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②] 마오 죽음으로 끝난 이념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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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②] 마오 죽음으로 끝난 이념 전쟁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4.0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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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 부부, 친구도 배척…결국 專이 紅을 이겨

 

<①편에서 계속>

 

▲ 5월의 마중 /영화포스터

딸 단단이 10년만에 만난 아버지 루옌스에게 말했다.

“난 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우린 보고 싶지 않아요.”

세 살때 헤어져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딸은 아빠에 대한 원망에 가득차 있었다.딸 단단은 10년만에 감옥에서 도망쳐온 아빠를 반동분자라 부르며 증오한다. 범죄자 아빠를 둔 탓에 무용 주연 자리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4년 국내에서도 개봉한 지예모 감독의 중국 영화 『5일의 마중』 (Coming Home, 歸來)는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문화대혁명기의 상하이 지식인의 일생을 그린 이 영화는 주인공 루옌스가 집으로 돌아오는 문화대혁명 이후까지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잘못된 사회적 사상이 어떻게 개인의 삶과 가정을 파괴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비극이 무엇인지를 여과 없이 그려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전개된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모든 것을 추락시킨 비극의 역사였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투옥되고 숙청되었으며 중국은 자기 나라를 빛낼 인재들을 잃었다.

주인공 루옌스는 반혁명분자로 몰려 감옥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딸 단단은 마오쩌둥 사상에 세뇌 당한 젊은 세대를 대표한다.

가까스로 풀려난 루옌스는 5일에 집에 간다는 편지를 보낸 후 돌아왔지만 아내는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고 딸은 아빠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가족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루옌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오늘도 펑은 달력에 동그라미를 친다.

문화대혁명은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점철돼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 믿지 못하는 비극을 만들었다. 문 하나만 열면 재회할 수 있는 남편과 부인은 지켜보는 눈들 탓에 반가움과 그리움이 섞인 눈물을 애써 삼켜낸다. ‘가족을 희생하고, 대신에 조국의 공을 세우라’고 부추기는 잔인한 시대였다.

남편 루가 돌아올 것이라 믿는 아내는 5일이면 마중을 나간다. 매번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 기차역이 텅 빌 때까지 아내는 남편을 기다린다. 오랜 세월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상대조차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만 것이다.

 

▲ 1966년 8월 16일 천안문 광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는 마오쩌둥. /위키피디아

 

부부, 부모와 자식 사이도 고발하는 사회

 

마오쩌둥(毛澤東) 세력의 타깃이 된 류사오치(劉少奇) 주석은 이념보다 실용(專)을 중시했고,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몰리고 있었던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를 지지하던 지식인들을 타깃으로 했다.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됐다.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조반파는 어린이들에게 마오를 부모 이상으로 떠받들도록 세뇌했다.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어린이들은 집에 와서 “지식인들이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기 때문에 타도해야 한다”고 앵무새처럼 주장했고, 영화속 루옌스와 같은 지식인들은 자녀들로부터 배척당해야 했다.

주로 중, 고등학교, 대학생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은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해야 한다면서, 그 일환으로 어린 학생들이 교사나 교수들을 구타하거나 공개적으로 수모를 주었다. 사회가 미쳐 돌아갔다.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손자가 할아버지를 타파 대상으로 고발해 처형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 반동분자를 홍위병 앞에서 수모를 주는 장면 /위키피디아

 

공산주의자들은 지식인을 싫어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 지식인을 숙청 대상으로 한 것도 다름 아니다.

어느 과학연구소에는 갑자기 노동자, 농민들이 쳐들어와 접수했다. 연구원들은 매일 정신교육과 자아비판을 받아야 했으며, 정신교육의 일환으로 남자 연구원들은 건설현장으로 보내져 벽돌을 나르고 쌓은 노동을 하고, 여성 연구원은 마을에서 이발 일을 해야 했다.

이른바 하방(下放)운동이다. 당·정부·군간부·지식인·학생들의 관료주의화를 방지하기 위해 농촌이나 공장에서 노동하는 일에 종사하도록 했다. 군간부들은 사병들과 함께 내무반에서 기거해야 했다. 중공(中共)이 수립된지 10여 년이 흐르는 사이 중앙 간부들에게서 안일함이 나타났고, 이를 타파하기 마오쩌둥이 하방을 강조한 것이다.

미국에서 유학까지 했던 한 연구소 연구원장은 정신개조를 해야 할 정도가 너무 커 썩은 냄새가 펄펄 나는 재래식 변소의 청소를 하고, 심하게 자아비판을 하면서 그 심한 모멸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했다.

중국 전역에서 인간관계가 무섭게 변했다. 친구 사이, 동창, 부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관점이 다르다고 반목하고 고발했다. 사회는 갈기갈기 찢어졌다.

