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화국 비화> 노태우의 친인척
상태바
<6공화국 비화> 노태우의 친인척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5.23 11: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요 정책마다 입김 ‘5공 단절’ 무색

 

1989년 6월의 일이다. 노태우 정부가 대우조선 정상화방안을 발표한 후 옥포조선소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정부가 자금지원을 해주는 조건으로, 회사가 어떻게 해서든 노조 분규를 막는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는데, 파업 사태가 걷잡을수 없이 진행되었다. 정부 당국자들은 정상화 방안을 원점으로 돌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엄포는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 정부 내에서 실제 검토했던 사실이다.

▲ 책표지 /김인영

한승수 상공장관은 노사분규가 심해지자 “대우조선을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겠다”고 언론에 발표까지 했다. 한 장관은 대우조선 포기론을 펴면서 조선산업이 인력집약 산업이기 때문에 사양산업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무역협회 고문으로 있던 금진호씨기 2페이지짜리 건의서를 만들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금씨의 건의는 조선산업이 엄청난 인력고용 효과와 산업연관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자금을 지원해서라도 대우조선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우조선 사태에 대해 노태우 대통령은 최종적으로 주무장관의 견해가 아니라 금진호씨의 견해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대우조선은 없어지지 않고 4,000억원에 이르는 정부의 금융지원을 받아 다시 살아났다.

6공화국 5년을 이해하려면 노태우 대통령의 친인척을 이해하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만큼 노 대통령은 대선공약에서 “친인척 배제”를 외치고, 5공화국 청산과정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인척에 대해 메스를 가했지만, 스스로 주요 정책 결정과정에서 친인척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는 뜻이다. 노 대통령의 친인척으로 언급된 사람은 금진호씨 외에도 처남 김복동씨, 처고종사촌 박철언씨, 사돈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이 있다. 이들은 노 대통령 재임기간중 정치·경제적으로 주요 사안이 발생할 때 대통령에게 결정적인 자문 역할을 했다.

금진호씨에 관해 더 알아보자. 경북 영주 태생인 그는 1973년 상공부 관리가 된 이래 80년 국보위 상공분과위원장으로 기용되면서 고속승진의 길을 달렸다. 상공부 차관을 거쳐 83년 상공부 장관에 오른 금씨는 정통관료 출신으로 노 대통령 재임기간 무역협회 고문이라는 자리에서 중요한 경제사안에서 대통령의 고문 역할을 했다.

금씨 스스로는 “6공화국의 실세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제장관과 은행장 인사에서 그의 흔적을 느끼는 사람은 많았다. 그는 자신이 간여한 경제정책으로 대우조선 사태뿐 아니라 동아건설의 리비아공사 입찰을 들수 있다.

1990년 8월 29일 그는 건설부 차관과 함께 제1차 리비아 대수로공사 통수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통령 특사로 나갔다. 1차 공사에 이어 시행될 제2차 리비아 수로공사에는 현대·대우·동아건설 등 3개사가 달려 들었다.

3사는 건설부 장관 앞에서 “누가 공사를 따내든지 하청 형식으로 같이 공사에 참여한다”는 합의서를 작성해 서명까지 했다. 국내 업체끼리 과열경쟁을 해봤자 우리만 손해를 본다는 인식에서였다.

그러나 리비아 정부가 “하청공사는 절대 안된다”고 못을 박는 바람에 1차 공사의 시공을 맡은 동아건설의 최원석 회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샌드위치 신세가 돼서 밤잠도 자지 못하고 노이로제에 시달렸다.

노 대통령이 이런 얘기를 전해듣고 금씨를 불러 과연 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오라며 특사로 내보냈다.

금씨는 동아건설이 리비아 정부로부터 신임을 받는 한 계속 동아가 혼자 리비아에서 공사를 하는게 국익에 도움이 되겠다고 노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냈다. 금씨는 또 이유야 어찌 됐던 한번 건설회사끼리 합의를 한 것이니까, 그 정도를 국내 공사에서 벌충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교통정리를 해줬다.

금씨;는 또 경제각료의 인사에 개입했다. 스스로는 이를 부정했지만, 상공부 장관에 박필수·한봉수씨를 추천한 사실은 인정했다.

금씨의 말을 인용해 보자.

“경제각료 인사를 내가 주물렀다고 하는데, 5공·6공 장관 인사는 김영일 사정수석이 다 했어요. 사정 파트에서 5~6명의 자료를 모아 올리고 안기부가 코멘트를 붙이면 대통령이 찍는 겁니다. 그런데 박씨와 한씨는 항상 장관 후보에 올라 있었어요. 한번은 노 대통령이 테니스를 하고 나서 ‘상공장관으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기에 ‘박필수도 있고·…’라고 말한 적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었어도 그런 이름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1992년말 제2이동 이동통신사업자 문제로 노 대통령과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 사이에 감정의 골이 패어가고 있을 때도 금씨가 개입했다는 얘기가 있다. 금씨의 중재로 선경의 이동통신 반납이 성사됐다는 것이다.

