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역사기행⑤…사쓰마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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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역사기행⑤…사쓰마의 침공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4.18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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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지원거부 빌미…평화에 빠진 류큐, 저항도 못했다

 

나라를 세우기는 어려워도, 망하기는 쉬운 것일까. 곳곳에 할거하고 있던 지방 호족들을 제압하고 통일한 류큐왕국은 번영기를 잠시 보내고, 일본 큐슈의 일개 번(蕃)에 불과한 사쓰마(薩摩)에 의해 무기력하게 정복당했다. 국방력 없는 경제 번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우쳐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16세기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쓰러진후 일본 열도의 실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로 돌아갔다. 도요토미는 1587년 반대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일본을 통일한다. 그의 다음 목표는 조선이었다. 그는 대마도주에게 명해 조선에 명나라를 침공할 길(征明假道)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은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전국(戰國)시대가 끝나고 일본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은 류큐국에도 위협으로 다가왔다. 도요토미 막부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공을 위한 전쟁준비를 하달했다. 그 명령이 명나라-조선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던 독립왕국 류큐에도 떨어졌다. 도요토미의 명령을 수행한 곳은 류큐와 경쟁적 관계에 있었던 사쓰마(현재의 가고시마)의 시마즈(島津) 가문이었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8개월전인 1591년 8월 사쓰마번의 시마즈에게 조선 침공을 위해 1만5천명의 군역 부담을 명했다. 시마즈는 이 군역의 절반을 류큐에 떠넘겼다. 그해 10월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는 류큐의 쇼네이(尚寧)왕에게 히데요시의 지시를 통보했다.

“히데요시가 류큐와 사쓰마에 병력 1만5천명을 동원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류큐는 멀리 있는 나라이고, 류큐군이 일본군의 전략에 익숙치 않다. 따라서 병력 동원에 류큐는 면제해주겠다. 대신에 7천명의 병력이 먹을 열달치 식량을 준비하라”

사쓰마번이 류큐국에 요구한 것은 식량 1만1,250석과 황금 8천냥이었다.

류큐의 쇼네이왕은 이를 거부했다. 동시에 총리격인 삼사관 정형(鄭逈)을 명나라에 보내 도요토미가 조선과 명나라를 치려한다는 사실을 보고케 했다.

사쓰마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뎃포(鐵砲)가 전래된 곳이다. 임진왜란 발발 50년전인 1543년에 가고시마 남쪽의 다네가섬(種子島)에 표류하던 포르투갈인이 화승총인 조총(鳥銃)의 제조법을 전했고, 사쓰마는 조총의 대량생산에 성공했다. 조총의 위력은 대단했다. 오나 노부나가도 뎃포의 위력으로 전국을 제패했고, 왜병들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조선을 침공했다.

쇼네이왕도 사쓰마의 무장력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초에 요구하는 군비 모두를 준비할수 없으니, 요구한 물량의 절반이라도 받아달라고 했고, 사쓰마도 마지못해 응했다.

여기서부터 사쓰마는 언젠가 류큐에 복수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1593년 사쓰마는 류큐 사신을 억류하기도 했다.

 

▲ 쇼네이왕 /위키피디아

 

1598년 도요토미가 사망하면서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났다. 천하는 다시 요동쳤고, 최후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였다.

그러던 중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1602년 센다이(仙臺)번 영내에 류큐 선박이 좌초했는데, 도쿠가와의 명령에 따라 1603년에 류큐에 송환되었다. 이후 이에야스는 사쓰마를 통해 사은사 파견을 여러차례 요구했다. 그러나 류큐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한편 사쓰마는 류큐에 시마즈 가문의 운항허가서를 가지고 있지 않는 선박의 단속을 요구했고, 류큐 측이 이를 거부하자 류큐와 사쓰마의 우호 관계가 무너지고 적대 관계로 기울어 졌다.

