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역사기행⑧…“류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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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역사기행⑧…“류큐는 없었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4.27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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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미국등 태평양 세력은 류큐에 눈독…중국은 해양에 무관심

 

1879년 3월 27일 일본군이 슈리성을 점령하고 마지막왕 쇼타이(尙泰)를 일본 본토로 압송하면서 450년 류큐국은 숨을 거두었다. 이 소식이 곧바로 미국의 18대 대통령을 역임한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에게 전해졌다. 그는 남북전쟁 때 북군 총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고, 역대 어느 대통령에 비해 아시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고향 오하이오에 머물던 그는 곧바로 대륙횡단 철도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내려, 중국행 배를 잡아탔다. 요코하마에 들러 그는 5월 6일 홍콩에 도착해 샤먼(廈門), 상하이를 거쳐 27일 텐진(天津)에 도착했다. 그는 곧바로 청 조정의 실세 리훙장(李鴻章) 북양대신을 만났다. 곧이어 베이징에 가 청 황실의 공친왕(恭親王)을 만나고 다시 텐진으로 돌아와 리훙장을 방문했다.

당시엔 비행기도 없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머나먼 길을 마다하고 중국을 찾은 것은 류큐국 때문이었다. 일본이 류큐를 병탄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이 깨졌다고 그는 보았다.

 

그랜트와 공친왕과의 대화.

▲그랜트: 일본이 중국을 만족시켜 주려면 류큐에 대해 어떤 정책을 취하면 좋겠는가.

▲공친왕: 원래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 좋겠다.

▲그랜트: 류큐가 일본과 중국에 동시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말하는가.

▲공친왕: 우리는 류큐왕이 일본이든, 다른 어떤 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것에 관심이 없다. 다만 우리는 일본이 압송한 류큐왕을 원래대로 복귀시키기를 원한다. 그리고 일본군을 류큐에서 철수하고 그 섬들에 대한 독점적 주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다른 문제들은 협상할 용의가 있다.

공친왕은 원칙적인 입장만 설명했다. 그러나 리훙장은 달랐다. 그는 동양의 비스마르크로 알려져 있었던 인물이고, 국제정치의 현실적 역학 관계를 알고 있었다.

 

▲ 1879년 텐진에서 만난 율리시스 그랜트 미국 전대통령과 리훙장 북양대신. /위키피디아

 

그랜트와 리훙장과의 대화.

▲그랜트: 나는 미국의 현직 대통령 자격이 아니라, 은퇴한 민간인의 신분으로 귀국을 방문했다. 류큐 처리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왔다.

▲리훙장: 대청제국은 골치 아픈 국내외 문제로 류큐에는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 섬들이 당신네 나라에는 그렇게 중요한가.

▲그랜트: 류큐 열도는 미국의 국익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류큐는 비록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지정학적 중요성은 실로 크다. 류큐가 일본의 손에 들어가면 천하의 패권이 당신 나라에서 일본으로 넘어 가게 될 것이다.

▲리훙장: 왜구의 소굴이었던 일본이 작은 섬 몇 개 더 얻었다고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된다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조약을 체결한 류큐가 일본에 의해 무력으로 병탄된 것이 체면을 손상시킬 일이 될 것이다. 미국과 청국 사이에는 류큐 해역을 통과해 상하이로 오는 항로가 뚫려 있는데, 만일 청과 일본 사이에 무력 충돌이 생기면 귀국의 상선도 순조롭게 항행할수 없을 것이다. 대통령께서 류큐문제를 해결할 묘안이 있는가.

▲그랜트: 내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 류큐 군도의 북부 아마미 제도는 일본에게, 류큐 중부(오키나와)는 독립을 회복시키되, 청과 일본이 공동 관리하고, 류큐 남부 미야코와 이에야마 제도는 중국이 직접 통치하는 방안이다. 이 방안은 청과 일본, 류큐 3자에게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랜트는 류큐 3분할안을 제시했다.

이에 리훙장은 원칙론과 현실론을 오갔지만, 중재안을 마뜩치 않게 생각했다.

“류큐는 명나라 때부터 500년동안 중국에 조공해온 속국이다. 류큐 국왕도 대청제국 황제가 책봉해 왔다. 류큐의 모든 섬들은 우리 대청제국의 관할 하에 있다.”

하지만 리훙장은 어차피 힘으로 류큐를 다시 조공국으로 되돌릴수 없는 형편임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랜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일본으로 건너가 설득해 보라고 퉁쳤다.

“류큐는 속국이기 때문에 단 하나의 섬도 일본에 내줄 수 없다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힘이 따르지 못했다. 차선책으로 대통령의 류큐 3분안을 수락할 용의도 없지 않다.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서 설득해 주길 바란다.”

 

▲ 1979년 도쿄에서 메이지 천황을 접견하는 율리시스 그랜트 미국 전 대통령 /위키피디아

 

그랜트는 7월 도쿄에 도착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나 류큐문제에 대해 중재에 나설 의향이 있다고 제의했다. 이에 이토는 류큐 병합의 정당성을 적극 해명했다.

