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신라, 서역과 통하다…월성에 이란인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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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신라, 서역과 통하다…월성에 이란인 얼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5.16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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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전한 묵호자 얼굴일까…성벽에서 제물로 쓴 인골 2구도 발굴

 

엄청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바로 신라 초기 궁궐터인 경주 월성에서다.

월성 발굴터에서는 ① 이란계 소그드인으로 추정되는 터번을 쓴 토우 ② 성벽 쌓기에 제물로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뼈 2구 ③ 연대를 측정할수 있는 병오년(丙午年) 간지가 적혀 있는 목간이 1,500년의 역사를 뚫고 세상에 나왔다.

▲ 소그드 위치 / 위키피디아

하나 하나가 중요한 유물로 우리 역사의 뿌리인 신라사를 고증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경주 월성(사적 제16호)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에서 이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16일 발표했다.

이번 발굴에서 소그드인으로 추정되는 터번을 쓴 토우가 발굴됨으로써 신라가 일찍부터 서역과 교류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라와 서역의 교류 시기를 지금까지 통일신라 때로 보던 것을 6세기대로 앞당기게 됐다.

 

① 소그드인으로 추정되는 터번 쓴 토우

 

해자에서 흙으로 형상을 빚은 토우(土偶)들이 여럿 출토됐다. 모양은 사람과 동물, 말 탄 사람 등 다양하다. 그중 주목할만한 것은 터번을 쓴 토우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발굴된 터번 토우는 눈이 깊고, 끝자락이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있다. 팔 부분이 소매가 좁은 카프탄을 입고 있으며 허리가 꼭 맞아 신체 윤곽선이 드러나고 무릎을 살짝 덮은 모양이다. 당(唐)나라 시대에 호복(胡服)이라고 불리던 소그드인 옷과 모양이 유사하여 페르시아 복식의 영향을 받은 소그드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6세기 토우로써 추정되기 때문에 현재까지 출토된 소그드인 추정 토우 중 가장 이른 시기로 판단된다.

▲ 경주 괘릉의 무인석 / 문화재청

그동안 경주 괘릉(掛陵)에 서역 소그드인의 얼굴로 추정되는 무인석을 통해 통일 시대인 8세기에 신라가 서역과 교류를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통일 이전인 6세기(지증왕~진평왕)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호인(胡人)상을 한 흙 인형이 발굴됨에 따라 서약과의 교류 시기를 앞당기는 계기를 마련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조에 따르면 “눌지왕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인 모례(毛禮)가 자기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신라에 불교를 전한 묵호자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피부 색깔이 검은(墨) 서역인(胡子)’이란 견해가 있다. 또 비처왕(소지왕) 때 “아도(阿道)가 시중드는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고 한다.

눌지왕(417~458)과 소지왕(479~500)은 5세기때 마립간들이다.

묵호자, 아도 등 이차돈의 순교에 앞서 신라에 불교를 전한 이들이 모두 서역인이고, 그들의 모습이 월성 토우에 그려진 것이 아닐까.

▲ 경주 월성 발굴현장 출토 유물 - 터번 쓴 토우 /문화재청
▲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소그드인 토우 /문화재청

 

* 소그드인(Sogd人, 속특 粟特):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를 근거지로 하는 현재의 이란계(系) 주민

* 카프탄: 터키, 아라비아 등 이슬람문화권에서 폭넓게 착용되는 셔츠양식의 긴 의상

 

② 성벽 내부에서 인골 2구…제물로 사용한 흔적

 

월성 서쪽의 성벽을 조사한 결과, 축조연대는 5세기 전후로 판단되며, 국내에서 최초로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제의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인골은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기 직전인 기초층에서 두 구가 출토되었다. 한 구는 정면으로 똑바로 누워 있고, 다른 한 구는 반대편 인골을 바라보게끔 얼굴과 한쪽 팔이 약간 돌려져 있다. 두 구 모두 얼굴 주변에 수피(樹皮, 나무껍질)가 부분적으로 확인됐다.