1608년 9월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사신을 류큐에 보내 도쿠가와 막부의 초빙에 응하라고 설득했지만, 류큐 왕실은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사신으로 온 승려를 욕을 보였다. 결국 막부는 류큐를 정벌하라는 어지를 내렸고, 사쓰마의 시마즈씨는 이를 받아 류큐 정벌에 나섰다.

사쓰마의 병력은 군인 3천명, 전함 100척이었다. 대장군에 가바야마 히사타카(樺山久高)를, 부장군에는 히라타 마쓰무네(平田増宗)를 임명했다. 1609년 3월 1일 병력은 야마카와(山川)항에 집결해 번주인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의 사열은 받은뒤 순풍을 기다려 4일 새벽에 출항했다.

 

▲ 일본 가고시마현 야마가와의 한 신사에 위치한 사쓰마의 류큐 정벌 유적지비 /위키피디아

 

오키나와 본섬에 처들어가기 이전에 류큐의 저항은 없었다. 사쓰마군은 여러 섬을 거쳐 4월 7일 류큐 영토인 아마미오 섬에 도착했다. 주민들은 사쓰마군에 협력했다. 현지 족장들은 주민들에게 사쓰마에 항복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사쓰마군은 북쪽에서부터 차례로 섬 하나씩 점령해 들어갔지만, 류큐 사람들은 아무도 사쓰마의 침공을 쇼네이 국왕에게 전하지 않았다. 쇼네에왕이 사쓰마의 침공사실은 안 것은 4월 10일로, 외적의 공격을 받은지 한달이 훌쩍 지난후였다.

이런 정신빠진 나라는 당연히 망할 수밖에 없다. 일부 섬에서 저항이 있었지만, 사쓰마 군대의 포격으로 군중들이 줄행랑을 쳤다. 사쓰마의 대포 한방에 수십명의 섬 주민이 죽자, 남은 주민들은 무조건 항복했다.

4월 25일 사쓰마군은 드디어 오키나와섬 북부에 상륙해 나키진(今帰仁)성 일대를 점령했다. 수도 슈리성으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나키진이 함락되자 쇼네이왕은 다급해졌다. 그는 기쿠인(菊隠)이라는 불교지도자를 불러 명을 내렸다.

“당신은 시마즈 가문의 영주들과 잘 아는 사이가 아니오. 그러니 가서 평화 협상을 진행하고 오시오.”

기쿠인은 국왕의 특사로 임명돼 나키진으로 향했다. 기쿠안은 사쓰마 대장군 가바야마와 협상을 벌였지만, 가바야마의 기만전술에 휘말렸다. 가바야마는 협상을 슈리성의 외항인 나하항에서 하자고 했다. 기쿠안은 가바야마의 제안을 쇼네이에게 전했다.

5월 1일 사쓰마의 선단은 나하항에 진입했다. 나하의 오야미세(親見世)라는 곳에서 쇼네이왕과 가바야마 대장군 사이에 평화회담이 열렸다. 동시에 사쓰마 선단은 슈리성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나하항에 머물던 사쓰마군이 재빠르게 슈리성을 향해 움직였다.

사쓰마군은 애초부터 평화회담을 할 생각이 없었다. 류큐 국왕이 철저히 속은 것이다. 쇼네이왕은 동생인 쇼코(尚宏)와 3명의 대신을 사쓰마에 인질로 주었다. 바보같은 왕이다. 자신도 인질이 될줄 몰랐다니. 5월 5일 사쓰마군은 슈리성을 완전 접수했다. 사쓰마가 군대를 출항시킨지 두달만이다.

 

▲ /위키피디아

 

평화는 달콤한 것이다. 류큐왕국은 1429년 통일후 180년 동안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았다. 중국 명나라만 섬기면 되었고, 일본은 온국토가 전쟁터인 전국시대였다. 일본에 하나의 큰 세력이 형성되고, 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에도 류큐는 남의 일로만 여기고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무(武)보다 문(文)을 숭상했다.

