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보신각 종소리에 여닫던 한양의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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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보신각 종소리에 여닫던 한양의 관문
  • 김송현 기자
  • 승인 2017.05.0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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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 편액…관악산 화기 누르기 위해 횃불모양으로 글씨 배열

 

남대문은 조선 도성 한양(漢陽)의 관문이다. 서울 사람들에겐 매일 출퇴근하며 보기 때문에 너무나 익숙하는 건축물이다. 하지만 시골 사람이 서울에 처음 올라와 남대문을 바라보면, 그제서야 서울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모처럼 저녁 약속이 근처에 있어 남대문을 들러보았다. 너무나 익숙한 성문이지만, 그래도 핸드폰을 꺼내 기념사진을 한 장 찍어두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해 궁궐과 한양도성을 쌓았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태조 5년(1396년) 9월 24일>

숭례문이 정식명칭이고, 남대문은 속칭이라고 실록에 쓰여 있다.

 

▲ 화재후 복원된 숭례문 /사진=김인영

 

국보 1호에 대한 논란이 심각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는 것이 국보 1호는 남대문, 보물1호는 동대문이라는 것이었다. 국보 1호를 남대문으로 하는 것에 대해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았고 당연시 생각했다.

숭례문을 절대시하는 우리에게 국보1호에 대한 도전은 참 생소하다. 사실 국보에 대한 번호매김은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됐다. 지금의 서울시청격인 경성부청에서 제일 가까운 사적지를 일련번호로 매기면서 숭례문이 朝鮮古跡1호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1호가 갖고 있는 무게는 숭례문의 큰 지붕의 무게만큼이나 우리에게 각별하다. 국보 1호가 숭례문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훈민정음 해례본이 되어야하는가? 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는 자체가 어쩌면 숭례문의 위상을 더 견고히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숭례문은 한양도성, 총 길이 18.6km로 둘러쌓인 성곽 중 가장 남쪽에 설치된 문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1393년부터 지어졌다는 한양도성의 제1 관문이다.

조선의 중심 漢陽, 그 한양의 가장 중심되는 대문이었기에 한양에 올라와 저 멀리 뵈는 숭례문은 감동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저 문을 통과해 한양 땅을 밟으면 임금님이 사는 궁궐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 조선의 모든 문화와 진기한 물산이 집결된 곳, 저 꿈에 그리던 한양을 숭례문만 통과하면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에서 한양을 구경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사람이나 되었을까?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후 인왕산과 안산,백악산중 과연 어떤 산을 한양의 주산으로 삼을 것인가하는 주산 논쟁 가운데 경복궁의 뒷산인 白岳山을 主山으로 정했다.주산을 어디로 정하느냐에 따라 자연히 한양의 전체 디자인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리고 4개의 內四山 (백악, 인왕, 낙산, 목멱산)과 4개의 외사산 (삼각산, 관악산, 덕양산, 용마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만들었다. 내사산 4개에 빙 둘러서 성곽을 쌓았으니 이름하야 漢陽都城이다. 서울시에서는 이 한양도성을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한다며 시동을 걸고 있다. 그 내사산의 남쪽 문이 숭례문이다. 실제로 유교의 5가지 덕목인 仁,義,禮,智,信에 따라 한 글자씩 따와서 문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崇禮門(예), 興仁之門(인), 敦義門(의), 肅靖門 (지혜지(智)자를 써야하나 변화를 주기위해 비슷한 글자인 꾀 정(靖)자를 씀), 그러면 하나 남는 글자 信은 어디에 붙였을까? 한양도성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普信閣에 썼다. 현재 남아 우리가 볼 수 있는 문은 숭례문과 흥인지문이고, 숙정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 정상부에 복원되어 있다.

 

▲ 세로로 쓰여진 숭례문 편액

그런데 또 다른 의문하나. 왜 숭례문은 글씨의 편액이 세로로 되었는가이다. 흥인지문을 비롯해서 모든 문의 편액이 가로쓰기가 보편화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이를 기이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 비밀스런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외사산의 남쪽산인 관악산은 火山이다. 그 화기를 누르기 위해서 횃불모양으로 글씨를 배열하다보니 세로로 쓰인 것이다. 자, 관악산의 화기가 남쪽으로부터 올라오다가 한강에서 1차 관문을 지나 불길을 누그러트리고 계속 직진한다.

숭례문 옆에는 南池라하여 작은 못이 있었다. 남지의 물을 만나 화기가 누그러지고 두 번째 관문과 세 번째 관문인 崇禮門 편액을 만나 다시 불기운이 소멸된다. 그래도 남아있는 화기는 현재의 일직선상인 태평로로 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태평로가 없었다. 태평로는 1897년 명성황후의 국장때서야 비로소 길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남대문로로 가서 보신각을 통해 경복궁에 이르렀다. 그 휘어진 길을 통과해 경복궁에 닿는다 해도 이제 경복궁의 獬豸상이 기다린다. 우리의 궁궐은 목조인 까닭에 여러 번의 화마를 누그러트리는 풍수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그러면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이 숭례문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는가?

보신각에서 저녁에 울리는 28번의 종소리(인정)에 맞춰 하루를 마감해야했고, 33번 울리는 罷漏에 맞추어 해가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했다. 저녁에 울리는 인정소리, 28번의 종소리는 하늘의 별이 잠드는 곳이라는 동양의 전통적 개념인 수(宿)의 28개 별자리를 의미했다. 보신각에서 울리는 그 28번의 인정 종소리에 맞추어 문을 닫았고, 하늘은 33개의 층으로 되었다는 불교의 33天 사상에 따라 33번의 종소리가 울리면 숭례문을 연 것이다.

보신각에서 왜 해마다 1월 1일에 33번의 종을 치는 줄 아는가? 그것은 앞에 말한 것과 같이 하루를 여는 33번의 종소리에 따라 한해를 열며 하늘의 천지신명에게 한 해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로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아침이 되기도 하고, 저녁이 되기도 하는 게 국보1호 숭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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