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사①] 중국지배 하의 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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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사①] 중국지배 하의 천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5.2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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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11년~AD 939년…한 무제에 나라 잃고, 당나라 말기 혼란 틈타 독립

 

베트남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 오랜 기간 중국의 지배와 조공관계를 거쳤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을 겪었으며, 2차 대전후 남북 분단과 전쟁의 역사를 거쳤다. 그 역사의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편집자주

 

① 신화의 시대

 

베트남도 4,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부한다.

베트남의 시조는 락 롱 꾸언(Lac Long Quan 雒龍君)이다. 우리의 단군(檀君)에 해당하는 존재다. 끝말에 ‘君’ 자가 들어 가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한다. 중국의 전설적 존재인 염제(炎帝) 신농(神農)씨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락 롱 꾸언은 자신의 나라를 침략한 북국(중국)의 왕비(또는 공주)인 어우 꺼(Au Co)라는 여성을 납치해 결혼했다. 어우 꺼가 알을 낳았는데, 이 알에서 백 명의 아들이 나오니 이들이 백월(百越)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베트남의 주류 민족인 낀(Kinh)족이 북쪽 중국지역에서 왔음을 보여주는 신화다.

▲ /위키피디아

백월의 왕은 장자가 대를 이었다. 왕을 칭하는 명칭이 훙 브엉(Hung Vuong 雄王)이었으며, 훙 브엉이 지배하는 나라가 반 랑(Van Lang 文朗)이었다. 반 랑은 단군 조선처럼 신화와 역사가 혼재된 왕조다.

기원전 3세기에 백월 집단 중의 한 분파(어우족)가 북쪽에서 내려와 반 랑을 누르고 새로운 권력 중심지를 만들었는데, 이를 어우 락(Au Lac, 기원전 208-179)이라고 한다. 이들은 우세한 무기를 가지고 내려와 기존의 지배자를 억누르고, 홍강 델타 주변의 지배자로 성장했다.

어우 락은 창건자인 안 즈엉 브엉(An Dung Vuong 安陽王) 일대로 끝나고, 북부지역에서 새롭게 새력을 확장하는 중국계 찌에우 다(Trieu Da 趙佗)에게 나라를 내주었다.

베트남의 역사는 북부에서 출발한다. 쉽게 얘기하면 현대의 베트남 전쟁 당시에 월맹지역이다. 남베트남에는 참파라는 부족연맹과 크메르족의 푸난(扶南)이 지배하고 있었다.

 

② 조타의 준독립기

 

기원전 3세기, 중국에서는 진(秦)이 중원을 통일하고 남쪽으로 지배 범위를 확대했다. 진시황은 과거 백월이라 불리던 지역을 공략하고, 이곳을 중국의 영역으로 만들려고 하면서 충돌이 시작된다. 이 때부터 베트남 역사는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진나라는 무력을 앞세워 백월 지역을 군현(郡縣) 제도에 의한 세력 판도로 구획했다.

진나라는 찌에우 다(조타)를 광동(廣東) 지역의 현령으로 파견했다. 그는 중국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진시황이 사망한 후 진나라의 판도가 급속도로 붕괴되는 과정에서 백월 지역을 준독립 국가로 성장시켰다. 지금 광쩌우(廣州) 지역을 수도로 삼고, 광동과 광서 지역을 아우르는 남 비엣(Nam Viet)을 수립했다. 훗날 19세기에 비엣 남(Viet Nam 越南)이라는 국명이 출현하는데, 이는 남 비엣에서 유래한다. 남 비엣의 왕궁 터는 1995년부터 광주 시내에서 약 400㎡가 발굴되어 보존되고 있다.

찌에우 다는 남쪽으로 눈을 돌려 어우 락을 공격해 정복했다. 어우 락은 멸망했다. 어우 락은 석궁이라고 하는 선진 무기를 사용하여 반 랑을 정복했지만 아직까지 청동기 문화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철제 무기를 사용하고 있던 찌에우 다를 당해 낼 수 없었다.

찌에우 다의 어우 락 정복은 중국인에 의한 최초의 베트남 정복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남 비엣이라고 하는 준독립 자치국가를 세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배층은 중국이었지만, 백성들은 백월족이었다. 찌에우 다는 현지인과 같이 상투를 틀고 있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고조선의 기자(箕子) 동래설과 그리 닮았을까.

