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역사기행③…조선에 망명온 류큐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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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역사기행③…조선에 망명온 류큐국왕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4.1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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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물을 배워간 류큐국…조선과 수십 차례 조공무역 유지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①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서 전문(箋文)과 예물을 바치고, 피로되었던 남녀 12명을 돌려보내고서, 망명한 산남왕(山南王)의 아들 승찰도(承察度)를 돌려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 나라 세자 무녕(武寧)도 왕세자에게 글월을 올리고 예물을 바치었다. (태조 3년, 1394년 9월 9일)

② 유구국(琉球國)의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가 그 소속 15인을 거느리고 왔다. 사도(沙道)가 그 나라의 중산왕(中山王)에게 축출당하여 우리 나라의 진양(晉陽)에 와서 우거(寓居)하고 있으므로, 국가에서 해마다 의식(衣食)을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유리(流離)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어 의복과 쌀·콩을 주어 존휼(存恤)하였다. (태조 7년, 1398년 2월 16일)

③ 임금이 조회를 보았다.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 등이 조회하여 뵈었다. (태조 7년 4월 16일)

④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 등 7인이 조회에 참예하였다. (태조 7년 윤5월 21일)

⑤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가 죽었다. (태조 7년 10월 15일)

 

▲ 조선왕조실록에 산남왕 슬찰도에 관한 기록 /조선왕조실록 사이트

 

류큐(琉球)에도 우리나라처럼 삼국시대가 있었다. 1322년부터 1429년까지의 류큐 역사를 산잔(三山)시대라고 한다. 14세기초에 오키나와섬 남부에 난잔(南山 또는 山南), 중부에 추잔(中山), 북부에 호쿠잔(北山 또는 山北)이라는 세 나라가 섰다. 이 세 나라가 100여년 동안 세력싸움을 벌였다.

▲ 삼산시대의 류규국 /위키피디아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의 기록인 이 때의 이야기다.

산남왕 승찰도(承察度)는 왜 조선으로 망명해 왔을까. 조선실록만을 해석하면 승찰도가 중산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조선으로 망명했고, 중산국왕이 산남왕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는 것처럼 파악된다.

하지만 류큐 역사와 대조하면 다른 스토리를 발견하게 된다. 승찰도는 류큐 산남국의 초대 국왕으로 재임기간이 1314~1398년이다. 무려 84년이나 산남국을 다스렸다는 얘긴데, 신라 박혁거세(61년)보다 길다. 신화와 같은 기록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다만 승찰도가 조선왕조실록에 망명한 사실이 기록된 해가 1394년이다. 그런데 류큐에서는 그가 1398년에 임금 자리를 빼앗긴 것으로 나온다. 4년의 시간차가 발생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된다. 그러면 1398년 부하 15명을 거느리고 진양(경남 진주)에 머물던 온사도(溫沙道)는 누구인가. 일본측 자료를 뒤져보면 궁금증이 조금 풀린다.

승찰도는 명나라 실록에도 기록된 이름으로, 1380년과 83, 84, 85년 연이어 명 황제에 조공을 바쳤다. 그는 숙부인 오우에이시(汪英紫)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조선 이성계에게 몸을 의탁했다.

일본측 자료에 산남국 역대국왕 가운데 온사도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승찰도의 당대 류큐어 발음은 ‘오후사토’(うふさと)다. 온사도는 승찰도의 류큐식 발음과 비슷하다. 조선왕조실록 집필자들이 류큐어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우리 발음에 가깝게 변형시킨 것이 아닐까. 일본 학계에서는 중국측 기록에 나오는 承察度, 조선 기록에 나오는 承察度와 温沙道가 모두 동일인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쯤되면 실마리가 풀린다. 류큐국이 삼국으로 갈라져 있을 때 승찰도 또는 온사도라는 산남국왕이 숙부와의 권력다툼에서 실각하고 1394년 조선으로 망명했다. 왕위를 찬탈한 숙부가 이웃 중산국과 연합해 저항세력을 제압했고, 조선건국 때부터 조공해온 중산국이 나서 산남왕의 귀환을 촉구하게 된다. 조선 이성계는 산남왕을 돌려보내지 않고 보호한다.

숙부는 4년에 걸쳐 저항세력을 진압했고, 전왕파 15명이 1498년에 조선으로 2차로 망명한다. 조선과 류큐 사이에는 계절풍과 쿠로시오 해류를 이용한 바닷길이 발달해 있었다. 조선은 산남왕 일행을 따듯하고 바다를 끼고 있는 진주에 거주하게 한다. 이성계는 온사도를 후하게 대접했고, 조정에 불러 조회에 참석하도록 배려했다. 조선에 망명한 산남왕은 1398년 10월 15일 사망했다. 후임 산남국왕은 승찰도(또는 온사도)가 죽은 1398년부터 자신의 재임기간으로 기록한다. 정권을 찬탈했다는 내용을 숨기기 위해서일 것이다.

