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가야 김씨의 참전
상태바
[이사부를 찾아서] 가야 김씨의 참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5.01 19: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관가야 김씨들이 경주 김씨 왕가와 함께 고구려 공략에 나서

 

단양 「적성비」에 등장하는 인물은 신라 왕국의 실세였다. 「적성비」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사서에 뚜렷하게 나오는 인물이 이사부, 비차부(比次夫), 무력(武力)이다. 두미지(豆彌智)는 탐지(眈知), 내례부지(內禮夫智)는 노리부(弩里夫)로 보는 견해가 있고, 깨진 글씨 가운데 □□부지는 거칠부(居柒夫)가 아니겠는가 하는 관측이 있다.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조(진흥왕 12년, 551년)에 거칠부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받은 장군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의 이름이 나온다.

비차부는 551년 거칠부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해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개 군을 획득하는 장수중 하나다. 거칠부와 함께 한강 이북 공격에 나선 8장군 가운데 한사람이며, 직급은 17관등중 6등급인 아찬이다. (비문에는 아간지(阿干支)로 표현됐다.)

잡찬 탐지(耽知)ㆍ파진찬 노부(奴夫)는 「적성비」의 두미지(豆彌智)와 내례부지(內禮夫智)로 추정된다. 1년 후에 탐지는 「적성비」 두미지의 직위 파진찬보다 상위인 잡찬, 노부는 「적성비」의 내례부지의 관직인 대아찬의 상위등급인 파진찬으로 승진해 있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적성비」에 등장하는 장군중 상당수가 승진해 한반도 중원공격의 선봉대로 나섰다고 보여진다.

 

「적성비」에는 또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해왕의 셋째 아들 무력이 나온다.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받들어지는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할아버지다. 김무력은 『삼국사기』에 자주 등장한다.

① 진흥왕 14년(553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신라본기」)

② 진흥왕 15년(554년)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신라본기」)

③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 (「열전」 김유신조)

김무력은 적성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아 신라가 한강 하류, 즉 오늘날 서울과 수도권 일대를 새 영토(新州)로 확보하고 초대 군주를 맡게 된다. 이듬해 신라가 백제와 대가야, 왜의 연합군과 관산성에서 사활을 건 전투를 벌일 때 무력은 신주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군을 괴멸시키고, 임금 성왕을 죽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 신라의 투구 (경주박물관) /사진=김인영

 

비석에 나오는 대아찬 내례부(內禮夫)는 누구인가. 학계에서는 적성비의 내례부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진흥왕 순수비」에서 노리부(弩里夫), 세종(世宗), 노종(奴宗), 노부(奴夫), 내부(內夫) 등 다양하게 표기된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노리부는 음을 표기한 것이고, 세종(世宗)은 이름의 뜻을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세(世)’는 ‘누리’를 뜻하고, ‘종(宗)’은 높은 사람의 이름 뒤에 붙이는 어미격으로 ‘부(夫)’와 일치한다. 이사부를 태종(苔宗), 거칠부를 황종(荒宗)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노종, 내부, 내례부 모두가 음과 뜻을 혼용하면서 쓴 동일인물의 다른 이름이라는 해석이다.

이 인물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해왕(『삼국유사』에선 구형왕)의 맏아들이다. 『삼국사기』에선 노종, 『삼국유사』에선 세종이라고 표현했다.

『삼국사기』엔 그의 활동이 여러차례 나타난다.

① 진흥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를 쳐서 죽령 이북 10개 군을 확보하는데, 거칠부 휘하의 장군 가운데 한사람이 파진찬 노부(奴夫)다.

② 진지왕 2년(577년) 10월, 백제가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침입하자, 임금이 이찬 세종(世宗)에게 명해 군대를 내, 일선 북쪽에서 그들을 공격해 쳐부수고 3천7백 명의 목을 베었다.

③ 진평왕 원년(579년)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고, 10년(서기 588년)에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마운령비와 북한산비에 내부(內夫)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인물이 역시 노리부이며, 적성비의 내례부도 노리부라고 한다.

학계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면 노리부는 적성비에서 대아찬으로 시작해 파진찬을 거쳐 상대등까지 승진한다. 아버지 구해왕이 항복과 동시에 상등(上等)의 직위를 받은데 이어 그의 맏아들 노종도 상대등을 했고, 관산성 전투의 주역인 동생 무력의 손자 김유신이 태대각간에 올라 가야 왕족이 4대에 걸쳐 신라에서 재상을 맡게 되는 셈이다.

『화랑세기』에는 세종과 노리부가 다른 인물로 나온다. 세종은 이사부가 지소태후와 결혼해 낳은 아들로 전군(殿君)의 칭호를 얻게 되고, 노리부는 진흥왕비인 사도부인의 오라비로 등장한다. 『화랑세기』의 위작논란이 있는 만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금석문을 토대로 세종과 노리부를 한사람으로 보는 역사학계의 분석이 옳은 것 같다.

 

그러면 거칠부는 어디에 있는가. 「적성비」가 건립된 다음해, 적성 이북지역 10개군의 고구려땅을 빼앗은 주역 거칠부는 비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 고고학자들 사이에 이름이 지워진 ‘□□부지’가 거칠부라는 추론이 있다.

하지만 적성비의 ‘□□부지’의 직위가 대아찬으로, 거칠부가 진흥왕 6년(545년)에 국사를 편찬한 공로로 파진찬으로 승진한 점을 감안하면 모순이 발생한다. 대아찬은 파진찬의 아래 등급으로, □□부지가 거칠부일 경우 「적성비」가 545년 이전에 설립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사부가 적성 주변에 있는 도살성과 금현성 등 2개성을 뺏은 것(550년)을 계기로 소백산맥 이북의 신라거점이 형성되고, 그 무렵 적성비가 건립됐다고 보는 것이 순리적이어서 지워진 사람이 거칠부가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주보돈 교수(경북대)는 확인하기 어려운 ‘□□부지’라는 인물이 거칠부로 추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적성비 건립연대를 진흥왕 11년(550년)으로 보았다.

거칠부는 이 곳 적성을 전초기지로 해서 다음해 고구려를 공격해 10개군을 탈취한 것은 분명하다. 「적성비「 건립의 시점을 기준으로 이사부와 거칠부가 야전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교대하게 된다.

 

비문에 나오는 고두림성(高頭林城)과 추문촌(鄒文村), 물사벌성(勿思伐城)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신라가 경상도 일대의 군사관할권을 상주(上州)와 하주(下州)로 나눠 각주에 군주를 파견했는데, 상주에는 두명의 군주를 둔 것으로 보인다. 주보돈 교수는 고두림성이 상주이고, 추문촌(의성군 의성읍), 물사벌성(예천군 예천읍)은 상주 관할의 지역명이고, 그 지역의 군대 수장을 당주(幢主)로 보았다.

즉 소백산 이남 지역에 배치된 신라군이 동원돼 죽령을 넘어 적성을 함락한 것이다. 구해왕의 셋째 아들 무력과 한강전투의 주역 비차부는 경상도 북부 지역의 군주로 군을 정비한 다음, 이사부의 지휘 아래 죽령을 넘어 적성 전투에 참가하고, 이후 지휘봉을 이어받은 거칠부 아래서 한강 유역과 관산성에서 백제, 고구려와 패권 싸움을 벌여 큰 전공을 세우게 된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