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으로 이은 중국~조선 옛 해로…사신단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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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 이은 중국~조선 옛 해로…사신단 활용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08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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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성의 『조천록』을 통해 본 해로…장산-묘도열도 연결

 

인조반정이 발생한 이듬해인 1623년 조선은 명나라에 인조 책봉을 요청하기 위해 사신단을 파견했다. 정사 이경전, 부사 윤훤을 책임자로 한 사절단에 서열 3위로 서장관(書狀官) 이민성(李民宬)이 동행했다. 그는 한양과 북경을 오가며 겪은 견문과 북경에서의 외교활동을 「조천록(朝天錄)」이라는 일기에 꼼꼼히 기록했다. 이를 이영춘등 학자들이 번역해 「1623년의 북경 외교」(2014, 대원사)라는 이름으로 국역본을 내놨다.

▲ /책 표지

이 책의 앞 부분과 뒷 부분에 사신단 일행이 해로를 이용해 한양과 북경을 오가며 흥미진진한 중국 풍물과 에피소드를 담아냈다. 조선시대에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수많은 연행록이 저술되었지만, 이민성의 사산단은 해로를 이용하며 중국을 오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신단의 목적은 명나라에 인조임금에 대한 책봉 교서와 고명((誥命:임명장)을 발급받기 위한 것이었다. 인조는 반정(쿠데타)으로 광해군을 쫓아내고 즉위했기 때문에 명 조정에서는 이를 왕위 찬탈로 인식하고 책봉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사신단은 4월 27일 한양을 출발해, 육로를 통해 개성-평산-서흥-봉산-황주-평양-순안-숙천-가산-정주-곽산을 거쳐 출항지인 5월 18일 선사포에 도착했다. 우리 땅에서만 20여일 걸렸다 선사포는 평안북도 철산군에 있는 포구로, 조선에서 명나라로 조공선을 보내는 출발지였다. 사신단은 선사포로 가는 도중에서 고을에서마다 지방 유지들의 접대를 받는다. 중국에 가서는 납작 엎드리면서 조선에서는 상전 대접을 받는 당시 관료사회의 모습이 그려졌다.

 

▲ 1623년 이민성 일행의 사신단 이동로 /그래픽=김인영

 

선사포(宣沙浦)에서 등주까지는 바닷길로 가야 했다. 해양전문가인 윤명철 교수(동국대)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명으로 가는 해로는 한양을 출발해 요동반도 남단 여순(뤼순旅順)까지 육로로 이동한후, 그곳에서 배로 묘도(먀오다오, 廟島)열도를 따라 항해해 산동반도의 등주(登州)로 건너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요동과 요서의 정세가 험하면 평안도에서 여순까지 해로를 이용하는데, 이민성 일행이 갈 때는 만주에서 여진족(후금, 나중에 청나라)이 일어나 육로가 위험했기 때문에 우리 땅인 선사포에서 여순(뤼순)까지도 해로를 이용했다.

 

이민성 일행은 5월 24일 선사포를 떠나 우리 섬인 우리채-가도를 거쳐 압록강 어귀의 우도에 도착했다. 5월 28일 우도를 출항해 서쪽으로 장산(長山)열도의 섬들을 들러 요동반도로 향했다. 사신단은 요동반도에 내리지는 않았다. 요동반도는 이미 여진족에 의해 점령되었고, 바다의 섬들은 명나라의 지배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동반도의 끝(여순구)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묘도 열도를 따라 항해하다가 마침내 6월 13일 산동반도의 항구도시 등주에 도착했다. 중간에 섬들에 들러 쉬기도 했지만, 바닷길 여행이 21일이나 걸렸다.

압록강 어귀에서 요동반도, 산동반도에 이르기까지 장산열도와 묘도열도가 있어 예로부터 교역로와 조공로, 때론 침공로로 활용되었다.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당나라가 백제를 멸할 때, 모두 이 항로를 이용했다.

옛 사람들은 지금의 내비게이션과 같은 항로식별장치를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섬과 육지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항로를 식별했다. 따라서 요동반도의 장산열도, 요동과 산동반도 사이의 묘도열도는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해로식별에 큰 도움을 주었고, 잠시 들러 쉬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장산열도:

요동반도의 황해 쪽에 있으며, 가장 큰 섬이 광록도(廣鹿島)이며, 두 개의 열도군으로 나눠져 있다. 총 122개 섬과 260개 암초로 구성되어 있으며, 러일 전쟁때 일본군이 점령하기도 했다.

 

묘도열도: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에 길게 이어져 있으며, 32개 섬과 80여개 산호초로 이뤄져 있다. 이 열도를 기준으로 안쪽을 발해(渤海), 바깥쪽을 서해(황해)로 구분한다.

 

이민성 일행은 압록강에서 요동반도의 중간에 있는 장산열도에서는 녹도-석성도-장산도-광록도-삼산도를 들렀고,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의 묘도열도에서는 황성도=묘도를 거쳐 등주에 이르렀다.

 

▲ /그래픽=김인영

 

일행이 해상을 여행하면서 겪었던 일화들이 이민성은 일기에 다채롭게 정리했다.