 

▲ 산북국의 수도인 나키진 구스쿠 /.사진=김인영

 

우리는 류큐 삼잔(三山)시대의 또다른 나라 산북국 수도였던 나키진(今帰仁)성을 찾았다. 나키진은 숙소인 나하에서 꽤 멀었다. 차를 렌트해서 그곳으로 갔는데, 뒤바뀐 방향감각이 영 불편했지만, 일본인들의 보수적인 운전관행, 한국어로 정확히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덕분에 어렵지 않게 나키진성에 도달했다.

해발 100m 정도 구릉에 세워진 이 성은 해변을 끼고 있다. 인근의 석회암을 깎아 만든 성이었다. 성을 둘러보면서 한국의 성을 둘러보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을 보는 느낌이었다.

오키나와는 13세기부터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여러 곳에 크고 작은 성곽들이 축성되었다. 본섬 북부에 45개소, 중부에 65개소, 남부에 113개소 등 300여개가 분포되어 있다.

일본 본토에서 성(城)의 ‘죠’(じょう)라고 하지만 오키나와에서는 ‘구스쿠’(グスク)라고 한다. 류큐 전역에서 구스쿠가 만들어지던 시기를 구스쿠시대라고 한다. 각지에 ‘아지’(按司)라고 하는 지방 세력이 구스쿠에 웅거해 세력을 확장해 갔으며, 지역의 세 유력자들이 아지들의 맹주로 나섰으니, 그것이 산남, 중산, 산북국이다.

나키진 구스쿠가 산북국의 수도였으니, 성은 오키나와에서 손꼽히는 구스쿠였다.

성은 산등선을 따라 축성 되어 있었다. 내부 공간은 평탄면과 굴절 계단형으로 축성되어 있다.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병풍상의 곡선을 이루며 축성했다. 전통적인 일본성과는 다르다.

오히려 고구려 城의 전통으로 알려진 치(雉)와 옹성들을 그대로 본받았다. 축성 시기에 사용된 철제 공구와 제작 기술들을 살펴 볼 때 외부로부터 상륙한 경험 있는 축성 기술력을 동원한 것 같다.

 

유구국의 역사와 유물을 들여다보면 일본 문화보다는 우리 문화와의 동질성을 많이 느낄수 있다. 지금은 인천공항에서 나하공항까지 비행기로 두시간 가면 되지만, 고려, 조선시대엔 배로 가야 했다. 제주도에서 오키나와까지 거리는 900~1,000km 정도. 배로 가려면 줄잡아 7~15일 걸린다. 하지만 이 정도의 거리는 뱃사람들에겐 가까운 거리다. 날씨와 해류만 좋다면….

▲ 진도용장산성 출토 수막새(왼쪽)와 오키나와 우라소에 출토 수막새.(사진/ 국립제주박물관)

2007년 6월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열린 '탐라와 유구(琉球) 왕국' 특별전은 우리 고고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때 전시된 류큐 유물 가운데 13~14세기에 만들어진 수막새 기와가 13세기 고려기와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게다가 1955년 오키나와 우라소에(浦添)에서 출토된 기와에서 『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해석하자면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와에 새겨져 있는 계유년은 언제일까. 고고학자들은 1273년으로 추정한다.

비슷한 연대의 고려기와는 우라소에성 뿐만 아니라 슈리성(首里城) 등 여러 곳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류큐는 고려, 조선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류큐 삼국시대에 중산국이 고려말부터 거래를 시작했으며, 조선조가 개국하던 1392년 중산왕 찰도(察度)가 이성계에게 신하라고 일컫는 글을 바치고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어민 8명을 되돌려 보냈다.

중산국이 1416년 산북왕국을, 1429년 산남왕국을 정복하면서 류큐 통일왕국을 수립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유구국은 40회에 걸쳐 조선에 사절단을 보낸 반면에 조선은 단 3차례 사절단을 유구에 보냈다. 류큐국이 조선보다 적극적으로 교류를 원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성종임금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인쇄본을 유구국에 선물하기도 했다.

▲ ‘만국진량의 종’(萬国津梁の鐘)에 새겨진 명문 /위키피다아

 

지금 오키나와 현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슈리성의 ‘만국진량의 종’(萬国津梁の鐘)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류큐국은 남해의 좋은 곳에 있는 나라로, 삼한(한국)의 우수함을 모아놓았고, 대명(중국)과 수레바퀴와 같은 관계이며, 일본에게는 순치(이와 입술)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가운데 솟아난 봉래도(낙원)이며, 선박 운항으로 만국의 가교가 되고 있다.』 (琉球国は南海の勝地にして、三韓の秀を鍾め、大明を以て輔車となし、日域を以て唇歯となす。此の二の中間に在りて湧出する蓬莱島なり。舟楫を以て万国の津梁となす)

1458년에 제작된 이 종은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슈리성이 완전 전소되는 와중에서도 가까스로 보존되었다. 일본 정부에 의해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이 종의 명문은 중국, 일본보다 삼한(한국)을 우선 언급했다. 류큐가 조선 문물의 우수함에 매료되어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1854~1879년의 류큐국기. 태극기와 닮아 있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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