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금동신발 주인은 마한인일까, 백제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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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금동신발 주인은 마한인일까, 백제인일까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4.0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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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전 금동신발 복원…호남 고대사의 미스터리 푸는 계기될 듯
▲ 1,500년만에 복원된 나주 금동신발 /사진=문화재청

 

이 신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2014년 12월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됐던 금동신발을 현대의 최첨단 기술과 전통 공예기술을 접목하여 복원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이 신발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백제인의 것인지, 마한인의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문화재청은 보도자료에서 1,500년전의 금동신발 모습을 그대로 되살렸다고만 밝혔다. 나주에서 발견된 이 금동신발은 백제의 전통적인 금속공예기법 중에서도 난이도가 매우 높은 투조기법(透彫技法)과 축조기법(蹴彫技法)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고 설명했을 뿐이다.

1,500년전 당시로는 최고의 기술이 사용된 금동신발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2014년 10월 발견 당시에는 마한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다량의 유물의 하나라고 나주문화재연구소는 밝혔다.

전라남도 일대는 오랫동안 마한의 영역이었다. 그러면 전라남도 일대가 백제에 복속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호남의 원류인 마한을 오랫동안 연구한 전남대 임영진 교수(인류학)의 견해를 들어보자. 내용은 전남대 출판부가 엮은 「전라도를 다시 본다」는 책자 가운데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라는 장에서 인용한다.

 

 중국 정사의 하나인 『양서(梁書)』 「백제전」에는 “백제는 전국에 22개 담로를 두고, 왕자나 왕족을 보내 다스리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담로는 백제의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읍성(邑城)을 의미한다. 이 22개 담로는 백제 사신이 551년에 양나라에 전한 내용이다. 하지만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당시, 지방행정조직은 37군으로 확대된다.

그러면 100여년 사이에 변한 22개 담로와 37개 군의 차이는 무엇일까. 임영진 교수는 6세기 중엽에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고, 마한 땅이 백제의 지방조직으로 편제됐을 것으로 추론했다. 즉 병합 이전의 22개 담로를 그대로 군으로 편제하고, 새로 병합한 마한 땅에 15개 담로를 추가 설치했다는 해석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후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재편하고, 백제 지역엔 웅주, 전주, 무주등 3개 지역을 설치했다. 웅주는 지금 충청도와 영역이 비슷하고, 전주는 전라북도, 무주는 전라남도와 대체로 겹쳐진다. 통일신라는 웅주에 13개군, 전주에 10개군, 무주에 13개군을 설치해 백제지역에 모두 36개의 군을 두는데, 백제 멸망시기의 37개 군과 1개군의 차이가 난다. 신라는 백제의 지방조직을 크게 바꾸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중 웅주와 전주의 군을 합치면 23개군으로, 『양서』의 백제 22담로와 대체로 비슷한 수치를 구성한다. 백제 사신이 중국 양나라에 건너간 551년까지 전라남도, 즉 신라의 무주 지역이 백제에 병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임영진 교수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영산강 유역과 전북 서남부 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지금의 전남과 전북 서남부 지역은 백제 22개 담로에 편성되지 않고, 독자적인 마한 문화권을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임영진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전남 일대의 마한 세력은 550년까지 독자세력을 구축했고, 그후 100여년간 백제에 복속되었다가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에 병합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복암리 정촌 고분의 금동신발은 마한 귀족들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 금동신발은 평상시 신고 다니던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로선 금속제, 특히 금을 입힌 신발을 신고 다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번에 복원된 신발의 한쪽 무게는 부식물이 포함된 진품이 510g, 복제품이 460g이다. 일반적인 신발보다는 크고 무거워 피장자를 위한 부장품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선 백제왕이 선물로 주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출토된 금동신발은 백제 왕릉군 또는 마한 토착 지배세력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서산, 공주, 익산, 나주지방 등 유력세력이 있었던 곳에서 발견되었다. 금동신발이 백제의 지방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은 백제왕이 영토를 확장한 후 지방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하사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다.

▲ 복원전 금동신발 /사진=문화재청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1호 돌방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앞서 발견된 17개의 금동신발 유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형태를 갖춰 처음 공개될 당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최초 발견부터 보존처리가 완료되기까지 1년여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이 과정에서 금동신발의 재료학적 특징과 제작기법을 밝히기 위해 3차원 입체(3D) 스캔, 엑스선(X-ray)과 CT(Computerized Tomography, 컴퓨터단층촬영법) 촬영 등 최첨단 기법이 동원되었다.

금동신발은 무령왕릉을 비롯한 고창 봉덕리, 공주 수촌리, 고흥 안동 고분 등에서도 발견되었으나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이 용 모양 장식과 문양 등이 완벽한 상태로 출토됐다.

분석결과, 금동신발의 몸판은 두께 0.5mm의 구리판에 5~10㎛(1㎛=1/1,000mm) 두께로 순금(99%)을 입혀 만들었음을 알아냈다.

발등 부분의 용머리 장식을 비롯하여 금동신발 바닥과 옆판에서 발견된 다양한 문양(연꽃, 도깨비, 새 문양 등)은 백제의 전통적인 금속공예기법 중에서도 난이도가 매우 높은 투조기법(透彫技法)과 축조기법(蹴彫技法)이 사용되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복원품은 이와 같은 분석결과를 토대로 ‘3차원 입체(3D) 스캔 등 정밀 계측 자료를 통한 설계도면 작성 → 용머리 장식, 양 옆판과 바닥판, 고정못, 스파이크(바닥 장식용 구리못) 등 부속품 제작 → 문양 표현 → 수은 아말감 도금 → 조립’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특히, 전통 도금기술인 수은 아말감 기법을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참고로, 이번 복원품은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전시실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한편,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금동신발을 활용한 문화콘텐츠 계발을 위해 주요 문양을 국유특허로 등록한 바 있다.

▲ 복원과정 /사진=문화재청
▲ 금동신발에 새겨진 문양 /사진=문화재청

 

(용어해설)

* 투조기법(透彫技法): 금속판의 일부를 끌이나 톱으로 도려내는 기법

* 축조기법(蹴彫技法): 금속판에 쐐기 모양의 삼각형을 새긴 자국으로 선을 그려가는 기법.

* 수은 아말감(amalgam) 기법: 수은과 금가루를 혼합하여 금속 표면에 바른 다음, 365도 이상의 열을 가해 금가루가 금속 표면에 붙을 수 있게 수은이 접착제 역할을 하는 전통 도금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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