 

정주영 회장, 방북후 안기부보다 박씨에게 먼저 보고

 

박철언씨는 대통령 영부인 김옥숙 여사의 고종사촌이라는 점에서 6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청와대 정책보좌관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외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인물이다. 그는 경북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6년간 검사 생활을 했다. 이후 국보위 비상대책위원회, 대통령 정무비서실, 안기부등에서 검찰의 외부 파견근무를 하면서 대민접촉보다는 눈에 띠지 않는 곳에서 일하다 6공화국에 들어와 실세로 부상했다. 박씨는 대통령의 인척이라는 것보다는 일을 잘하는 것으로 대통령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그가 대선과정에서 사조직인 월계수회를 조직해 노 대통령의 당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점이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 노 대통령이 박씨를 신임하는데는 김옥숙 여사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그는 6공 정부가 최대치적으로 평가하는 북방외교의 숨은 주역이었다. 그는 헝가리와의 수교 등 동유럽 각국과의 교류의 길을 여는 대통령 밀사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씨는 대통령의 지시로 북방을 아무런 신분 보장도 없이 드나드는 외롭괴 괴로운 순간순간을 보내야 했다.

박씨의 최대 관심은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북한측은 한시해가, 우리측은 박씨가 접촉 창구 역할을 했다. 비밀회담은 서울과 평양에서 했고, 판문점의 자유의 집과 통일각에서 번갈아 열기도 했다. 그들은 보안이 문제가 돼서 장소를 옮겨 싱가포르에서 접촉하기도 했다. 그들은 7~8번이나 만나 서로 간에 할말, 못랄 말 다 하는 사이로 진전됐다.

그러나 북한측은 정상회담에 응해줄 듯하면서 차일피일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3당 합당이 되고 박씨에 대한 정치권의 견제가 거세지면서 박씨의 힘이 약해졌고, 북한측은 회담을 기피했다. 결국 박씨가 주선한 남북 정상회담은 6공화국 기간 중 성사되지 못했다.

1989년 2월 2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북한 방문을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9일간의 북한 방문을 마친 정 명예회장이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자ㅁ 안기부 직원이 달라 붙으며 “기자회견을 하지 말고 안기부로 갑시다”고말했다. 정 명예회장은 예정된 기자회견 대신에 간략한 인사말만 남기고 안기부로 가자는 요구를 거절하고 청와대로 향했다. 청와대에서는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정 명예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 회장은 금강산 공동개발, 시베리아 개발을 위한 철도차량 공장에 대한 합작 추진 등 북한의 최수길 대성은행 이사장 겸 조선아시아 무역추진위원회 고문과의 합의내용을 박씨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나서 10분 정도 흘러 정 명예회장은 안기부로 달려갰다. 박철언씨의 북방외교는 안기부도 모르게 진행됐고, 그래서 박세직 안기부장의 심한 견제를 받았다.

박씨는 중간평가 유보, 3당 통합 등 대통령의 주요 정치적 결정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고, 그래서 그에 대한 정치권의 견제가 심했다. 3당 통합후 반YS 노선을 분명히 하는 바람에 김영삼 진영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아 정무장관 직에서 물러나는등 손해를 보기도 했다.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한 3당 통합의 실무주역을 맡았던 그는 내각제 합의가 파기되자, 대통령과 문서로 약속한 사안마저 지키지 않았던 사람과 당을 같이 할수 없다며 민자등을 탈당, 반YS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사돈인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금융실명제를 유보하는 자문을 했다. 1989년말 전경련을 중심으로 재계는 금융실명제에 대한 반대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최 회장은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장을 맡고 있었고, 여기서는 금융실명제에 대한 문제점, 보완대책 등이 검토되고 있었다.

최 회장은 사돈인 노 대통령을 찾아가 실명제를 실시하면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며 실시 보류를 설득했다. 노 대통령은 이듬해 초 최 회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실명제 실시를 보류했다.

노 대통령의 친인척으로 주목을 받았던 또다른 인물은 노 대통령의 처남인 김복동씨. 김씨는 경제 쪽보다는 정치 쪽에서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국제문제전략연구소를 설립해 이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김씨는 13대 총선에서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려 했다. 그러나 동생이자 영부인인 김옥숙씨가 “우리 집안 망하는 것을 보려고 하느냐”고 눈물로 말리는 바람에 출마를 포기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친인척들 가운데 재벌기업을 이끌고 있던 최종현 회장을 제외하고는 금진호·박철언·김복동씨는 모두 14대 국회에 진출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