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①] 광기와 혼란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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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①] 광기와 혼란의 시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4.03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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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서 밀려난 마오쩌둥이 홍위병을 부추긴 10년 내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전후해 이 나라가 50년전에 일어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닮아가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많다. 1966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전개된 문화대혁명을 2회에 걸쳐 되짚어본다.

 

▲ 주자파로 몰린 인사들이 트럭에 태워진채 군중시위에 끌려다니고 있다. /위키피디아

 

그들도 처음엔 서로간에 열띠게 토론하고 변론을 벌였다. 토론은 점점 격화했다. 그러다가 서로 욕을 퍼붓고 비난했다. 급기야 주먹질을 했다. 얼마 안가 폭력사태로 번졌고, 국가 전체가 내란의 지경에 이르렀다.

바로 50년전 중국에서 있었던 문화대혁명 때의 일이다. 1966년 시작한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하고 장칭(江靑)등 4인방이 몰락하는 1976년까지 10년에 걸쳐 전개됐다. 그래서 ‘10년동란’(十年動亂)이라고도 한다.

광기의 시대였다. 대중이 얼마나 광기에 빠지고 사회와 나라를 혼란의 나락으로 추락시킬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중국이 경제를 뒷전으로 하고 좌와 우의 이념 내전에 빠져 있을 때, 대한민국은 개발도상국의 선두주자로 경제성장을 이룩할수 있었다.

 

▲ 주자파로 몰린 반체제 인사들이 대중들 앞에 서 있다. /위키피디아

 

인류역사 초유의 광기

 

이 10년 사이에 중국 전역에 걸쳐 3만4,800명이 사망하고, 72만9,511명이 박해받았다는 게 공식 통계다. 중국의 대표적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라오서(老舍)는 홍위병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귀가한뒤 이튿날 시체로 발견됐고, 1911년 신해혁명 초기부터 참가한 철학자 슝스리(熊十力)는 박해를 받던 도중에 사망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를 작사한 톈한(田汉)은 우파 분자로 낙인 찍혀 숙청당했고, 1920년대 중국 공산당을 이끈 리리싼(李立三)은 심판 비판을 받아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크게는 조반파(造叛派)와 보황파(保皇派)로 갈라졌다. 조반파는 낡은 것을 뒤집으려는 좌파세력이었고, 보황파는 집권세력을 보호하려는 우파세력이었다. 어느 학교에서나, 직장, 지방에서도 예외없이 상급자들과 반란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수백만명의 중국인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자본주의의 주구라는 뜻의 ‘주자파’(走資派) 또는 수정주의자로 몰린 인사는 감금, 강간, 심문, 고문 등을 당하는 것이 예사였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수십만명 또는 그 이상의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굶어 죽거나, 중노동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또한 수백만명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

문화혁명이 막시작된 1966년 10월 이전에 시정잡배로 지목받아 농촌으로 쫓겨난(하방) 사람은 전국적으로 40만명이 넘었다. 1966년 8월 하순부터 9월말까지 40일 동안에 베이징에서만 8만5,198명이 쫓겨났고, 맞아서 죽은 사람이 1,772명, 재산을 몰수당한 가구가 3만3,695호에 달했다. (진춘밍(金春明) 사쉬옌(席宣) 저 「문화대혁명사」에서)

어떤 사람은 구타와 폭행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덩샤오핑의 아들인 덩푸팡은 홍위병의 구타 때문에 4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목숨을 건졌으나, 신체장애인이 되어 휠체어에 몸을 의지했다. 지금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도 문화혁명때 농촌으로 쫒겨난뒤 갖은 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땐 삶과 죽음의 교차에 놓여 있었다.

조반파의 전위대인 홍위병은 부모 세대와 교사들의 타락과 부패, 비리행위를 캐내고, 기존 권위주의와의 타협을 거부했다. 건물, 공예, 서적 등의 중국의 많은 역사적 유산들은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되어 파괴되었다. 홍위병들은 각 가정에서 공예품을 탈취하거나 파괴했다. 수천년의 문화유산들이 이 기간에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공자의 흉상이 부서지고, 유교 서적이 불태워졌다. 티베트에서만 6천여개의 사찰이 파괴되고, 위구르 무슬림들이 무참히 학살됐다..

국가는 10년 사이에 붕괴 직전까지 갔다. 공산당 조직은 심하게 파괴되었고, 수많은 당지도자들이 숙청됐고 파면당했다.

경제는 정지했다. 공업과 농업 생산은 후퇴했고, 교육제도 마비로 인해 국가는 훈련을 받을 인원을 모두 잃었다. 젊은 세대만이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 아니다. 중년과 노년의 학자, 과학자들도 농촌으로 보내져 수년간 연구를 하지 못한채 똥지게를 져야 했다.

 

▲ 홍위병 /위키피디아

 

정권욕이 빚은 참사

 

그러면 춘추전국 시대와 같은 천하의 광란은 어떻게 발생했는가. 바로 마오쩌둥의 정권욕에서 출발한다.

1959년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에서 물러났다. 이어 류샤오치(劉少奇)가 국가주석, 덩샤오핑(鄧小平)이 당총서기를 맡게 되었고,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총리직을 유지했다.