이처럼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인골이 확인된 국내 사례는 월성이 최초다. 주거지 혹은 성벽의 건축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습속은 고대 중국(BC 1,600~1,000경, 상(商)나라(殷나라)에서 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제방이나 건물의 축조와 관련된 인주(人柱) 설화로만 전해져 오다가 이번에 그와 같은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셈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측은 발굴된 인골의 성별‧연령 등을 확인하기 위해 체질인류학적 분석과 DNA 분석, 콜라겐 분석을 자연과학적 연구를 하고 있다. 또한 식생활 복원, 기생충 유무 확인을 위한 골반 주변 토양 분석 등도 연구 중이다. 뼈는 당시 사람들의 체질적 특성이나 인구 구조, 질병 및 건강 상태, 식생활, 유전적 특성 등을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연구소측은 밝혔다.

 

▲ /문화재청

 

* 인주 설화: 사람을 기둥으로 세우거나 주춧돌 아래에 묻으면 제방이나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설화, 『고려사』충혜왕 4년(1343년)에 전하기를 ‘왕이 민가의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묻는다’라는 유언비어가 돌았다고 한다.

 

③ 6세기에 이미 이두 사용

 

월성 해자에서는 목간도 7점 나왔다. 이들 목간을 통해 ▲ 목간 제작 연대와 해자를 사용한 시기 ▲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 유력자를 통해 노동력을 동원, 감독한 사실 ▲ 가장 이른 시기의 이두(吏讀)사용 사실을 확인했다.

‘병오년(丙午年)’이라고 적힌 목간은 월성해자 출토 목간 중 정확한 연대가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병오년은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기 때문에 법흥왕13년(526년)이나 진평왕8년(586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월성의 사용 시기를 확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6세기 신라의 활발한 문자활동도 증명해준다.

지방민에게 주어지던 관직을 의미하는 ‘일벌(一伐)’, ‘간지(干支)’이라고 적힌 목간은 노동을 의미하는 ‘공(功)’과 함께 연결되어 왕경 정비 사업에 지방민이 동원되었고 그들을 지방 유력자가 감독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6세기 동안 이루어진 진흥왕12년(551년)의 명활산성 축성, 진평왕13년(591년)의 남산신성 축성 등의 큰 공사에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에 행사한 통제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 다른 목간에 적힌 글자인 ‘백견(白遣)’은 이두의‘ᄉᆞᆲ고’, 즉‘사뢰고(아뢰고)’라는 의미이며, 신라 왕경 내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이두로 판단된다.

이 외에도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관직명인 ‘전중대등(典中大等)’, 유학(儒學)이 퍼져 중국 주(周)나라 주공(周公)을 모방하여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이는 ‘주공지(周公智)’, 당시의 동물과 식생활을 추정할 수 있는 ‘닭(鷄)’과 ‘꿩(雉)’ 그리고 ‘안두(安豆)’등의 글자가 적힌 목간도 확인되었다.

 

* 이두: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방법, 신라의 특징적인 표기법

* 전태등(典太等): 왕명 출납과 조세를 관장하던 관청의 우두머리

* 주공지(周公智): 주공은 중국 주나라 무왕의 동생 이름. 지는 이름 뒤에 붙는 어미

* 안두(安豆): 녹두(綠豆) 또는 완두(豌豆)로 추정

 

▲ 경주 월성터에서 발견된 목간 /문화재청

 

④ 동식물 등 다양한 유물 출토

 

