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대신이 자금성서 비 맞으며 무릎 꿇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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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대신이 자금성서 비 맞으며 무릎 꿇은 사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1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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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후 명나라에 책봉 받으러 간 사절단의 수모

 

1623년 8월 3일(이하 음력), 그날 베이징에는 종일 비가 내렸다. 쿠데타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위를 찬탈한 인조반정이 일어난지 넉달째 되는 무렵이었다. 인조를 앞세운 서인 무리들은 반정(3월 12일)이 성공하자 곧바로 명(明)나라에 새임금 책봉을 위한 주청사(奏請使)를 꾸렸다. 정사 이경전, 부사 윤훤, 서장관 이민성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4월 27일 서울을 떠나 험한 바닷길을 건너 석달만에 명나라 수도에 도착했다.

조선의 사신단은 비를 맞고 아침부터 서장안문(西長安門) 앞에서 명나라 원로대신인 각로(閣老)들이 입궐하기를 기다렸다. 이경전은 조선에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다음자리 좌의정이었지만, 중국에선 비를 맞고 입궐하는 명나라 관료들을 가로막고 인조 책봉을 호소해야만 했다. 사신들은 중국 대신들이 한사람씩 입궐할 때마다 무릎을 꿇고 새로 즉위한 인조를 책봉해달라고 정리한 정문(呈文)을 올렸다. 그러던 중 총리격인 섭향고(葉向高) 각로가 입궐하려 하자 다시 무릎을 끓었다. 섭 각로가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왔는가.”

“책봉을 위한 일입니다.”

“옛 임금을 폐위하고 스스로 선 것은 명백히 따져야 하거늘, 왜 와서 청하는가.”

사절단을 저간의 사정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섭각로는,

“무슨 이유로 중국 조정에 보고도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세웠는가.”

“옛 임금이 재위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중국 조정에 보고해 알리겠습니까. 이미 폐위하였으면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수 없으니, 이것은 이치의 형세로 보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안으로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고 밖으로 신민의 추대에 강박되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런 곡절을 헤아려 살펴주기를 바랍니다.”

섭 각로는 사신들의 설명을 듣고 궁궐로 들어갔다. 아직 인사를 하지 않은 대신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앞서 입궐했다. 좌의정을 포함한 조선의 사절단은 종일 자금성 밖에서 신시(오후 3~5시)까지 기다렸다. 퇴궐하던 섭각로가 다시 물었다.

“너희 나라에서 거사할 때 왜병 3천명을 쓴 것은 웬일인가.”

명나라 고위관료층들의 귀에는 조선의 반정에 대해 잘못된 정보가 입력되어 있었다. 만주 후금의 거병에 조선이 제대로 지원하지 않은 까닭에 명나라 군신들 중에선 조선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사신단은 그런 일이 없다고 극구 설명했다.

섭 각로가 타일렀다.

“다른 나라 같으면 요청하는 대로 해주면 그뿐이지만, 조선은 중국과 한 나라 같으니 신중히 조사를 시행한 후에 책봉을 승인할수 있다”고 잘라 말했다.

 

때는 명과 청의 교체기였다. 만주에서 후금이 일어나 요동을 차지하고 요동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은 쫓겨나 압록강 하구 조선 땅 가도에 웅크리고 요동을 회복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었다. 임진왜란(1592~1598)에 10만 대군을 파병한 명나라는 조선의 병력지원을 요청했고, 광해군은 마지못해 군대와 식량을 지원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원을 해준 광해군이 갑자기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미덥지 못했다.

등주순무(산동성 행정책임자) 원가립(袁可立) 등은 인조반정을 왕위찬탈로 받아들였고, 일부 명나라 관료들은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조정에 보고했다. 광해군이 이미 살해됐다느니, 왜군을 끌어들였다는 등의 ‘가짜 뉴스’가 명나라 조정에 횡행했다.

당시 조선의 외교는 중국에 대한 조공과 책봉으로 대별된다. 조공은 무역관계에 해당하므로 적절히 신경쓰면 되지만, 책봉을 받지 못하면 조선 국왕이 임금 노릇을 할수 없고, 경우에 따라 군사적 충돌의 불씨를 안고 있는 중대 사안이었다.

 

▲ /책 표지

인조반정 당시 주청사 일행으로 참가한 서장관 이민성은 여행 견문과 북경에서의 활동을 낱낱이 기록해 「조천록(朝天錄)」으로 남겼고, 이영춘등 역사학자들이 이를 국문으로 번역해 「1623년의 북경 외교」(2014, 대원사)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이 번역본을 읽어보면, 당시 중국이 얼마나 위압적으로 굴었는지, 우리 사신단이 중국에 비굴했는지를 생생하게 읽을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굴욕의 역사라고 할수만은 없다. 그 자체로 당시 중화주의(中華主義)라는 국제관계에서 불가피하고 또는 적절한 외교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사절단의 수모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베이징에 도착하자 사신을 접대하는 주객사의 주사라는 자가 조선의 좌의정을 불러놓고 “너희 나라는 옛임금을 죄 줄 것을 요청한 후에 새 임금의 책봉을 요청하는 게 옳다. 사건의 중대함으로 보아 예부(외무부에 해당)에서 처리할수 없을 것”이라고 겁박을 줬다. 예단을 올리려 하자, 그는 “가지고 가라”며 받지도 않았다.

예과급사중 성명추(成明樞)라는 관리는 강경파의 한사람이었는데, “속국에서 임금을 폐위했으니, 마당히 빨리 죄를 물어야 합니다. 속히 조치를 취해 천하의 대의를 바르게 하소서”라고 황제에게 건의문을 올려 보냈다.