찌에우 다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진나라를 이은 한(漢)과 대등한 국가임을 과시했고, 수시로 한나라와 전쟁을 벌여서 긴장 관계를 지속했다. 하지만 찌에우 다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사망하자 중국의 압박이 세졌다. 게다가 영토 확장에 주력한 한 무제(武帝)가 남쪽 이민족을 가만두지 않았다. 한무제는 기원전 111년 남 비엣을 멸망시키고, 7군을 설치했다. 이 중에서 4개 군은 현재 중국 지역이고, 3개 군은 베트남 쪽에 두었다. 교지(交阯)와 구진(九眞), 일남군(日南郡)이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4군을 설치한 것은 이로부터 3년후였다. (BC 108년)

 

▲ /위키피디아

 

③ 쯩 자매의 반란

 

후한대에 들어서면서 베트남인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발생했다. 중국은 직접 지배를 강화했고, 토착 지배 권력을 약화시키고 농민들에 대한 직접 지배를 시도했다. 토착 지배자들의 주요 지배 수단인 수리 관개 시설에 대한 통제권도 점차 약화시켰다.

토착 지배층이 반발했다. 대표적인 것이 쯩(Trung, 徵) 자매의 반란이었다. 토착 지배계층의 딸이었던 쯩 짝이라는 여성은 남편이 중국인 관리에게 해를 입자 여동생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켰다. (A.D. 40). 쯩 자매의 저항군은 삽시간에 세를 불렸고, 중국인 지배에 대한 저항은 베트남은 물론 중국의 광동, 광서 지역까지 확대됐다.

저항군의 지도자가 여성인데다 그들을 따르던 지휘관과 전사들 중에 여성이 매우 많았다. 쯩 짝은 왕위에 올라 독립을 시도했다. 중국은 진압군을 수차례 파견했지만 빈번히 실패했고, 중국은 반란이 일어난지 3년만에 장군 마원(馬援)을 파견해 군사 절반 이상 잃어버리는 악전고투 끝에 겨우 진압에 성공했다.

 

④ 사섭의 지배기

 

쯩 자매 반란 이후 베트남의 중국화는 가속화됐다.

후한 시대에 베트남은 교지(交阯)라고 불리웠다. 후한 말기가 되면서 각지에 준독립 세력이 등장하고 위·촉·오의 삼국 시대가 도래하자,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직접 지배가 힘들어졌다. 이때 중국인 이주자들이 베트남을 지배하게 됐고, 그중에 사섭(士燮, 시 니엡)이라는 인물이 베트남을 준 독립적으로 지배했다. 사섭은 오나라 손권의 부하가 되었다.

사섭의 시기에 베트남은 대외 교역의 중심지로 부각됐다. 사섭은 손권에 복종하면서 그 대리인으로 베트남을 지배하는 형식을 취했다. 사섭은 오의 요구를 만족시키면서도 베트남을 중국과 동남아시아, 인도와의 교역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이 무렵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퍼지고 있던 대승 불교가 교역선을 통해 전해졌다. 사섭은 새로운 종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보호했기 때문에 교지에서는 불교가 발전했고, 남중국으로 전해졌다.

사섭의 지배기에는 중국 유학도 크게 퍼졌다. 중국의 많은 학자들이 베트남으로 이주해 왔고,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되어 온 사람들 중에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도 많았다. 사섭이 이들을 보호하고 우대했고, 이주해온 중국 학자들은 제자들을 배출해 베트남 사회의 수직적, 수평적 유교 문화 확산에 공헌했다.

 

▲ /위키피디아

 

⑤안남(安南)도호부

 

그러나 사섭이 죽자 오는 재빠르게 교지를 점령했다. 베트남은 다시 중국의 직접 지배로 들어갔다. 오의 뒤를 이어 중국의 남부를 지배하게 되는 동진(東晋, 305-420), 송(宋, 420-479), 제(齊, 479-502), 양(梁, 502-557), 진(陳, 557-589) 역시 베트남을 직접 지배했다. 그 뒤 수(隋, 589-618)로부터 시작하여 당(唐, 618-907) 시기에는 안남(安南)도호부를 설치했다. 조선시대에 베트남이 안남이라고 알려진 것은 이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수입하는 쌀을 안남미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

안남도호부는 베트남의 중국화 기구였다. 당나라는 안남도호부를 통해 과거제도인 빈공과(賓貢科)를 실시하고,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과거를 통해 선발했다.

베트남에 대한 중국화 정책은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당나라 지배기를 지나면서 8세기에 마이 학 데(Mai Hac De 梅黑帝), 풍 흥(Phung Hung 馮興)과 같은 토착 지배자들이 저항을 주도했다. 9세기에 당나라가 망하고 후량(後梁)이 들어섰다.

베트남은 후량의 지배로 들어갔지만, 후량 내 남부 지방 세력이 독립하여 남한(南漢)을 세운 후 베트남에 대한 지배를 도모했다. 남한은 많은 병력을 동원해 교지를 공격했지만, 응오 꾸엔(吳權)이라는 홍강 유역 토착 지배자의 세력이 이를 막아 냈다. 939년 응오 꾸엔은 독립하여 독립 왕조를 세웠다.

기원전 111년에서 939년까지 1,050년동안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베트남은 마침내 독립왕조를 세웠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서는 그 틈에 베트남은 독립한 것이다.

 

▲ 베트남 국립역사박물관(하노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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