이외에도 동물뼈, 식물유체, 목제유물 등 다양한 자료들이 해자에서 출토됐다. 동물뼈는 돼지, 소, 말, 개가 가장 많이 출토됐다. 특이한 것은 곰의 뼈가 출토된 것이다. 곰은 신라 시대 유적에서 최초로 확인된 동물유체로서, 유입과정과 사용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 또 멧돼지나 개의 머리뼈를 절단‧타격한 흔적, 작은 칼과 같은 도구로 다듬은 흔적에서 도살과 해체 작업을 엿볼 수 있었다. 소의 어깨뼈에 새긴 동그란 흔적을 통해 뼈 자체를 사용하고자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식물유체는 식물의 줄기와 잎, 열매, 씨앗 등으로 분류된다. 씨앗류가 가장 많이 출토됐다. 그중에서 특히, 가시연꽃(산림청 지정 희귀식물) 씨앗이 가장 많다.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식물로, 당시 해자 내 물의 흐름, 깊이, 수질 등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곡류, 채소류, 과실류의 씨앗이 양호한 보존 상태로 확인되고 있어 당시 식생활을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목제유물은 빗, 국자, 목제그릇, 칠기(漆器:옷칠) 등의 생활도구, 나무와 나무를 잇는 건축재료 등 다양하다. 특히, 이번에 출토된 얼레빗은 손칼(刀子), 작은 톱 등으로 정교하게 제작한 흔적을 찾을 수 있어 제작 기법 뿐 아니라 제작도구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또한, 검은 색과 붉은 색으로 채색하고 손잡이를 나무못으로 부착한 목제품과 붉은 색으로 채색된 목제품 등도 출토되었다.

 

* 얼레빗: 빗살이 굵고 성긴 빗

 

⑤ 여러층 겹쌓은 해자

 

월성 북쪽 면에 길게 늘어서 있는 해자의 경우 2015년 12월부터 지금까지 내부 정밀보완조사를 진행해 왔다. 조사 결과, 해자가 약 500년 동안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의 변화를 거치며 지속해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수혈해자는 월성 성벽을 둘러싼 최초의 해자로서, 성벽 북쪽에 바닥층을 U자 모양으로 파서 만들었으며, 해자 가장자리가 유실되거나 이물질을 막기 위한 판자벽을 세웠다.

석축해자는 수혈해자 상층에 석재를 쌓아올려 조성하였으며, 독립된 각각의 해자는 입‧출수구로 연결되어 있다. 해자는 시간이 가면서 다시 쌓거나 보강하면서 폭이 좁아졌으며, 내부 토층별 출토 유물을 분류해본 결과 수혈해자는 5~7세기, 석축해자는 8세기 이후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월성 성벽과 해자의 조성 순서를 확인한 결과, 성벽을 먼저 쌓고 이후 최초의 수혈해자를 팠던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 성벽과 해자를 다시 쌓거나 보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벽 경사면에 해자의 석축호안을 쌓는 등, 유기적으로 축조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해자(垓字):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

* 판자벽은 약 1.5m간격 나무기둥을 박고 두께 약 5cm의 판자를 세우는 방식으로 조성

 

▲ /문화재청

 

⑥ 월성은 토성(土城)

 

경주 월성 조사구역은 총면적 22만 2천㎡규모로 편의상 A, B, C, D 등 총 네 지구로 나뉘어 있다. A지구(월성 서편지구)는 2015년 6월 발굴조사가 시작된 곳인데, 이곳의 발굴조사를 통해서는 서쪽에 있는 성벽이 5세기에 처음으로 축조되었고 6세기에 최종적으로 보수되었던 사실을 확인했으며, 문이 있던 자리는 이미 유실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월성 성벽은 훍으로 만든 토성(土城)이며, 성질이 다른 흙을 서로 번갈아 가면서 쌓아올리는 성토(盛土) 기술로 축조했다. 성벽 최상부에는 사람 머리 크기 만한 돌이 4~5단 가량 무질서하게 깔려 있었다. 이는 흙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기능으로 보이며, 월성의 특징 중 하나다.

 

* 경주 월성은 편의상 월정교와 인접한 서편부터 A~D지구와 외부를 감싸는 해자 등으로 나누어 발굴조사 중이며, 현재는 중심부인 C지구와 서편 A지구(문지‧성벽), 해자지구를 조사 중임

* 발굴조사 현장: 경상북도 경주시 교촌안길 38 신라월성학술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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