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화국 비화> 편집후기
상태바
<6공화국 비화> 편집후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5.27 1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사건들…그리고 취재, 뒷얘기

 

과거 정부의 ‘비화’를 취재해서 기사화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필자가 서울경제신문 기자로 재직할때인 1993년 4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1년 9개월 동안 장기 연재한 「비록-6共 경제」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6공화국을 이끈 노태우 정부가 물러나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을 때에 연재됐다.

여건상 당시엔 말을 할수 없었던 당사자들도 어느 시점에선가 말문을 열기도 했지만, 숨은 이야기는 속성상 드러내기를 원치 않는다.

6공화국 정부가 끝나고 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정사가 아닌 야사를 이끌어 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김영삼 정부 초기에 개혁의 칼날이 서슬 퍼런 가운데 구 정권의 비화르 ㄹ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당사자들에게는 부담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자는 숨은 이야기를 알고 싶어했다. 따라서 시리즈가 계속되면서 항의외 질책, 그리고 찬사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에서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대목은 포철의 경영층 변동을 다룬 ‘배반의 장미’ 편이었다. (이 스토리는 별도로 연재할 계획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인 3월 8일 주총에서 박태준 사단이 대거 물러나고 정명식-조말수-장중웅 체제가 포철의 계승자로서 정부의 개혁에 발맞춰 포철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기사는 신임 경영진에게 치명적인 내용이었고, 포항에 머물던 한 핵심임원은 일정을 앞당겨 상경, 서울경제신문을 찾아와 항의하기도 했다. 상시 ‘배반의 장미’ 주역들은 1년후 포철을 떠남으로써 낙화하고 말았다.

‘재벌과 정치’ 편은 개발독재 시절에 정경유착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정칙권과 재벌의 관계가 6공화국 들어 악화되는 과정을 그렸다.

6공화국 후반에 들어가면서 정부와 재벌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노 대통령은 “재벌들의 부동산 투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판”이라며 재벌에 대해 메스를 가하려고 했다. 정부가 5·8 조치니, 업종전문화니, 신산업정책이니 하는 정책을 취한 것도 노 대통령의 재벌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재벌들은 가만 있지 않았다. 정주영씨가 정치에 뛰어든 것도 이에 대한 반발의 표시였다.

그러나 롯데그룹의 경우 서울 잠실의 제2롯데부지가 업무용 토지가 아닌데도 청와대의 획일적 적용으로 비업무용으로 묶이는 과정의 비화가 소개되자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며 격려를 ㄹ아끼지 않았다.

‘실명제 파동’ 편은 1993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발표한 뒤 게재해 과거 두차례나 실패한 경험을 일깨워 주는데 주안점을 뒀다.

‘부동산 정책’ 편은 6공화국 정부가 부동산 투기와 전쟁을 벌이면서 실책을 범한 과정을 그렸다. 특히 부동산 정책의 산물로 6공화국 최대의 비리라고 일컫는 ‘수서 사건’이 게재되자 당사자였던 서울시 공무원은 물론 한보그룹이 조마조마하면서 주목했다. 고건 당시 시장도 그때 상황을 잘 짚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취재는 어려웠다. 사건으로 서울시를 떠났거나 곤욕을 치렀던 공무원들은 취재에 응하기를 꺼려했고, 취재에 응하더라도 익명을 요구했다.

‘부동산 정책’ 편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노 대통령이 9사단장 시절 근무했던 지역인 일산 지역이 신도시 후보지로 결정되었다는 점, 물론 입지조건도 유리했지만 최고결정권자의 개인적 인연이 정책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는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는 우연과 필연이 변증법적으로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그리고 과거의 현안이 현재, 그리고 미래에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면서 발전한다. 따라서 이 시리즈는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것이며, 언젠가 복병처럼 나타날 우연한 사건의 배경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기록으로서의 가치도 나름 있다고 자부하고 싶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