류큐국은 '예의를 지키는 나라'(守禮之邦)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군비다운 군비를 갖추지 않고 있었다. 이미 15세기말부터 국왕은 호족(아지)을 슈리성에 불러 살게 하고, 아지와 부하들의 칼과 화살등 무기를 모두 거두어 들였다. 이는 국내 지배에는 편리했지만, 외적의 침입에 거의 대비할수 없게 만들었다. 무사안일의 단꿈에 사로잡혀 있던 류큐는 사쓰마라는 지방 번(藩)의 사무라이 3천명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다.

쇼네이왕은 무기력하게 나라를 빼앗겼다. 사쓰마군은 국왕은 물론 류큐 군신 100명을 배에 태우고 본토로 압송했다. 슈리성을 함락한지 12일째 되는 5월 17일이었다.

이듬해인 1610년 8월 쇼네이왕과 신하들은 아들에게 쇼군 자리를 물려주고 순푸(駿府)성에서 상왕 노릇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어 에도(江戸)로 가 도쿠가와 가문의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를 알현했다. 그리고 다시 사쓰마로 돌아왔다.

사쓰마에서 쇼네이왕과 고관들은 참기 어려운 수모를 당했다. 사쓰마는 국왕 석방 조건으로 여러 가지를 제시했다. 류큐는 영원히 사쓰마의 번속(속국)이 되어야 하며, 류큐왕이 사쓰마에 반할 때 신하와 백성들이 이에 협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저히 들어줄수 없는 조건이 제시됐다.

이런 썩어 문드러진 나라에도 충신은 있었다. 한때 류큐의 재상을 맡았던 정형(鄭逈)은 사쓰마의 침략행위를 비난하고 조건을 결코 수락할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사쓰마 번주 시마즈 다다쓰네는 쇼네이왕과 왕자,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형을 기름이 펄펄 끓는 솥에 뎐져 삶아 죽여 버렸다.

쇼네이 국왕은 기겁을 했다. (충신 정형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쇼네이는 죽을 때까지 거의 혼줄을 놓은 사람처럼 살았다고 한다.)

사쓰마는 15개 조항(掟十五ヶ条)을 제시했다. 쇼네이는 사쓰마의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주었다. 국왕과 그의 신하들은 번주 시마즈 다다쓰네 앞에서 류큐는 사쓰마의 속국이라고 선언하고, 조공을 바치며 사은사를 보내겠다고 맹서했다. 이에 사쓰마 번주는 국왕과 신하들이 귀국해 권좌를 회복할수 있도록 하겠다며 자애로운 은혜를 베풀었다. 치욕적이고, 굴종적인 맹약이었다.

그렇게 2년 6개월간 끌려다니다가 1611년 슈네이는 오키나와섬 슈리성으로 돌아왔다. 국왕이 압송되고 부재할 때 사쓰마 점령군의 가바야마 히사타카 대장군이 시마즈 가문을 대신해 통치하고 있었다. 사실상 시마스 가문의 직할령으로 떨어진 것이다.

국왕이 돌아왔을 때 통치는 허용되었지만, 류큐의 고위관료들은 사쓰마에 인질로 보내져야 했다.

류큐국은 형식적으로 번국과 차원이 다른 독립국(異国) 위치로 돌와왔다. 하지만 류큐국은 일본 사쓰마번의 위성국 또는 허수아비국가로 전락했다. 사쓰마와의 맹약에 의해 류큐는 해외 무역과 외교, 여향등이 사쓰마에 의해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류큐의 북방의 토카라지마등 5개 섬이 사쓰마로 빼앗겼다. 현재 류큐 열도 최북단의 섬들이 오키나와현이 아니라 가고시마현에 속하게 된 사연이다. 사쓰마는 류큐에 재번봉행(在蕃奉行)이라는 감독관을 슈리성에 상주케 했다.

사쓰마는 류큐가 중국에 대해 조공하는 것을 허락했다. 아직 중국을 두려워한 것이다. 따라서 류큐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나라에 의해 지배받는 이중 속국으로 전락했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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