▲ 난징대학의 대자보 /위키피디아

 

“누가 맞아 죽어도 우리 소관이 아니다”

 

1966년 8월 8일 마오쩌둥이 인민일보에 직접 “사령부를 파괴하라”라는 제목의 논평을 낸 이후 문화혁명은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이날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에 관한 결정 16개 항”을 발표했다. 이날 결의문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타도됐지만, 이들은 아직도 다른 계급을 착취하던 낡은 이념, 문화, 풍속, 관습을 이용하여 대중을 타락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이것의 반대로 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이념면에서 당면의 모든 부르조아 계급의 도전에 응전해야하며,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이념, 문화, 관습, 습관을 이용하여 모든 사회의 정신적 시야를 바꾸어야 한다.“

 

▲ '사령부를 폭파하라'는 내용의 모택동 논평이 실린 1966년 8월 8일자 인민일보 /위키피디아

 

이 결정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학생운동을 노동자, 농민, 그리고 병사들이 참여하는 전국규모의 대중운동으로 끌어올렸다. 목표는 ‘4구’(四舊)(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8월 16일, 전국에서 수백만명의 홍위병이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집결했다. 마오 주석을 회견하기 위해서였다. 마오쩌둥는 단상에 올라가 홍위병들이 혁명에서 보여준 행동을 칭찬했다.

4구 파괴 운동에서 홍위병은 모든 종교활동에 핍박을 가했다. 절, 서원, 교회, 수도원 등은 문을 닫았고,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핍박하다 못해 심문과 고문도 일어났고, 구타와 폭행을 견디지 못한 많은 이들이 자살을 선택했다.

8월과 9월에 베이징에서만 1,772명이 홍위병에 살해되고, 상하이에서는 704명이 자살하고 534명이 살해됐다. 당국은 이런 홍위병의 폭력을 막는 것을 제지당하거나 방관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당시 공안의 수장을 맡았던 셰푸즈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맞아서 죽어도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만약에 이렇게 때려죽인 사람을 구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무법 천지였다. 류샤오치는 카이펑으로 유배되었다가, 지병 치료를 거부하여 1969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덩샤오핑은 재교육 과정을 세번 거치고 엔진공장에서 일했다.

 

린뱌오 숙청

 

이 광풍의 배경에는 국방부장 린뱌오(林彪)가 버텨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민해방군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마오쩌둥의 주장에 따라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하지만 마오가 권력에서 밀려나자 군부를 틀어쥐고 있던 린뱌오에 구원의 신호를 보냈다. 린뱌오의 인민해방군은 마오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통해 당을 공격했다. 당이 무력해 졌다. 마오는 린뱌오의 지지에 힘입어 홍(紅)의 정책, 즉 문화대혁명을 밀어부쳤다.

덕분에 류샤오치가 퇴진하고 린뱌오가 마오의 후계자 자리에 올랐다.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명의를 이용해 권력을 크게 확대했다. 린뱌오는 문혁 발발 2년후인 1968년에 중국 지도부에서 가장 유력한 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마오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권력의 정점에 도달하자 린뱌오는 2인자 자리도 모자라 마오의 후계자 자리를 탐했다. 마오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린뱌오는 후계자 자리를 확실하게 차지하기 위해 류사오치 실각으로 빈 국가주석 직을 달라고 했다. 마오는 이를 거부했다. 린랴오는 쿠데타를 준비했다. 하지만 노회한 마오는 이를 알아차리고 린뱌오 주변을 단속했다.

1971년 린뱌오가 탄 비행기가 몽골 상공에서 추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린뱌오는 아들에게서 급히 비행기를 한 대 얻어 소련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그 비행기엔 연료도 부족하고 조정사도 없었다. 급유를 위해 소련 영향권에 있던 몽골의 공항에 내렸지만, 날개가 지면에 부딪치는 바람에 비행기는 추락해 부서졌고, 린뱌오는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마오의 죽음, 사인방 축출로 끝난 광기의 시대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죽음과 부인 장칭을 필두로 한 4인방의 몰락으로 종언을 고했다. 1976년 3월에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사망한데 이어, 9월 9일 다년간 파킨슨 병을 앓고 있던 마오쩌둥이 83세의 나이로 숨졌다. 사망 직전에 마오는 화궈펑(華國鋒)에게 "당신이 맡는다면 나는 안심이다"는 쪽지를 남기고 후계자로 삼았다. 화궈펑은 덩샤오핑과 연대했다.

문화혁명을 이끌고 있던 4인방이 정변을 꾀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주동자는 마오의 부인인 장칭(江靑), 문혁의 총성을 울린 야오원위안(姚文元), 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왕훙원(王洪文), 정치국 상임위원 겸 국무원 부총리 장춘차오(張春橋)등 4명이었다. 이들은 당과 국가의 지도권을 찬탈하려 했지만, 기밀이 사전에 누설됐다. 화궈펑과 덩샤오핑, 군부는 재빨리 이들 4명을 체포했다. 4인방은 숙청되고, 드디어 10억 중국인을 어지럽힌 10년 대동란은 끝나고 말았다.

그후 덩샤오핑이 집권하고, 개혁개방 정책을 취하며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악귀에서 해방되고 주자파로 몰렸던 실용주의자들에 의해 본격적인 경제건설을 도모하게 된다.

홍(紅)과 전(專)의 지리한 싸움에서 결국 전(專)이 이긴 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애써 문화대혁명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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