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연대기] ㊹ '전쟁과 대공황'은 기회였다...1930년대 할리우드의 황금시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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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연대기] ㊹ '전쟁과 대공황'은 기회였다...1930년대 할리우드의 황금시대 (중)
  • 문동열 우송대 테크노미디어융합학부 겸임교수
  • 승인 2021.12.04 0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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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진보의 시기에 항상 등장하는 독점과 기업의 대형화
기술의 진보로 도태되는 인프라를 흡수하며 성장
1930년대 할리우드 BIG 5, 지금의 구글, 애플 같은 빅테크 기업
문동열 우송대 겸임교수
문동열 우송대 겸임교수

[문동열 우송대 겸임교수] 세계 영화 시장의 메카라 불리는 할리우드. 한 때 전 세계 영화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할리우드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언제일까?

일부에서는 1910년대부터 이미 할리우드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고도 말한다.

실제로 이 때부터 세계 영화 시장에서의 할리우드의 파워가 커진 것은 사실이긴 하나, 이는 본격적인 황금기라기 보다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갈 곳 잃은 유럽 영화의 자산들이 미국에 대피한 것일 뿐 이를 할리우드의 황금기로 지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도 많다.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진정한 황금기가 시작된 시기에 대해 대부분은 1927년 최초의 유성 영화인 '재즈 싱어'의 등장이 일명 할리우드 클래식이라 불리는 초기 할리우드 황금기의 신호탄이라고 여긴다.

독점을 부른 돈 먹는 하마 사운드 필름

1927년 최초의 상업적인 사운드 필름인 '재즈 싱어'의 성공으로 사운드 영화의 시대가 열리고, 사운드 영화는 급속히 보급되어 갔다. 당초 워너 브라더스의 객기로 불렸던 사운드 실험이 성공적이었다는 인식이 업계에 만연하면서 1929년까지 대부분의 영화는 사운드를 영화에 채택하게 된다.

최초의 사운드 필름 장비인 Vitaphone을 데모 시연하는 장면. 사운드 필름의 출연은 필연적으로 산업의 변화를 낳게 된다. 출처: 위키피디아
최초의 사운드 필름 장비인 Vitaphone을 데모 시연하는 장면. 사운드 필름의 출연은 필연적으로 산업의 변화를 낳게 된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를 통해 영화는 단순한 그림의 나열에서 오디오를 포함한 종합 엔터테인먼트로서 발돋움을 하게 되었다. 사운드 필름의 시작은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도 일으켰는데, 바로 영화가 보다 자본 집약적인 산업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영사기와 극장만 필요했던 초기 영화 시장에서는 어느 정도의 자본만 있으면 누구나 영화 산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제작, 유통 그 어떤 분야도 그렇게 시장 진입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사운드 필름은 그 판도를 바꾸어 놓는다.

사운드 재생 장비를 포함해 기존의 극장을 사운드 필름에 대응 가능한 영화관으로 개조하는 데 최소 1만5000달러 (지금의 22만 달러)가 필요했다. 이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사운드 필름 제작비 자체가 올랐기 때문에 영화를 사오는 비용 역시 상승했다.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자본이 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재즈 싱어의 개봉 이후 2년도 안돼 터진 대공황은 개별 극장주의 부담을 악화시켰고, 결국 1930년까지 미국 전역을 통틀어 2만개가 넘는 극장 중 절반만이 사운드 시설을 갖출 수 밖에 없었다. 나머지 절반은 도태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콘텐츠 산업이 마찬가지지만, 기술의 진보는 사람들의 눈높이를 올려놓는다. 처음에는 영상이 돌아가기만 해도 만족했던 사람들이 소리를 듣게 되자, 더 이상 무성 영화에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기존의 무성 영화 제작자 입장에서 이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사운드 온 필름을 만드는 건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점점 영화 제작이나 극장 운영에 대한 난이도가 높아져 가기 시작했고, 마침 이 시기에 등장한 대형 스튜디오들은 자본력이 떨어지는 기존의 제작자나 극장주들로부터 이삭줍기를 하듯 흡수를 하기 시작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사운드 필름의 발명이 당시 소형 제작사나 극장주에게는 그렇게 기쁜 소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운드 영화임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 돈 주앙의 간판을 내 건 당시의 극장 모습. 사운드 필름은 기존 무성 영화를 빠르게 밀어냈다. 출처: 위키피디아
사운드 영화임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 돈 주앙의 간판을 내 건 당시의 극장 모습. 사운드 필름은 기존 무성 영화를 빠르게 밀어냈다. 출처: 위키피디아

전쟁과 대공황은 오히려 그들에게는 기회였다

사운드 필름의 발명이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불러온 1차적인 이유라면 환경적인 요인은 전쟁과 대공황이었다. 특히 대공황은 할리우드의 황금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화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유럽의 영화산업이 1차 세계대전으로 몰락하고 유럽 영화의 유산을 그대로 흡수한 미국의 영화 산업이 1920년대 들어 각종 기술의 도입과 발전으로 큰 성장을 이룩하면서 미국 영화 산업의 본거지인 할리우드는 세계 영화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당시 할리우드는 미국의 정치권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윌슨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미국 정부는 영화가 가진 선전 선동의 힘을 모병과 전쟁 자금 모집에 활용하기를 원했고 할리우드는 이에 동조하며 힘을 보탰다. 수많은 배우와 감독들이 미국의 전쟁 노력을 옹호하고 그들을 미화하기 위한 선전 영화에 동원되었고, 많은 제작자들은 이를 자비 또는 실 제작비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지원금으로 제작했다.

사운드 필름의 출연은 영화 제작비 상승의 가장 큰 요인이 되었고, 대부분의 자본력이 떨어지는 독립제작사는 사운드 필름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큰 장벽이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사운드 필름의 출연은 영화 제작비 상승의 가장 큰 요인이 되었고, 대부분의 자본력이 떨어지는 독립제작사는 사운드 필름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큰 장벽이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러한 정부와 할리우드의 유착관계는 대공황 시기에 남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말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영화계에 대해 ‘국민의 사기가 그 어느때보다 낮았던 대공황의 시기에 미국인들이 단 15센트짜리의 영화로 웃는 얼굴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는 치사를 남겼다.

말그대로 할리우드의 대형 스튜디오들은 대공황 시기에 가장 저렴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함으로써 미국 사회의 안정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1930년대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은 할리우드는 심리적인 공황 상태에 빠진 대중들에게 큰 위안을 제공했다.

여유가 없던 이들이 그나마 시름을 잊고 얼마 동안이나마 영화를 통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대공황이 가장 심했던 시기에도 매주 6천만명에서 8천만명의 미국인들이 영화를 관람했다는 통계에서도 이를 알 수 있을 정도다. 문제는 그렇게 싼 가격에 공급이 가능했던 이유가 그들이 시장을 독점했기 때문이라는 아이러니에 있었다.

기술 진보의 시기에 기술 개발에 투자한 기업들이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거나 대기업으로 성장해 가는 것은 지금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일이다. 일명 빅 테크로 불리는 기업들이 다 그런 전철들을 밟아왔다.

영화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사운드 필름의 등장과 전쟁과 대공황에 시기에 등장한 메이저들은 덩치를 크게 불리며 살아남았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가 찾아오자, 패러다임의 변화와 사회적 위기 속에서 성장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은 반독점법이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나게 된다. 할리우드 황금기로 상징되는 1930년대의 전성기가 서서히 몰락해 가는 징조였다. (계속)

●문동열 교수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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