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대가야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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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를 찾아서] 대가야 정복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6.08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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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함 앞세워 정벌…대가야 항복으로, 가야 연합 멸망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는 500여년을 유지한 대가야의 본거지다. 그곳에는 400여기의 무덤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왕족과 귀족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무덤 안에는 토기, 철기, 금관, 금동관, 장신구등 최고급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정말로 대단한 유산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무덤 하나에 한사람만이 매장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묻혀 있었다. 순장(殉葬)이다. 대가야박물관에 전시된 44호 고분에는 30여명이 죽음의 길을 같이 했다. 죽은 후에도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어린딸이 함께 묻혀 있는 형상은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이승에서 모시던 분과 저승에서도 함께 삶을 할수 있다는 고대인의 정신세계가 엿보였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가야연맹은 4세기 후반 이후 세력이 약화되면서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가면서 5세기 이후에는 고령, 합천 등 경상도 내륙 산간지방의 대가야가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중심지로 떠올랐다. 그 가운데서도 반파국(伴跛國:고령지역의 소국)은 5세기 후반에 새로이 시조설화를 만들며 대가야를 표방했다. 대가야는 합천·거창·함양·산청·아영·하동·사천 등지를 포괄하는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등장했다.

대가야는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받았고, 481년에는 백제·신라와 동맹해 고구려를 침입했다. 하지만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활동의 폭이 매우 제한됐고, 562년 이사부와 그의 부하 사다함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지에 따르면 가야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고 한다.

 

“고령군(高靈郡)은 원래 대가야국(大加耶國)으로써 그 나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유지되었는데, 진흥대왕이 이를 침공하여 없애고 그 지역을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만들었으며, 경덕왕이 고령군으로 개칭했다.”

 

▲ 경북 고령의 대가야 고분군 /사진=김인영

 

사다함

 

한강유역과 동해안 북쪽에 대해 영토를 확장한 이후 신라의 다음 타깃은 마지막까지 버티는 대가야였다. 대가야는 관산성 전투에 참여해 주력군을 잃은후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10여년간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지 않았던 이사부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대가야 정벌이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진흥왕 23년(562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했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했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임금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았으나,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했다.“

 

사다함은 『화랑세기』에서 미실궁주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제5대 풍월주였다. 그가 죽은 나이는 17세. 이사부를 따라 대가야 공격의 선봉에 나설 때 나이는 15세. 전쟁의 영웅이자, 당대 최고 여걸인 미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사다함은 오늘에도 드라마, 소설, 만화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에서 사다함을 극찬했다.

 

“진흥왕(眞興王)이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라국을 습격하게 했는데, 이때 사다함은 십오륙 세의 나이로 종군하기를 청했다. 왕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요청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貴幢) 비장(裨將)으로 임명했는데, 그의 낭도로서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국경에 이르자 원수에게 청해 그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전단량(旃檀梁)(가라의 말로 문을 양(梁)이라 한다)으로 들어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놀라 막지 못하므로, 대군이 이 틈을 타서 마침내 가야국을 멸망시켰다.

군대가 돌아오자 왕은 그의 공훈을 책정하여 가라 포로 3백을 사다함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는 받은 즉시 모두 놓아주어 한 명도 남겨두지 않았다. 또 토지를 하사하였는데 굳이 사양하였다. 왕이 강권하니 알천(閼川)에 있는 불모지만을 청할 따름이었다.

사다함은 애초에 무관랑(武官郞)과 생사를 같이하는 벗이 되기를 약속했는데, 무관이 병들어 죽자 너무 슬프게 울다가 7일 만에 그 역시 죽었다. 그때 나이가 17세였다.“

 

대가야를 함락한 시기에 이사부의 나이는 70대 후반이었고, 기력이 쇠한 나이였다. 가야 가맹국들에겐 이사부는 죽은 제갈공명 격이었다. 마지막 남은 대가야로선 이사부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을 게 분명하다. 김부식은 사다함의 용맹 덕에 대가야를 함락하는데 성공했다고 평했지만, 백전백승의 장군 이사부라는 절대적 존재가 있었기에 대가야가 성문(전단문)을 열고 항복했을 것이다.

공은 사다함이 가져갔다. 노장 이사부가 양보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흥왕은 사다함의 공이 으뜸이라고 칭찬하며 땅과 가야에서 획득한 노비 300명을 주었다. 사다함은 끝내 이를 거절하고, 친구 무관랑이 병들어 죽자 함께 죽었다는 애절함이 더해져 이사부의 공이 가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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