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에세이] 언성 높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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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 에세이] 언성 높이지 마세요
  • 조병수 프리랜서
  • 승인 2017.06.0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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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해야 할 일, 제대로, 멋지게 임했으면…

 

[조병수 프리랜서] 미국의 연휴가 시작되는 어느 금요일 저녁, 퇴근길에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친척 아저씨가 배낭여행을 한다면서, “LA를 거쳐서 뉴욕에 가려고, 지금 LA공항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육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청바지에 배낭 하나 둘러메고 길을 나선 그 젊음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참 느닷없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착하기 하루 전, 아니 반나절 전에 연락을 해오면 어떻게 하나? 내가 연휴(連休)라고 다른 여행계획이라도 잡았더라면 어쩔 뻔 했나. 너무 피곤해서 일부러 다른 계획도 안 잡았는데, 이게 뭐람···.'

“남이 던지는 공을 다 받을 필요가 없다”고 쓰인 책도 있지만, 그래도 대소가(大小家)의 아저씨가 오신다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수많은 내방객과 바쁜 일과에 시달리다가 이번 연휴만큼은 조용히 쉬려고 했던 나의 소박한 꿈은 그 전화벨소리와 함께 날아가버렸다.

공사(公私) 간에 잠깐씩 해외로 나오시는 분들은 각자 흔치 않은 기회이겠지만, 주재원으로 길지 않은 기간 살면서 현지에서 맞이하는 입장에서는 때때로 고단함의 연속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연휴에, 그것도 수십 년간 소식도 뜸하던 분의 갑작스런 출현 소식이 달가울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먼 길 오신 분 섭섭하지 않게 하려고 나름대로 노력은 했다.

 

▲ <맨해튼 42번가 그랜드 센트럴 역> /사진=조병수

 

그렇게 며칠 뉴욕에 체류한 그분을 모시고, 연휴 마지막 날 저녁에 맨해튼 42가에 있는 그레이하운드(Greyhound) 버스터미널로 갔다. 한국에서 예약한 토론토 행 버스의 출발일자는 그 다음날로 되어 있는데, 토론토에 도착한 후의 일정을 감안해서 심야버스로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창구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기존예약을 앞당겨서 심야운행 편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은 직원이 뒤쪽의 누군가와 상의하는 듯하더니, "해외에서 한 예약의 변경은 국제부 소관이라 여기서는 변경이 안 된다. 내일 영업시간 중에 국제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에 와서 하라"는 것이었다.

예약변경은 전화로도 가능한 것일 텐데, 여행객이 예약 버스표를 들고 직접 터미널 창구에 와 있음에도 그 창구직원은 한번 "노(no)"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밤차로 떠난다고 가방 챙기고 송별식사까지 한 상태였지만, 예약변경이 안되면 그냥 원래 예정대로 다음날 떠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미국전역을 운행하고 있을 테고, 그 터미널 사무실에도 직원들 여럿이서 야간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외여행 중인 여행자의 간단한 예약변경 요청을 소관부서 탓이나 하면서 처리할 수 없다는 말은, 고객의 입장이나 편의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처사라는 생각이 들면서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 친구와는 말이 안되겠다 싶어서 "책임자(supervisor)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성가시다는 듯 불만이 가득 찬 표정의 여직원이 못이긴 듯이 뒤쪽으로 가더니, 조금 전에 그 직원과 얘기를 주고 받던 남자직원이 창구로 나왔다.

“지금 컴퓨터로 접속이 안되니 내일 다시 오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늘 밤 편으로 떠나야 하니 도와달라.”

“회사 방침 (policy) 이 그러니 내일 영업시간에 와서 하라.”

그러면서 그 책임자라는 직원은 귀찮다는 듯이 슬며시 언성을 높였다. ‘뭐 이런 친구가 다 있나?’싶어 화가 치미는 순간,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차분해졌다. 그러면서 “내게 언성 높이지 말라(Don’t raise your voice at me!)” 라고 점잖게 한마디 던졌다.

바로 며칠 전에 어느 미국인에게, "이야기를 하다가 상대편의 언성이 높아질 때는 뭐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으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때 들은 이 말이 아주 적절한 때에 바로 떠오른 것이다.

그랬더니, 그 직원이 약간 움찔했다. 탑승수속을 하며 앉아있던 사람들도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면서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살피고 있었다.

“여보시오, 이분은 그레이하운드의 고객이고, 비록 해외에서 예약을 했지만 버스회사에 예약을 했지, 회사의 국제부와 한 것은 아니지 않소? 지금 당신들은 그 버스회사의 야간 영업소로서 탑승객들의 예약을 단말기로 확인하며 탑승시키고 있는데, 외국여행중인 고객이 소지한 버스표가 해외에서 예약된 것이라고 나중에 국제부로 가서 해결하라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이요?

그리고 회사의 방침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렇게 처리해야 한다는 규정을 나에게 보여주시오.”

그제서야 자기네들끼리 다시 뒤쪽 사무실로 가서 뭐라고 상의를 하고는 "예약변경을 진행해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문제는 해결이 되었지만, 왠지 뒷맛이 씁쓸했다. 굉장히 합리적이고 첨단 고객응대기법이 연구되는 사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그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창구의 직원은 단순업무만 처리할 뿐, 고객관리니 서비스니 하는 얘기와는 상관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후선 책임자라는 사람도 그저 자신들의 입장에서 손쉬운 응대만 했을 뿐, 고객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최소한 그날 밤의 그 사무실에서만큼은 그러했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지난 4월, 정원이 초과되도록 항공권을 팔고는 승객을 기내에서 강제로 끌어내린 유나이티드 항공의 불상사 소식을 들으면서 오래 전의 그 일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우리가 서비스산업부문에서 늘 귀따갑게 들어오던 그 ‘고객우선, 고객서비스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았다. 다 내가, 내 회사가, 내 조직이 살아남으려고 그러는 것일 텐데, 왜들 그러는지···.

 

며칠 전 국민연금에 대해 문의할 것이 있어서 집 근처 지사의 직원과 전화 통화할 기회가 있었다. 상당한 업무지식으로 고객의 입장에서 필요한 정보를 성심껏 알려주고, 질문하는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찾아내어 확인시켜주는 그 성의에, 모처럼 사람 사는 맛이 났다.

여느 회사 콜 센터 직원들의 세련된 기계적 응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툭하면 고객 앞에서 후선 지원부서로 업무처리방법을 물어보던 여느 기관 창구직원들보다 돋보였다.

두 개의 다른 사회에서 보게 된 지극히 개인적이고 제한된 경험이지만, 상대편이나 고객에 대한 배려는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일하는 부류와 자기가 하는 일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성실하게 임하는 직장인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경우라고 하겠다.

그런 자세의 차이가 개인과 조직의 발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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