호남지역이 가장 늦게 백제에 병합됐다. 그러면 백제가 병합하기 이전의 호남지역의 마한은 어떤 문화를 형성했을까.

마한이 고대 일본문화의 원류를 형성했다는 흥미로운 학설을 소개한다. 전남대 임영진 교수(인류학)는 호남 문화의 원류인 마한을 연구했다. 전남대 출판부가 엮은 「전라도를 다시 본다」는 책자 가운데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라는 주제에서 그의 연구를 엿볼수 있다.

 

임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호남의 마한 문화는 경기 충청 지역의 백제 문화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마한이 중국·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했고, 이웃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백제 문화와 차이점을 드러냈다는 것. 호남의 마한 문화의 특징을 임 교수는 다음 몇가지로 설명한다.

①벼농사 시작: 우리나라 벼농사는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해로로 호남지역에 도입됐을 가능성이 높다. 나주시 가흥리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벼의 꽃가루가 그 가능성을 일부 입증한다.

②중국 강남지역의 지석묘와 관련성: 중국 절강성에서 소수의 지석묘가 발견되는데, 지석묘가 성행한 호남지역을 기원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③동사(銅鉇)의 사용: 종이가 개발되기 이전의 고대에는 기록을 나무 조각에 새겼는데, 이를 목간(木簡)이라고 한다. 목간에 글을 새기려면 칼이 필요한데 이것이 동사다. 기원전 2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동사가 마한 권역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중국 초나라에서 성행했던 것이다.

④도씨검: 도씨검은 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동검으로,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이 사용했다. 이 도씨검이 완주·익산·함평 등지에서 출토됐다.

⑤분구묘: 분구묘는 지상에 거대한 분구를 만들고, 그 안에 가족을 매장하는 합장묘다. 영산강 유역에서 분구묘가 성행했는데, 중국 강남지역의 토돈묘와 유사하다.

 

▲ /교과서 지리부도

 

중국 정사의 하나인 『양서(梁書)』 「백제전」에는 “백제는 전국에 22개 담로를 두고, 왕자나 왕족을 보내 다스리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담로는 백제의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읍성(邑城)을 의미한다. 이 22개 담로는 백제 사신이 551년에 양나라에 전한 내용이다. 하지만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당시, 지방행정조직은 37군으로 확대된다.

그러면 100여년 사이에 변한 22개 담로와 37개 군의 차이는 무엇일까. 임영진 교수는 6세기 중엽에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고, 마한 땅이 백제의 지방조직으로 편제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즉 병합 이전의 22개 담로를 그대로 군으로 편제하고, 새로 병합한 마한 땅에 15개 담로를 추가 설치했다는 해석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후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재편하고, 백제 지역엔 웅주, 전주, 무주등 3개 지역을 설치했다. 웅주는 지금 충청도와 영역이 비슷하고, 전주는 전라북도, 무주는 전라남도와 대체로 겹쳐진다. 통일신라는 웅주에 13개군, 전주에 10개군, 무주에 13개군을 설치해 백제지역에 모두 36개의 군을 두는데, 백제 멸망시기의 37개 군과 1개군의 차이가 난다. 신라는 백제의 지방조직을 크게 바꾸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중 웅주와 전주의 군을 합치면 23개군으로, 『양서』의 백제 22담로와 대체로 비슷한 수치를 구성한다. 백제 사신이 중국 양나라에 건너간 551년까지 전라남도, 즉 신라의 무주 지역이 백제에 병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임영진 교수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영산강 유역과 전북 서남부 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전남 서남부에 1~2개 군이 있었다고 가정할 때 마한의 마지막 영역에서 13~14개 군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에 무주 13개군과도 부합한다. 따라서 지금의 전남과 전북 서남부 지역은 백제 22개 담로에 편성되지 않고, 독자적인 마한 문화권을 형성했다는 얘기다.

 

임영진 교수는 기원전 300년 경에 일본 규슈 북부에서 일어난 야요이 문화가 마한에서 전래됐다고 주장했다. 야요이 문화의 핵심 요소인 청동기, 벼농사, 주거지, 지석묘, 석기, 토기등이 모두 마한에서 건너갔다는 것. 영산강 유역에서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옹관 문화가 6세기초까지 발전했다는 사실도 이 지역이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했다는 증거다.

임교수는 고대 일본의 원류가 백제문화라는 지금까지의 견해와 달리, 백제에 앞서 마한이 일본 문화의 원류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백제는 일본의 대화(大和)정권이 등장한 5세기 후분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그 이전엔 일본 문화가 마한과 관계했다는 것이다.

임교수는 경기·충청지역에서 출발한 백제가 남하하면서 마한은 남쪽으로 밀려났고, 백제에 쫓겨난 마한인들은 남쪽의 마한이나,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해석했다. 백제의 마한 병합이 3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임교수는 3세기 후반, 4세기 후반, 6세기 후반 세 차례에 걸쳐 양이부호, 조족문토기, 분주토기등 마한의 토기들이 일본에 파급된 것은 마한의 남하과정에서 이주민의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간 증거라고 설명했다.

영산강 유역의 전남지역은 마한의 마지막 영역이었다. 이 곳은 6세기초까지 백제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 중국문화를 수용하고, 고대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영산강 유역이 한중일 해상 교류의 삼각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이점에 힙입은바 크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기반으로 동북아 해상교육권을 차지한 것도 호남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확용한 것이다.

나주시 반남고분군, 복임리고분군, 영암군 시종고분군, 함평군 예덕리 고분군등에서는 5세기 후반~6세기 초의 일본식 장고형 고분(전방후원분 고분)들이 발굴되고 있다. 이 지역이 백제와는 다른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동시에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는 게 임교수의 지론이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