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역사기행④…해상 무역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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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역사기행④…해상 무역대국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4.1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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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무역선이 일본·조선·중국은 물론 동남아 일대에서 활약

 

한반도와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공통점은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는 중국에 육지로 이어져 있고, 일본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오키나와는 중국과 일본을 바다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심지인 나하를 기준으로 중국 푸젠(福建)과의 거리가 오사카나 도쿄보다 가깝다.

따라서 일본 열도에서 전국(戰國)시대의 막이 내리기 이전까지 한반도와 오키나와는 중국과 가깝게 지냈다. 조선과 류큐국은 모두 중국에 조공하며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열도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라는 영웅들에 의해 통일되면서 일본의 침공을 받게 된다.

 

오키나와를 여행하면서 류큐국 왕성인 슈리(首里)성 뿐 아니라, 나키진(今歸仁)성, 자키미(座喜味)성, 가스렌(勝連)성, 나카구스쿠(中城)의 웅장한 성벽을 볼수 있다. 이들 성은 500년전 이 섬의 역사를 말없이 설명하고 있다.

오키나와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틀 바깥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했다. 적어도 500년전에는 일본은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를 제외한 3개 섬(혼슈, 큐슈, 시코쿠)의 나라였다. 오키나와엔 류큐국이라는 독립국이 존재했고, 홋카이도는 선주민인 아이누족의 자유로운 세상이었다.

 

▲ /위키피디아

12세기경 오키나와섬 각지역에 아지(按司)라 불리는 호족이 생겨냈다. 이들은 각지에 대규모 성(구스쿠)을 쌓고 세력권을 형성했다. 천연의 요새에 굽이굽이 쌓아 올린 성벽은 호족(아지)과 삼국의 왕들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음을 보여준다.

호족들이 서로 세력을 다투다가 점점 지역을 중심으로 호족 연합체가 형성됐다. 14세기초 류큐에는 3대 세력이 할거한다. 역사가들은 이를 남잔(南山) 츄잔(中山) 호쿠잔(北山)의 삼잔(三山)시대라고 일컫는다. 이중 중산국이 가장 강력했고, 북산국이 최약체였다.

중산국에 정변이 발생한다. 1406년 중산국 권력자 하시(巴志)는 국왕 부네이(武寧)의 폭정을 명분으로 세워 사토(察度) 왕조를 멸망시키고 중산국의 왕위를 찬탈했다. 하시는 슈리(首里)를 수도로 정하고 아버지 시쇼를 새로운 중산왕으로 받들었다. 하시 자신은 아버지를 보좌해 국정을 집정했다.

하시는 1416년 북산국을 쳐서 멸하고 차남 쇼츄(尚忠)를 북산국 칸슈(監守)로 삼아 북부를 안정시켰다. 1421년에 아버지 시쇼 왕이 서거하고 이듬해인 1422년 중산왕으로 즉위했다. 하시는 1429년 남산국에 대해 전쟁을 일으켜 남산국왕 다루미이(他魯毎)를 잡아 죽이고 남산국을 멸망시켰다. 이로써 쇼하시는 삼국을 통일하고, 류큐 열도에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이듬해인 1430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고, 명의 선덕제(宣德帝)는 하시에게 쇼(尚)라는 왕성(王姓)과 함께 류큐(琉球)라는 국호를 내렸다. 이후 중산국은 류큐국(琉球國)을 자처하게 되었다. 류큐 통일왕국의 초대국왕에 등극하는 쇼하시(尙巴志)를 1차 쇼씨(尙氏) 왕조의 개창자가 된다. 쇼하시는 1431년에 조선(朝鮮)에도 사신을 보냈다.

 

1차 쇼씨 왕조는 제7대 쇼토쿠(尙德)왕때 쿠에지마, 도쿠노지마등 오키나와 주변의 열도를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1469년 쿠데타에 의해 참살당한다. 이듬해 정권을 장악한 재무장관 금원(金圓)은 왕으로 추대되는데, 그는 명나라에 거짓말을 한다. 자신이 왕세자이며, 전왕이 세상을 떠나 부친상을 당했다고 보고했다. 명나라는 1472년 반역의 주모자에게 쇼엔(尙圓)이라는 이름을 주고 국왕으로 책봉했다. 이로써 제2차 쇼씨왕조가 탄생한다.

제2차 쇼씨왕조 제3대국왕인 쇼신(尙眞)왕 때는 류큐의 황금시기였다. 쇼신왕은 북으로 토카라 열도까지, 남으로는 미야코와 아에야미 열도를 정복해 류큐 열도 전역을 차지했다. 아울러 류큐에 품관제도, 신관제도, 조세제도를 정비하고 순장(殉葬)의 악순환을 폐지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또 류큐 군도의 족장들을 슈리성에 거주하게 하고, 개인의 무기 소지를 금지해 호족들의 반역을 금했다.