“류큐는 300년 동안 일본의 속국이었다. 류큐의 작은 섬들은 본래 일본 영역 내에 있었다. 류큐가 청에 조공을 바친 것은 중국과의 무역 형식을 취한 것일 뿐이며, 종주국과 속국 관계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랜트는 8월 13일 이토에게 류큐 3분안을 중재안으로 냈고, 리훙장에게 서한을 보낸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미국과 영국, 독일등 서양 국가들이 청나라에 군함과 무기를 지원해 류큐에 대한 군사행동을 강행할 것을 부추기고 있다는 루머가 돌았다. 이듬해 3월 이토는 그랜트의 류큐 3분안을 변형해 류큐 2분안을 제안했다. 그랜트가 설정한 3분안 중에서 중부와 북부를 일본이 지배하고 남부의 몇 개 섬을 청이 관할하는 내용이다.

일본은 그랜트에게 당초 3분안에 근거해 도쿄에 체류하고 있는 류큐 쇼타이왕에게 복위를 권유했지만, 그가 오키나와의 척박한 땅으로 돌아갈 의사가 없어, 하는 수 없이 2분안으로 개정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1890년 10월 20일 류큐 2분안을 핵심으로 하는 ‘류큐 조약’ 초안이 작성돼 청의 총리아문대신 선구이펀(沈桂芬)과 일본측 대표 이토가 서명했다.

이 초안이 비준을 위해 리훙장에게 넘어갔다. 리훙장은 비준에 앞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일본의 요구를 응할 경우 손해를 보고, 거절하면 보복을 당하게 된다. 일본에 대해 입장을 최대한 늦추는 ‘무대응 지연책’으로 가는 것이 최상책이다.” 그는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고, 끝내 초안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대응책은 무대책이나 다름없었다. 일본과 협상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일본의 류큐 점령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후에 량치차오(梁啓超)가 리훙장이 류큐 무대응 정책에 대해 세상물정을 전혀 몰랐던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 /그래픽=김인영

 

일본은 류큐를 삼킨 이후 제국주의 정책을 강화했다. 곧이 1895년 청일전쟁 승리로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대만을 합병하고, 1910년 조선을 집어삼켰다. 1932년 만주국을 세우고,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마침내 미국과 대결을 펼친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3년 11월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와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전후질서를 구상하기 위해 모였다. 여기서 합의된 내용이 11월 27일의 ‘카이로 선언’이다. 이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 중국은 연합국 3개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며 전후 일본 점령지의 처리에 합의했다.

카이로 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1914년 1차 대전이 시작된 이후 일본이 탈취,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도서는 원상 회복한다.

② 만주, 대만, 펑후도(膨湖島) 등 일본이 청으로부터 빼앗은 땅은 중국에 반환한다.

③ 조선은 ‘적당한 절차’(in due course)에 의하여 자주 독립시킨다.

이 합의에 의해 일본 패망과 함께 만주와 대만은 중국으로 반환되고, 조선은 독립을 회복한다. 여기서 류큐만이 제외되었다. 그러면 왜 류큐(오키나와)만 제외되었을까.

 

▲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 총통,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위키피디아

 

카이로 회담의 비화를 들여다보자.

미·영·중 세 나라 정상이 모여 회담을 진행하던 중 11월 23일 오후 7시경. 미·중 간에 첫 정상회담이 열렸다. 회담은 루스벨트 숙소에서 열렸다. 회담이 길어져 밤 늦은 시각에 루스벨트는 류큐를 중국에게 주겠다고 제의했다.

“류큐는 일본에 의해 불법 점령당한 섬들이다. 마땅히 탈환되어야 한다. 류큐는 중국과 지리으로,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중국이 원한다면 열도 전부를 넘겨주겠다.”

루스벨트의 제안에 장제스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류큐는 우선 미국과 미국이 공동 관리한 후, 국제신탁통치에 위탁해 관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틀후인 11월 23일 미중 정상회담이 다시 열렸다. 루스벨트는 류큐를 다시 거론했다.

“류큐의 미래에 대해 숙고해보았다. 타이완에서 규슈까지 서태평양를 가르는 류큐는 중국의 안보 방파제다. 중국이 타이완만 가져가고 류큐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타이완은 물론 중국 본토의 안보도 위협받게 될 것이다. 더구나 침략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에게 류큐를 놓아둘수 없다. 나는 류큐를 타이완과 펑후 열도와 함께 중국이 관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때도 장제스는 류큐를 마다했다.

장제스는 무슨 연유로 거져 주겠다는 류큐를 마다했을까. 여기에는 구구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첫째, 장제스의 마음 속에는 만주와 타이완만 있었고, 류큐는 없었다.

둘째, 장제스는 일본과의 싸움에서 얻는 것보다 중국 공산당을 궤멸시키는데 주력했다.

셋째, 장제스는 해양의 중요성을 몰랐다.

세가지 견해가 모두 조금씩 일리는 있다. 그중에서도 셋째, 중국은 해양의 중요성을 몰랐다는 것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대륙 중심의 국가였다. 오랫동안 북방 민족과 먼지 펄펄나는 중원에서 싸웠고, 당시까지만 해도 서쪽에는 공산당과, 북쪽과 동쪽에서는 일본군과 싸웠다. 아울러 명나라 이후 중국은 해금(海禁)정책을 취해왔다.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보다는 바다를 포기하는 정책을 추구했던 것이다.

어쨌든 장제스가 류큐를 얻지 못하고 우물쭈물 한 것은 큰 착오였다. 지금 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류큐의 최남단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며 뒤늦게 해양의 중요성을 깨닫을 때엔 긴 활처럼 동중국해를 가로막는 류큐 열도가 일본 영토가 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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