또 사신단이 예부에 조선의 실정을 설명하러 갔더니, 내관(환관)이 막아서며 문전박대했고, 관리가 나오길 기다려 글을 올리니 “이 곳은 정무를 보는 곳이 아니다” 하고서 들아보지도 않고 가바렸다.

 

▲ 자금성 오문 /위키피디아

 

명나라가 인조 책봉을 질질 끈 이유는 무엇일까. 어사 호사기(胡士奇)가 올린 보고서가 이를 요약한다.

“조선이 병력 8만을 지원한다면 우리가 (후금을) 공격하고, 지킬수 있습니다. 무릇 군자금과 군량, 무기는 빨리 조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중국 조정의 명을 받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국왕을 폐위하고 새로 세웠으니, 우리에 대해 두 마음을 품을지 알수 없습니다.”

당시 명나라 조정에는 명분을 내세우는 동림당(東林黨)과 현실을 중시하는 엄당(閹黨)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명분을 따르자면 인조가 왕위를 찬찰한 임금이지만, 현실을 따르자면 후금과의 전쟁에 조선의 병력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외무부 격인 예부와 국방부격인 병부의 견해가 달랐다. 조선의 사신단은 예부와 병부를 오가며 인조 반정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다.

절충안이 나왔다. 예부와 병부가 오랫동안 협상해 산동성 책임자인 원가립과 요동의 책임자 모문룡이 각각 조선에 조사관을 보내 반정의 진실과 백관들의 지지도를 알아보고 온 연후에 책봉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또한 얼마나 소모적인 일인가. 지금 같으면 항공편으로 하루면 다녀올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로선 조사단을 파견해 돌아오려면 2~3달 걸리는 일이었다. 이민성 등 일행은 중국 조사단이 한양에 갔다가 올 때까지 베이징에서 기다려야 했다. 사신단은 이제나 저제나 중국 조사가 빨리 마무리되길 기다릴 뿐이었다. 이민성은 일기에서 8월 중순에서 12월 중순까지 “관소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임금 책봉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어디 나다닐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중국이 마련해준 숙소에서 베이징의 정치동향을 살피는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 4개월 동안에 명나라 조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누가 임금이든지 간에 조선을 이용하자는 실리추구파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인조를 책봉해주는 대신에 후금을 격파할 병력 지원을 얻어낸다는 속셈이었다.

요동총책 모문룡이 보낸 조사관은 돌아왔지만, 산동성 원가립이 보낸 조사관은 풍랑을 만나 익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또다시 조사관을 보내기에는 명나라가 급해졌다. 명 조정은 “사신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기 어렵다”는 기묘한 논리를 내세워 조사는 이만하고 책봉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명나라 군부는 꾀를 냈다. 인조를 정식 군왕으로 책봉하지 않고, 임시국정대리자인 「권서국사」(權署國事)로 임명하자는 아이디어를 내 황제에게 올렸다. 인조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임시로 인정하고 군사지원 여부 등 충성도를 보아 정식 국왕으로 책봉하자는 것이었다. 사신단의 입장에선 기절초풍할 일이었고, 일행은 초긴장상태에 빠졌다.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는 사절단에게 이렇게 말했다.

“임진왜란때 우리가 10만의 병마를 출동하고 백만냥의 군사비를 소비하여 왜적을 몰아내어 번방(藩邦)을 다시 세워주었다. 근래에 들으니 너희 나라가 전투를 돕지 않고 또 쌀 무역을 금지하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 원병 8만명은 비록 그 수를 다 채울수 없지만 반을 감해서라도 징발해 모문룡과 더불어 합세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인조 책봉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은 위대중(魏大中)이란 자였는데, 예과급사중이란 직책을 갖고 있었다. 명나라 외교 총책인 임요유(林堯兪) 예부상서는 위대중과 동향인 관료를 그의 집에 보내 구워 삶았다. 나중에 책봉 결정이 나고 사신단이 그 관료에게 적절히 사례한 것은 물론이다.

예부상서 임요유는 12월8일 황제에게 인조를 책봉하자는 내용을 상주(上奏)했고, 희종(熹宗) 황제는 예부의 주장을 받아들여 12월 18일 조선국왕의 책봉을 승인했다.

그날 저녁, 명나라 각 아문(부처)의 하인들이 사신단 관소로 몰려들어 희전(喜錢)을 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그 소란스러움에 견딜수 없었다”고 이민성은 일기에 적었다. 기쁨의 돈, 즉 축하사례비를 달라는 것이었다.

아직 한 건이 더 남아 있었다. 왕비도 함께 책봉을 받아야 했다. 인조 책봉에만 매달리는 바람에 왕비 책봉에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사신단 접대를 맡은 주장(周鏘)이라는 자가 방물을 받지 않겠다고 트집을 잡았다. 물론 사신단이 그에게 적당히 예물을 받쳤다. 왕비의 책봉문제도 해결됐다.

황제의 칙서가 내려왔다.

“중국 조정에서 번국을 책봉해 번성케 하는 것은 중국의 강력을 지키고자 함이다. 근래에 건주(建州·요동)에서 오랑캐(후금)를 평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너희 나라에서도 의당 같은 원수로 여기고 관계를 단절해야 할 것이다. … 무기와 군사를 정돈하여 모문룡과 함께 병력을 연합하여 작전을 강구하고 적정을 정탐하며 기묘한 계책을 세워 승리를 거두어 우리 변방을 튼튼하게 하고, 또한 그대의 국내를 안정시켜라.”

이로써 인조는 명나라로부터 조선 국왕으로 인정받는다. 한양 출발에서 책봉 허가까지 무려 8개월이나 걸린 대장정이었다.

하지만 4년후인 1627년 만주의 후금이 조선을 침공한다.(정묘호란) 그로부터 9년후인 1636년(인조 14년) 청나라는 다시 조선을 침공해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다. 조선의 상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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