 

▲ 류큐의 무역선 /사진=김인영

 

이 무렵 류큐는 동아시아 해상왕국으로 가장 활약이 컸던 시기다.

쇼하시에 의해 통일된 류큐왕국은 중국(명나라)-조선과는 조공무역을 하고, 동남아시아 나라들과 중개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챙겼다. 이를 바탕으로 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류큐가 중국과 조공무역을 시작한 것은 14세기 중반 3산 시대부터였다. 1372년 중산국에 명나라 사절단이 왔다. 명의 사절단은 대륙에 원나라를 멸하고 명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음을 알리면서 신하의 예를 갖추도록 요구하자, 중산왕 사토(察度)가 이에 응해 사신을 보내고 조공품을 바친 것이 첫 조공무역이다. 이후 남산왕과 북산왕이 따랐고, 통일왕국의 쇼씨도 이어받았다. 50년이 안되는 3산 시대에 중산국은 42번, 남산국은 24번, 북산은 11번이나 명나라에 진공선을 보냈다.

류큐는 명나라에 2년에 한번씩 조공무역을 했는데, 이는 명나라 주변국 가운데 조선 다음으로 잦은 회수다.

명나라 황제는 진상품을 보낸 류큐 국왕에게 진상품의 두배 이상 값이 나가는 물건을 답례품을 하사했다. 또 류큐에서 보낸 진공선에는 조공품 이외에도 많은 상품을 실어 보냈는데, 명나라는 이를 바싼 가격을 사주었다. 중국은 신하국인 번국에서 조공품을 보내면 그의 몇배에 해당하는 물건을 보내 황제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웠다.

 

▲ 류큐국왕의 책봉의식 (슈리성 전시) /사진=김인영

 

중국으로부터 책봉도 이뤄졌다. 류큐에 신임 국왕이 즉위하면 2~3년 후에 책봉 사절을 보내 국왕 취임을 인정하는 절차를 밟았다.

조공무역으로 류큐에서 중국으로 간 물건은 말, 유황, 칼 종유, 부채, 병풍, 후추등 향신료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중국에서 가져온 물건은 도자기, 옷감, 철 제품 등이었다. 중국으로 보낸 조공품 가운데 칼과 부채는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고, 향신료는 동남아시아산이었는데, 이는 류큐가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일대에 걸쳐 활발한 무역활동을 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류큐 무역선은 일본의 사카이, 하카다, 조선의 부산, 중국의 푸저우, 광둥, 베트남, 타이, 말레이시아, 자바(인도네시아), 루손(필리핀)에 이르렀다.

 

▲ /위키피디아

 

14~16세기는 류큐역사에서 대교역의 황금시대였다.

일본 큐슈의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쳐들어오기 이전 2세기동안 류큐왕국은 남아시아와 동아시아의 중심으로서 해상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류큐는 중개무역을 했다. 일본에서는 은과 칼, 부채, 칠기(漆器)류, 병풍을 가져왔고, 중국에서는 의약품, 주조화폐, 도자기, 비단, 의류등을 가져와 동남아 국가에 팔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소방목(蘇方木), 동물의 뿔, 설탕, 주석류, 철강재, 용연향(향유고래에서 얻는 향료)를 사서 교역했다. 멀리 인도의 상아, 아라비아의 유향(乳香)도 무역했다.

류큐왕국의 실록(歴代宝案)에 따르면 왕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에 150회의 항해가 있었으며, 1424~1630년 사이에는 사이암(태국)으로 61회, 말래카(말레이시아) 10회, 파타니(태국) 10회, 자바(인도네시아)에 8회 무역선이 각각 항해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류큐귝의 무역활동은 중국의 해금(海禁) 정책에 의해 수난을 겪게 된다. 명나라는 왜구의 약탈적 무역을 차단하기 위해 바다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는데, 류큐에 대해서도 조공 이외의 무역을 금지했다. 그 결과 16세기 이후 류큐의 무역은 급감하게 된다. 그러다가 1609년 큐슈 가고시마의 사쓰마 사무라이에 에 의해 침공을 받는데, 쇠약해지고 있던 류큐의 무역활동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 이후 포르투갈 무역선이 동아시아에 출몰하면서 류큐는 해상왕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류큐의 지정학적 운명일 것이다. 강할 때 동아시아 해상을 주름잡았지만, 중국과 일본, 서양제국이 세력을 키우면서 바다를 잃게 되고, 점차 국권도 잃어가는 과정을 밟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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