권력을 장악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방식에 의심을 품었다. 마오는 홍(紅: 대중의 혁명의식, 즉 마오주의)을 강조하고 전(專:실용적 전문지식)을 경시했다. 마오가 중국 대중을 동원해 정신적 이념에 소모하도록 했고, 실효성이 없는 인민공사를 강조하면서 경제를 침체에 빠뜨렸다는 게 신집권층들의 실용주의적 노선이었다. 그들은 처음엔 마오쩌둥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다만 마오의 노선이 실행되지 못하도록 소극적인 자세로 대응했다.

그러다가 인민의 궁핍함을 본 류사오치는 집단농업방식인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농민 개인의 사유화를 일부 인정하는 이전의 체제로 돌아가려 했다. 인민공사는 마오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실권에서 손을 떼고 상징적인 당주석직만 보유하고 있던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뜻대로 가다가는 자신의 사후에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사상이 침투해올 것을 두려워했다. 마오는 후계자로 지정해둔 류사오치를 불안하게 바라보았고, 두 파벌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었다.

1959년 8월 펑더화이(彭德懷)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마오의 오랜 전우로, 한국전에도 참여했으며 국방부 부장으로 군부를 쥐고 있었다. 그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실용파에 동조해 마오의 사회주의 개조노선이 “경솔하고 지나치다”고 비판했고 혼란의 원인이 인민공사에 있다고 지적했다. 펑더화의의 비판은 마오를 격앙케 했다. 마오는 다른 당원들의 동조를 얻어 팽더화이를 국방부장에서 해임하고 당에서 축출하고 만다.

이후 얼마간 마오 세력과 류사오치의 세력 사이의 갈등 관계는 수면하에 들어갔다. 포문은 마오측에서 먼저 열었다. 그것도 언론을 통해서였다.

 

▲ 홍위병들에게 끌려나온 펑더화이(彭德懷) 전 국방부장.

 

언론을 통해 권력 투쟁 전개

 

문화대혁명의 첫 번째 총성은 상하이의 「해방군보」 편집장 야오원위안(姚文元)에 의해 울렸다. 1965년 11월 10일 그는 「문회보(文匯報)」에 ‘새로 편집한 역사극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가한다’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 글은 마오의 지시와 그의 부인 장칭의 검수 하에 쓰여진 것이었다.

해서파관은 베이징시 부시장이던 우한[吳晗]이 창작한 신편 역사극으로, 명(明)나라때 청백리였던 해서(海瑞)의 정신을 배우자는 마오쩌둥의 요청에 호응한 역사극이었다. 마오도 처음엔 이 극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 장칭과 야오원위안은 이 희곡이 독초이며, 마오를 황제에 비유하고, 해서를 펑더화이에 은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명인사였던 야오원위안이 쓴 논평이 중국 전역에서 주목을 받았고, 논란을 야기했다. 많은 신문들은 이것이 언론탄압의 계기가 될 것을 우려하며 표현의 자유를 요구했고, 베이징 시장이었던 펑전(彭眞)은 우한을 지지하여 이 비판이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마오가 베이징 부시장에 불과한 우한을 타깃으로 삼은 것은 전략적이었다. 우한을 무너뜨리고 그 다음엔 시장인 펑전, 마지막으로 펑전의 지지자였던 류사오치 주석을 겨냥한 것이다. 여기에 펑더화이 실각후 군부를 장악한 국방부장 린뱌오(林彪)가 합세했다. 역사극에 대한 언론의 비평으로 시작된 문화 투쟁은 본격적인 권력투쟁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1966몀 3월말 베이징 시장이던 펑전은 소리도 없이 종적을 감추었다. 곧이어 4월 8일 중국 인민해방군 기관지인 「해방군보」는 “마오쩌둥 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문화 대혁명에 참여하자‘라는 사설을 발표했다. 이 무렵 류사오치는 외국을 순방중이었다. 칼끝이 류사오치 주석에게 가 있었다.

 

▲ 대학가에 덕지덕지 붙은 대자보. /위키피디아

 

마오쩌둥 “사령부를 폭파하라”

 

1966년 5월 16일, 마오의 주재 하에서 당 정치국은 문화대혁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5·16 통지)를 발표하고, 베이징시를 장악하고 있던 펑전 등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통지는 펑전 일파에 대해 "표리부동한 자세로 마오쩌둥 동지의 교시와 위대한 문화혁명을 공격했다“고 주장하였다"고 했다.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도 달아올랐다. 5월 18일 린뱌오는 한 연설에서 "마오 주석은 천재이고, 마오 주석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맞다. 마오 주석의 한마디는 다른 정치인의 만 마디 말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서 학생들이 나서도록 지시했다.

5월 25일 베이징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인 여성 녜위안쯔는 대학 당국과 다른 교수들이 우파 또는 반당분자라고 고발하는 대자보를 써 붙이고 대학생들에게 온건파 학자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데 참여하라고 촉구했다. 며칠후 마오는 이 대자보를 전국적으로 회람해 반영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문화대혁명의 기세가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옮겨 붙은 것이다.

마오는 5월 29일 칭화대학 부속 중학교에서 첫번째 중학생 홍위병이 결성됐고, 이들은 칭화 대학을 무더기로 찾아가 교문을 무너뜨렸다.

6월 1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자본가와 그 앞잡이, 그리고 지식인들을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 27일 홍위병 대표단이 마오에게 서한을 보내 조반유리(造反有理), 즉, 사회와 정치·문화를 뒤집어 엎고 대량숙청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오는 이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를 표시했다.

8월 8일 마오쩌둥은 인민일보에 “사령부를 폭격하라”(炮打司令部)는 선동적 구호의 논평을 직접 실었다.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②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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