당시 평안도 앞바다 가도에는 명나라의 패장 모문룡(毛文龍)과 그의 패잔병들이 피난해와 조선에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모문룡은 2년전 청의 누르하치가 심양과 요양을 함락하자 압록강으로 도망왔다가 다시 패전하자, 가도에 숨어 웅크리고 있었다.

이민성 일행은 선사포를 출항한후 가도로 건너가 모문룡에게 명나라 조정에 인조 책봉에 도움이 되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앞서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를 찬탈했다는 내용을 보고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사신단을 만나서는 북경 조정에 책봉을 허가해달라는 보고서를 올리주겟다고 말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또 요동반도 석성도에서 도착한후 폭풍을 만나 이민성이 탄 제4선이 선저의 널판이 깨져 침몰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선원들의 사투로 겨우 죽음을 면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해로는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이민성은 사신단의 바닷길이 모두 3,450리(里)라고 정리했다. ▲선사포~가도 100리 ▲가도~ 거우도 200리 ▲거우도~녹도 500리 ▲녹도~석성도 50리 ▲석성도~장산도 300리 ▲장산도~광록도 250리 ▲광록도~삼산도 300리 ▲삼산도~황성도 900리 ▲황성도~타기도 160리 ▲타기도~묘도 150리 ▲묘도~등주 80리를 합친 거리다. 통상 10리(里)를 4km라고 하지만, 조선시대의 1리(里)는 500m쯤 된다고 한다. 따라서 사신단이 해상으로 이동한 거리는 1,700km쯤 된다. 서울~부산 거리를 3배 이상 바다로 움직인 것이다.

 

등주에 도착한 사신단은 열흘간 머물면서 그곳의 중국 관리들에게 인조 즉위의 정당성을 설득했. 등주는 천혜의 항구로, 역대 중국왕조의 해상 관문이었다. 그곳에서 사신들은 가도에 피난온 모문룡 일당이 인조반정에 대해 나쁜 보고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모문룡의 악성 보고로 인한 중국내 악화된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명나라 관원들을 접대하는등 로비활동을 펼친다.

 

간신히 설득한 끝에 일행은 봉래각과 등주 수성등을 관광한 후 북경을 행해 발걸음을 뗀다.

등주는 지금의 펑라이(봉래, 蓬萊)다. 봉래는 산동반도 최북단에 자리한 항구도시로, 한반도와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대표적인 곳이다. 이 곳의 봉래각(蓬萊閣)은 북쪽 해안가의 가파른 절벽으로 된 단애산(丹崖山) 정상에 있는 누각으로, 호북성 무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 호남성 악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 강소성 남창(南昌)의 등왕각(騰王閣)과 함께 중국 4대 누각으로 꼽히기도 한다. 당나라 때부터 용왕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북송 인종 때인 1061년에 등주 군수 주처약(朱處約)이 용왕묘를 옮기고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봉래각 아래의 바닷가에는 명나라 때 왜적을 물리친 장군 척계광(戚繼光)이 해군을 훈련시켰던 수성(水城)이 남아 있다. 당나라 때 가탐(賈耽, 730~805)이 저술한 『도리기(道里記)』에는 중국에서 신라로 가는 해로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지금의 봉래인 등주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묘도열도를 거쳐 요동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여순에 이른다. 이어 요동반도에서 장산열도를 거쳐 압록강 하구에 이르고,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 장구진(황해 풍천), 곡도(백령도), 고사도(강화도), 덕물도(덕적도)를 거쳐 신라의 대외 항구였던 당은포(경기도 화성)에 이르렀다.

이민성 일행은 당나라때 가탐이 알려준 길의 역순으로 항해했던 것이다.

사신단은 등주에서 수성(水城)을 관람한 사실을 기록했다. 등주수성은 명나라 때 대대적으로 수리되어 형성된 해상군사 방어체제였다. 등주수성의 북문(北門)은 선박이 출입하던 수문(水門)이었고, 남문은 사람과 마차가 출입하는 육문(陸門)이었다. 적대(敵臺)와 포대(砲臺)는 적들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성벽이었고, 수성을 보호하기 위 한 중요한 시설이었다.

큰 파도를 막는 방파제와 함께 항구 안팎의 수위를 조절하였던 갑문(閘門)도 있었다고 한다. 등주는 우리나라 서해안처럼 조수 간만의 차가 크다. 당시 등주 수성에는 인천항 갑문처럼 밀물 때 열고, 썰물 때 닫는 갑문을 설치했다. 최신식 항구시설이었다.

이민성은 등주 수성의 풍경을 이렇게 적었다.

“절벽에서 바다 골짜기를 굽어보니 눈이 아찔하고 무서웠다. 담 문으로 돌아나와 수성(水城) 문에 있는 작은 누각에 올라가 어부들이 그믈질하는 것을 보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왔다.”

 

사신단은 6월 24일 등주를 출발해 제남으로 이동했다. 제남에서 선박증서를 받아 운하의 요충지인 덕주를 행했다. 덕주에서 천진까지는 운하를 이용해 이동했고, 천진에서 다시 육로로 이동해 7월 28일 북경에 도착했다. 한양에서 출발해 북경까지 무려 3개월의 지리한 여행이었다. 그것으로 그들의 고생이 끝이 난 것이 아니다. 명나라가 인조에 대한 책봉을 허가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수성 수문. 이곳에 갑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위키피디아
▲ 등주수성 전경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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